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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르네바 Aug 22. 2023

타국의 오래된 도시에서 동네 뒷산을 떠올립니다

프라이부르크 #1


좋은 숙소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 베트남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도미토리나 싸구려 모텔방에서 지냈는데 지나치게 시끄럽거나 우울할 정도로 답답했다. 밤 늦게까지 파티를 하는 서양인들에 떠밀려 결국 밖으로 나돌거나 포장지로 감싸인듯 노란 벽지로 둘러싸인 좁은 방에서 정신이 혼란해질 정도로 멍하니 있었다.




이번 여행에선 다르다. 첫날에 도착이 늦어 어쩔 수 없이 취리히 공항 근처 캡슐호텔에서 머물렀다. 프라이부르크에선 넓고 조용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채광이 좋은! 그런 방에서 머물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미뤄둔 샤워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여자친구와 통화를 했다. 한국의 무더위에 고생하고 있어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늦봄이다. 쌀쌀하면서도 따뜻한, 벚꽃이 초록잎과 뒤섞여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묘한 아름다움을 그리는 계절.







이곳 날씨는 늦봄보단 늦가을에 가깝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한국인들이 모두 부러워 할 그런 날씨다. 전화를 끊고 앉았다. 창밖이 흐리다. 해가 아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빛을 내리 쏠 무렵엔 이미 외출한 이후겠지. 어젠 여덟시쯤 숙소로 돌아왔다. 낮이 정말 길어서 아홉시나 되어 저녁해가 저물기 시작하였고 방문에 은은한 하이라이트 조명(이게 말이 되냐 싶다만)을 쏘았다. 실내 인테리어 자체가 노랑, 빨강, 주황 계열로 꾸며져 있는데 거기다 햇빛까지 더 하니 그림 한 폭이었다. 아름다운 대상세계를 그림 같다고, 그림은 실물 같다고 생각하는 것에 모든 걸 빗대고자 하는 욕망이 담겨 있는 걸까.




앞서 쓴 글들에서 이미 언급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매일의 경험과 느낌을 이틀이 지나기 전에, 그러니까 늦어도 다음 날에, 이렇게 글과 사진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베트남과 오스트리아에서 하지 못했던 그러나 해야 했던 일이다. 뿌옇거나 사라져 버린 기억들이 많다. 여행의 값어치란 게 따로 정해져 있진 않겠지만 무언가 잃어버린 듯 아쉽다. 어떤 식으로든 신경망 속에 당시의 감정들이 남아있겠지만 '이것이 이것 때문이다'라고 항상 인과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엔 부족하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기록행위를 '글쓰기'라 여기지 않는다. '글쓰기'라 불리는 행위가 갖는 무거움에 거부감이 느껴진다. 좋은 글을 써야만 할 것 같고 내 글에 어떤 의미가 부여되어야 할 것 같다. 글에 대한 평가를 의식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아주 쓸모없는 글이 써 진다. 여기서 말하는 '쓸모없는 글'이란 다른 누군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글이다. 내게 맞는 말 틀린 말은 중요치 않다. 그걸 정말 내것으로 느꼈고 생각했는지, 그래서 어떠한 거짓도 담겨있지 않은 글인지가 중요하다. 이런 글쓰기는 즐겁고 쓰면서도 두근거린다. 진짜다.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는 목적을 담은 글도 전문적 지식과 치밀한 논리만 가지고 쓴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부족할 것이다. 학계에서 인정을 받기는 더 수월하겠다. 요즘 같은 전문가들의 시대에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학계의 인정이 '권위에 대한 복종'을 불러내는 것 말고 더 큰 사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학문이 발전하고 세분화되며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학문과 별개인 인생의 행로를 택한 사람들은 계속하여 배제된다. 전문적이고 논리적인 글에 저자 자신의 모습을 담아야 한다. 그래야만 원하는 바가 더 잘 전달될 것이다. 글쓰기는 멋부리는 게 아니다. 희망과 슬픔을 나누는 인간의 수많은 소통 도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걸 깨닫게 해 준 그녀에게 감사하다.



서두가 길었다. 이제 어제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정리해보아야겠다. 프라이부르크에서 5일을 보낸다. 어제가 첫 날이었고, 아주 평화롭고 행복한 날이었다. 남은 나흘 동안 내 상태가 어떻게 변화해갈지 추적해가는 것도 꽤 재밌는 일이 될 것이다.




