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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 May 24. 2018

수수께끼 베일의 세상을 '버닝'

<버닝>(2018)

   젊은이들의 이야기 <버닝>에는 청춘이 없다. 인간 일반으로 그려지는 두 청년 사이에 사랑의 대상이자 제물로 바쳐진 젊은 여성이 놓여있다. 이들의 청춘은 비루한 일상을 타개할만한 힘도, 사고도, 역량도 없다. 그저 바라보고 관망하며 꽁무니만 뒤쫓다 분노만 남기고 만다. 관객은 메타포 해석에서 오는 피곤에 찌들며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주인공 종수(유아인)의 노동량 만큼이나 무거운 피로를 경험한다. 맞불을 결심하는 더 큰 ‘분노’만 남는 결론.




   영화는 종수의 단일시점을 따른다. 종수는 우연히 만난 중학교 동창인 해미(전종서)를 두고 새로운 인물 벤(스티븐연)과 갈등한다. 종수와 해미는 계급적 위치에 갇힌 일상을 산다. 종수에게 말 붙인 해미는 그저 좋아서 판토마임을 배우고, 인생의 의미를 갈구하는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기 위해 아프리카 여행을 계획하는 등 순수를 쫓는다. 송사로 집을 비운 아버지(최승호)를 대신해 종수는 파주의 본가를 왕래한다. 좁은 창으로 남산타워에서 반사된 볕이 잠시 머물다가는 해미의 단칸방과 주거촌 풍경, 온기라곤 찾아볼수 없는 유리 철문과 슬레이트 지붕의 낡고 스산한 종수의 ‘본가', 해미는 그런 종수의 집을 두고 '꼭 옛날 우리 집에 온 것 같다'며 괴로운 감정을 삼키며 눈물을 글썽인다. 마른 우물에 빠진 7살 해미가 자신을 구해주길 원하며 간절히 바라보던 좁은 우물 입구처럼, 단칸 방의 좁은 창처럼, 탈출을 꿈꾸기 힘든 일상의 고립은 갑갑하다.
    해미가 만난 낯선 남자 벤, 종수는 그를 경계와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종수는 요란하게 전화하는 벤의 첫인상에서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같다. 벤을 대하는 종수의 태도는 늘 조심스럽다. 벤의 고급차 포르쉐 앞에선 종수는 자연스레 겸손해진다. 값비싼 요란함에 위축된 나머지 종수는 해미를 벤의 차에 태워보낸다. 그런 종수를 빤히 바라보는 해미의 표정.
    말끔한 동네(반포)와 정돈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고급저택에 사는 벤은 두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종수의 시점에서  벤류의 사람들은 '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돈은 많은', '개츠비'같은 '수수께끼'의 사람들이다. 특정 계급의 일원으로 벤을 파악하고 분석할 능력이 있는 종수와 다르게 해미는 '(벤은)나 같은 사람 흥미 있어해'라며 한치의 의심도 없이 순진한 믿음을 유지한다. (또 여자는 감정에 취한 순진한 제물인가요. 네? 순진하고 무구해 보이던 종수의 어머님이나 돈 앞에 순진해 해미가 사라진줄도 모르는 해미 어머니와 언니 등등 한결 같습니다.) 이런 종수의 눈에는 아프리카 여행기를 늘어놓으며 '리틀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재현하는 해미나 클럽에서 제 흥에 취해 춤추는 해미를 우스꽝스럽게 보고 비웃는 벤의 친구들이며 하품하는 벤의 표정들이 불편하다.
    '눈물을 흘리고 울어본 적이 없다', '자신을 위해 제물을 만들고 먹는 행위'라하던 요리철학(?), 화장실에 가지런히 정돈된 여자 악세서리들, 그리고 '두 달 간격으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던 벤의 말을, 종수는 살인에 대한 '메타포'로 읽고 두려움에 전율한다. 쓸모 없고 지저분해서 무관심에 방치된 비닐하우스를 불태우는 것은 마치 재난을 일으키는 비에 아무런 판단이 없는 것처럼 밸런스를 위한 자연 도덕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는 벤. 그의 권력과 힘은 비가 홍수가 되어 사람을 죽이는 재난처럼 너무나 자연적인 현상의 일부이며, 경찰이란 국가의 관심마저도 사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권력 자체가 법의 일부로 기능하는 폭력을 보여준다. 종수는 넘볼 수도, 가질 수도 없는 폭력 앞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희열을 상상한다. 활활 불타는 화염 앞에 선 어린아이 종수는 뜨거운 재를 맞아 두려우면서도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누군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길 바라던 우물에 갇힌 어린 해미는 어른이 되어서도 '카드 빚갚기전엔 집에 절대 못 들어온다'는 언니의 말처럼 가족조차도 구해주지 않는 삶의 구렁텅이에 빠져있다. 가슴을 쿵쿵 울리는 베이스, 그 재미를 쫓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그 힘이 자연 법칙이라 생각하고 인간을 통제하고 희생하는 폭력의 시행자는 아무런 장애도, 방해도 없이 해미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마음 먹은대로 살 수 있는 벤의 힘을 종수는 두려워하면서도 동경했던 것은 아닐까.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를 그리고 소설을 쓴다며 아르바이트 생활을 반복하고, 단칸방에서 해미의 부재 속에서 그녀를 상상하며 자위를 하고, 보이지 않는 고양이가 있다는 것을 잊은 채 고양이 밥주는 행위만을 반복하는 일상은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귤이 없다고 인정한 후 귤을 먹고 싶어하며 연기하던 해미의 판토마임처럼, 무엇인지 모를 실체를 위해 삶을 희생시키는 생활이나 다름없다. 아버지를 위해 쓴 탄원서는 마을 이장의 말(‘(네)아버지를 잘 모른다, 원래 왕래도 없었고 뭔일을 해도 따로하는 사람이다. 솔직히 정답진 않았지’하고 탄원서 문구를 지적한다)로 부정되고, 해미가 어릴 적 갇혔었다는 마른 우물의 유무를 증거하는 타인의 말은 해미란 인간의 진실성마저도 의심하게 만든다. 종수는 눈앞에 없는 실체를 쫓아 분주히 달린다.
    한꺼풀만 벗기면 실체가 보일듯한 종수를 둘러싼 이야기와 상상된 이미지, 그 단단하고 얇은 막을 우리 역시 벗지 못한다. 벤이 가족들과 갤러리 내 식당에서 식사하는 장면에서 종수는 임옥상 작가의 ‘삼계화택-불’’을 마주한다. 용산참사의 현실은 그 참상을 고발하는 그림을 통해 세상에 나오는데, 우리는 물대포와 죽음의 참혹한 현실을 고급문화의 이미지로 소비해버리고 만다. 실체의 겉면에 단단하고 질기게 들러붙은 이미지와 이야기, 메타포들을 우리는 불태울 수 있을 것인가?
 



   벤은 종수에게 살해된다. 연기처럼 사라지진 않았지만 그는 처참히, 그리고 격렬한 섹스 후 탈진한 표정으로 종수의 손에 죽어간다. 종수의 손에 들려있던 것은 아버지 창고에 걸려있던 칼자루들, 아버지 폭력의 도구가 아니었을까? 그는 또다시 유년기 아버지가 지시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이 판단한 더러운 것을 불태운다. 벤과 함께 수많은 ‘메타포들’도 불에 타 사라졌을까. 얇은 막의 수수께끼와 그 너머의 진실은 아직도 불타지 않은 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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