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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르네바 Mar 25. 2024

서구식 아침드라마는 오스카 후보에도 오를 수 있습니다

패스트 라이브즈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이라는 말을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해주었다. 그 단어가 지닌 감정적 층위가 더 깊이 느껴졌다거나, 어두웠던 의미론적 지평이 발견되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서구의 관점을 취할 때, 이 단어가 얼마간의 생경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작은 깨달음이 있었다. 핀란드 버스정거장에서 1미터씩 떨어져 서 있는 승객들의 (물리적이기도 하고 정신적이기도 한) 거리감에서 느낀 작은 놀라움처럼. 



주체가 공동체에 우선한다는 사고방식과 공동체가 있기에 주체가 존립한다는 사고방식 사이 간극은, 아무리 못해도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바닷물의 깊이나 넓이만큼은 깊고 광활할 터다. 주체의 자유와 권리를 공동체의 단합이나 규율보다 더 중시하거나 최소한 대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문화 속에서, 주체가 취하는 외면적인 모양새나 내면적인 태도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평균압이 적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동체 내 조화가 주체의 자발적인 자기 표현보다 더 중요한 문화라면 그 공동체가 지향하고 있는 특정한 목표나 가치관은 강한 평균압으로 작동한다. 평균이라는 조화 속에서 주체들은 한낱 개인의 주관성을 초월한 객관적 일체감 속에서 고양된다. 공동체는 운명이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마주침은 운명적 만남, 인연이 된다. 



단 두 사람의 회합도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할 때,  이때 느끼는 일체감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왜 하필 우린 같은 반이 되었고, 어쩌다 하굣길이 같았고, 이런저런 사소한 것들은 다 우연으로 치부한다고 하더라도 왜 넌 날, 나는 널 좋아하게 되었을까, 등등의 질문은 사랑에 서사를 부여하는 과정이 된다. 결국 모든 낱낱의 우연들은 하나의 운명을 향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인연의 관점에선 개인이 공동체를 선택하고, 그 공동체 내에서 취할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모습이 나의 선택을 이미 선결해놓았다. 낭만적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연인의 인연도 마찬가지다. 여러 우연들이 쌓여 만들어진 운명이라는 규율 속에서 개인들은 인연이라는 운명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그 인연이 비록 빗나간 인연일지라도, 우리는 이번 생에선 정해진 바의 인연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되어 있는 거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지난 생의 인연이 어떠했기에 이번 생의 인연은 이러한가, 이번 생의 인연은 이러하기에 다음 생의 인연은 이러할 것이다. 인연은 이렇게 생의 공동체로 확대된다. 



할리우드식 로맨스였다면, 즉 개인이 가진 선택의 자유로움과 그 권리에 대한 시각이 서사를 지배하고 있었다면, ‘이번 생의 인연은 아닌가보다’ 라는 식의 체념보단 ‘(운명을 거스르는) 사랑의 쟁취’ 형태의 이야기가 더 흔하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극중에서 거듭 반복되는 인연이라는 말이 힌트가 되지 않았더라면 영화에 대한 서양 문화계의 호평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소심한 동양인들’의 또다른 일화 정도로 치부되었을지도. 생각해보면 흔하지 않은가. 운명적으로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사랑시, 사랑가, 사랑 영화, 너무 흔히들 보아왔지 않은가. 소위 ‘아침드라마’의 단골 소재 아니었던가.



인연이라는 모티브는 결국 <패스트 라이브즈>처럼 동서양의 정체성 모두를 흐릿하게 가진 배우들과 역할들 속에서 극대화될 수 있었다. 모든 배경을 동양적으로 바꿨다면 지극히 진부한 멜로드라마가 되었을 것이고, 반대로 오직 서구적인 연출이었다면 인물들의 개별적인 심리적 문제로만 해석되었을 것이다. 동서양의 교합 속에서 인연은 더 이상 진부한 단어로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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