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라짜로>(2018)
사실적 이미지가 품은 신비. 알리체 로르와커(Alice Rohrwacher) 감독 작품인 <행복한 라짜로>(2018)의 아름다움은 이 신비에 있다. 신비한 기적은 현실을 찢고 돌출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우연들과 만남으로써 현실의 일부가 된다. 현실이 기적을 품은 것이 될 때 낯설고 새로운 현실이 드러난다. <행복한 라짜로>는 우리에게 잔혹한 현실을 바라볼 신비의 시선을 빌려준다.
<행복한 라짜로>의 전반부는 육신의 향락을 버린 어리석은 바보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후반부는 죽음에서 살아난 라짜로를 통해 전혀 다르지만 변한 것이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전반부의 라짜로는 ‘거지 나사로(누가복음 16:19-31)’이다. 시대를 짐작하기 힘든 이탈리아 시골 마을 인비올라타의 라짜로는 궂은일을 주문하는 마을 사람들의 부름에 이끌려 다닌다. 하나의 전구를 갈아 끼워가며 불을 밝히는 초라한 집, 민속 음악으로 구혼하는 남자와 소박한 웃음으로 즐거워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코닥(Kodak) 슈퍼 16mm 필름의 낡고 부식된 화면으로 온기와 향수를 전달한다.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만종(L'Angélus)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Les glaneuses)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목가적 풍경은 19세기 롬바르디아 농민의 힘든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비추던 에르마노 올미(Ermanno Olmi)의 <나막신 나무>(1978)의 거칠고 수수한 화면을 연상시킨다. 척박하고 아름다운 농촌 풍경은 끝없이 라짜로를 부르는 사람들의 이기적 목소리마저 친근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땅의 주인이 등장하면서 사라진다. 인비올라타 공동체는 알폰시나 데 루나 후작 부인(니콜레타 브라스키)의 소작농 집단이었다. 지주의 착취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마을 사람들이 라짜로를 착취하듯(루나 후작의 대사, “난 농부를 착취하고 저들은 저 애(라짜로)를 착취하지”) 지주들은 적은 값을 지불하며 소작농에게 빚을 물리고 인간적 대우를 해주며 필요에 따라 부려먹는다. 고립된 땅의 노예로 사는 이들도 라짜로를 노예로 부린다. 라짜로는 성실하고 순수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응한다. 라짜로에겐 의심이 없다.
마을에 해방을 가져온 사람은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였을 것이다. 다른 세계에서 온 그가 라짜로에게만 보인 것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탄크레디가 데려간 ‘달의 표면’에서 그들은 늑대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고 늑대의 응답을 듣는다. 누구도 본 적은 없지만 두려움의 대상인 늑대의 소리. 라짜로는 탄크레디의 소형 라디오에서 다른 세계의 소리를 듣고, 탄크레디는 라짜로의 세계에서 늑대의 소리를 듣는다. 먼 곳에서 서로를 확인하는 두 사람은 늑대 울음소리를 교환한다. 아버지 세계로 고립된 가비노(사베리오 마르코니)가 다른 세계에서 흘러온 아코디언 소리에 이끌리듯(<빠드레, 빠드로네>(1977)) 다른 세계의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현실 너머의 세계를 불러들인다.
탄크레디의 실종신고를 받은 경찰이 마을에 도착하면서 마을은 해방된다. 탄크레디를 찾다 절벽으로 굴러떨어진 라짜로는 늑대에게 먹히지 않고 되살아난다. 후반부 라짜로는 ‘부활의 나사로(요한복음 11:39-44)’이다. 라짜로가 탄크레디를 찾아 당도한 새로운 세계에 후작부인과 같은 지주는 없다. 그런데도 인비올라타 사람들의 종살이는 여전하다. 안토니아(알바 로르와처)의 가족들은 쓰레기 더미로 만든 집에 살며 사기와 도둑질로 연명한다. 인비올라타 사람들을 착취해 살아가던 마름 니콜라(나탈리노 바라소)는 여전히 이민자들의 노동력을 싼값으로 거래하며 살아간다. 은행에 재산을 몰수당한 탄크레디의 집안 역시 몰락했다. 인비올라타 사람들은 도시의 자유 속에서 주인 없는 종살이를 한다. 빈민이 된 인비올라타 사람들은 오히려 착취를 받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새로운 세계의 착취는 계급을 가리지 않으며 새로운 형태로 사람들의 자유를 앗아간다.
과거에도 그랬듯 라짜로는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한다.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야채를 발견하거나 성당의 성스러운 음악을 가져다주는 라짜로의 도움은 소소하고 작은 기적일 것이다. 늘 누군가의 요청으로 도움을 주던 라짜로는 탄크레디의 옛 물건인 새총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그를 돕고자 은행으로 향한다. 라짜로의 성격에서 벗어난 이 자발적 행동은 예정된 운명의 방향대로 향한다. 그가 인간의 삶에 개입하려 했을 때 맞이한 죽음은 기이한 여정 끝에 당도한 희생자의 순결과 비극을 숭고의 긴장에 닿게 한다.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은 채 고된 노동을 견디며 아무런 계산 없는 맑은 눈으로 인간의 삶을 목격한 당나귀 발타자르의 죽음(<당나귀 발타자르>(1966))처럼, 어른들의 세계를 통과한 후 불가사의한 죽음으로 몸을 던지던 무쉐트의 초상(<무쉐트>(1967))처럼, 라짜로의 무구한 얼굴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평안을 찾았다.
라짜로는 성스러운 음악이 불어온 그의 세계로 떠났다. 죽었던 라짜로를 되살리고 다시 죽음으로 안식을 준 늑대는 그의 죽음을 바라본 후 우리를 떠난다.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무고했던 이를 죽인 이 세계를 말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의 애통한 눈물과 증거된 자의 비참, 순수로만 남을 수 있게 된 라짜로의 행복을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