1.

숙소에 짐을 푸니 8시반이 넘었다. 도착하고 20분 정도를 집주인 할머니께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독일인들은 이러니저러니 너는 이걸저걸 조심해야 하고 난 이런 걸 싫어하니까 넌 저런 걸 하면 안 되고......' 같은 잔소리를 들어서 20분이나 필요했던 건 절대 아니다. 할머니는 수도꼭지를 어디로 돌려야 온수가 나오는지부터 전자레인지 사용법과 지난 숙박객이 남겨 둔 시리얼까지 일러주셨다. 말을 길게 하는 게 부담인지 숨차하시면서도 설명이 끝나지 않았다. 내일 있을 음악축제 관련 정보까지 구글맵으로 보여주시는데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으시더니 오래 서 있는게 힘들다고 하신다. 대부분 다 아는 이야기라 말씀 안 해주셔도 된다고 하고 싶었으나 열정적인 할머니 모습에 미처 그러지 못했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9시에 일어나 활동을 시작한다고 하셨는데 그 시각쯤 되니 밖에서 종소리가 울려온다. 이 소리를 듣고 깨시는 걸까? 생각해보니 일요일이다. 종을 평일에도 치려나? 궁금했는데 오늘 아침 의문이 해결되었다. 종소리는 매일 울리지 않는다. 할머니는 본인의 신체 리듬대로 9시에 일어나는 거다.








방을 둘러보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동남아 식당이 근처에 있었다. 지난 번 여행까진 한 번도 느껴보지 못 한 욕구가 일렁였다. 쌀밥이 먹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현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이 사그라든 것 같다. 먹어보니 다 거기서 거기...... 스튜요리라 해서 시켜보면 갈비탕이고 빨간 국물이면 시큼한 김치국이고....... 둔한 미각도 한 몫 하겠다. 아프리카 음식이나 중동 음식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 강하다. 이마저도 결국 해소되고 여느 관광객처럼 어딜 가든 한국음식을 찾고 다니겠지. 하다못해 '아시안 푸드'라고 써 붙인 곳이 있으면 바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독일 식당에선 음료를 항상 주문하는데 본식이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즐기라는 의미에서 주문과 동시에 가져다준다. 맥주를 시키고 주변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옆에 중년 커플이 달싹 붙어 알콩달콩 하는게 괜히 부러웠다. 혼자 오는 여행의 또 하나 단점이 이것이다. 뭐, 이러면서 다시금 확인하는 거겠지. 익숙한 것들의 소중함을.



유럽 여행 올 때마다 곤란함을 안기는 것은 음식의 양이다. 1인분으로 시키면 항상 1.5인분 2인분이 나온다. 우걱우걱 먹다보면 결국 다 먹긴 한다. 매번 과식한다는 게 문제다. 추가메뉴로 있는 볶음밥이 우리나라에서 본메뉴로 시키는 볶음밥과 비슷하게 나온 걸 보고 '맛있겠다!'는 생각보단 '이걸 어쩐다'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2.

다음 날 아침,  프라이부르크 올드 타운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Altstadt(알츠슈타트)는 말그대로 '오래된 도시'를 의미한다(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 정도 의미라도 스스로 알 수 있다는 게 뿌듯하다). 이 구시가지는 꽤 넓은데 이 곳에 프라이부르크 대학 건물들이 이곳저곳 흩어져 있다. 우리나라 대학처럼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지 않았다. 내가 못 본 건지 모르겠는데 대학 정문 같은 것도 없었다. 지역 공동체와 상생하며 학문의 권위를 높이지 않는 구조다. 드높이 세운 정문이나 외부와 내부가 명확하게 구별되는 대학은 배타적이고 방어적이다. 배타성과 방어적인 자세는 들키지 말아야 할 무언가, 가령 알맹이 없는 허영이나 권위의식 같은 것을 숨기고 있기 마련이다.


올드타운의 범위


이곳에서 놓칠 수가 없는 구조물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올드타운 곳곳에 흐르는 인공수로 베히레(bächle)와 상점 문 앞에 꾸며진 모자이크 로고이다. 베히레는 상수도와 소방용으로 16세기에 만들어졌다는데, 상세한 역사 이야기를 여기서 할 생각은 없고,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베히레가 조성하는 도시의 경관이다. 콘크리트가 아닌 돌로 깔린 도로변을 휘감아 흐르는 수로는 물소리와 함께 청량한 느낌을 주었다. 어린아이들은 장화를 신고 베히레 속에서 첨벙대며 장난을 쳤다. 비가 오니 더 거세진 물길이 내는 힘찬 소리가 여행 첫 날 내리는 비에 오히려 감사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상점 문앞 마다 있는 모자이크 로고는 이 상점이 어떤 상품이나 산업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나타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간혹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싶은 모양도 있긴 했다. 가게 주인의 취향과 의도를 담은 건 분명하리라. 이러한 도드라지는 개인성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오래된 건물들을 지켜나가면서도 그곳에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의 개성을 드러낼 여지는 충분히 존재했다.




(왼쪽) 가게 로고 / (가운데)베히레 /. 오른쪽) 프라이부르크 골목길




돌길과 파스텔톤의 건물들과 장난치는 어린아이들, 그리고 여기에 더 해 지나다니는 차 한 대 없다는 사실! 프라이부르크는 생태도시로 유명하다. 트램과 자전거만 있으면 전혀 불편함을 못 느끼며 생활이 가능하고 한다. 실제로 와 보니 여기엔 어느 과장도 섞여있지 않다. 물론 구시가지를 벗어나면 아스팔트 도로 위 차량들이 오가는 걸 볼 수 있으나 우리가 흔히 상상할 도시의 모습과는 여전히 차이가 크다. 다니는 차가 많지도 않으며 모두들 서행한다. 아, 정말 살기 좋은 곳이 맞다. 독일인들이 가장 살고 싶은 도시 중 1위로 뽑을 만하다. 올드타운은 옛 중세도시 같고, 이 지역을 벗어나면 여러 편의시설이 즐비한 도회지가 있다. 도시 전체적으로 데시벨이 낮다. 문화적 자원도 풍부하다. 맛있는 맥주도 있다! 사람들은 진지하면서도 친절한데, 이런 쪽이 활발하고 웃음 넘치는 친절함보단 내 성향에 더 맞다. 프라이부르크 대학 도서관도 날 설레게 만들었다. 독일 유학의 목적지가 정해진 것 같다.



프라이부르크 대학 도서관은 사진에서 보다시피 현대적인 건물이다. 주변의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분위기 맞추자고 이마저도 벽돌로 지었으면 너무 따분하지 않나?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 필요도, 그렇다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다. 방향성만 갖추면 된다. 물론 이 도서관의 방향성에 전체 도시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포함이 되었는진 의문이긴 하다. 사실, 너무 튄다.



중심지 근처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며 여자친구와 통화를 했다. 동네 뒷산이랑 똑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것 그대로라는 이야기도 했다. 맞다. 다르지 않다. 그래도 같이 오고 싶다. 상상그대로고 뻔한 정경이라도 그곳을 같이 걸으며 나눌 대화와 감정은 긴 비행과 비싼 여비마저도 매몰비용을 넘어 소득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오랜 이동시간으로 피곤해진 서로를 걱정하고 챙겨주면서, 비싼 여비를 들여 하는 여행을 당신 아닌 그 누구와도 가고 싶지 않다고 여기는 마음으로 서로에 대한 확신을 다시금 굳히면서.




이후 현대예술 박물관을 들러 또 한 번의 예술탐방(빈에서 지겹도록 하지 않았던가...)을 하고 올드 타운 내 펍에 가 축구를 보며 맨시티와 아스날의 커뮤티니실드 경기를 보았다. 생각보다 축구팬이 적어 아쉬웠다. 다들 동행들과 떠들고 먹기 바쁘지 경기를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루해져 전반전만 보고 나왔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 멍하니 앉아 사람 구경을 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뮌스터 성당 앞 기념품점에서 산 와인을 한 잔 마시니 금세 졸려졌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30분 정도 보다 잠에 들었다. 내일은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를 봐야지. 국내개봉은 아직이다. 독일자막만 있을 거라 내용을 반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독일인과 뒤섞여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는 일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다.




프라이부르크의 현대예술 박물관 (Museum für Neue Kunst)에서 인상깊게 본 작품들 몇 점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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