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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 Nov 17. 2019

마침내 거짓이 된 세계

봉준호 감독론과 <기생충>

  


  <기생충>(2019)의 기우(최우식)는 무계획론을 설파하는 아버지 기택(송강호)에게 ‘죄송하다’고 말한다. 이 부자는 가족들과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박동익 사장(이선균) 집의 하인 되기에 성공해 잠깐 가진 자의 삶을 향유하고 폭우에 휩쓸리듯 제자리로 추락한 후 그 자리마저 잃어 임시로 마련된 체육관에 몸을 뉜 상황이다. 모든 것을 잃은 가장은 이 상황을 실패가 아닌 우연의 결과로 받아들이고자 무계획이란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아들은 돌을 꼭 끌어안은 채 아버지에게 ‘죄송하다. 전부 다. 책임지겠다.’고 읊조린다. 기우는 기택의 무계획에 (동생 기정처럼) 화를 내거나 안도하는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고, 수긍하거나 반박하지도 않은 채 사과를 한다. 실언으로 받아들여진 기우의 사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봉준호 감독은 모순을 통해 진실을 질문한다. 모순은 개인과 집단, 부모와 자식, 주인과 하인, 안과 바깥, 한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허구적 이야기를 거친다. 인물들은 잃어버린 대상을 찾는 장르적 운동에 따라 움직이며 영화는 허구적 대상으로 그려진 구체적인 현실 세계 자체가 허구화되는 위험을 감수한다. <괴물>(2006)의 괴물, <설국열차>(2013)의 열차, <옥자>(2017)의 옥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이미지이지만 힘에 기생한 결과물이거나 힘 그 자체, 무한한 이윤 추구의 결과물로 등장한다. 기만적 시스템의 알레고리적 지시물인 허구적 존재는 삶을 뒤트는 힘으로 현실을 압도함으로써 산 존재보다 더욱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인과적 현실에 균열을 초래하는 허구라는 구멍은 인식의 논리가 도달하지 않는 불가해한 상흔 자체이다. 봉준호 감독의 첫 장편영화 <플란다스의 개>(2000)에서 애완견 납치범이라는 고윤주(이성재)의 진실은 끝내 다른 세계에 닿지 못한 채 실패함으로써 그 자신이 공백을 품은 허구가 된다. 두 번째 장편영화 <살인의 추억>(2003)에서 연쇄살인 사건의 흔적을 쫓던 형사들은 끝내 살인범이 ‘있다’는 징후만 볼 뿐 그 존재에는 닿지 못하는 시대의 무능을 마주한다.

  이 공백은 영화가 시작 지점으로 회귀했을 때, 인물이 구조의 폐쇄에 가로막혀 정지하고서야 사후적으로 드러난다. 창밖을 바라보던 고윤주의 뒷모습은 내부를 ‘외면’하는 시선의 운동(<플란다스의 개>)을, 아이의 얼굴을 마주하는 ‘응시’의 무용함(<살인의 추억>), 재난의 자리로 돌아와 한강을 경계하던 ‘주시’의 불안(<괴물>), 심연 깊은 곳부터 어긋나버린 어머니의 ‘몸짓’(<마더>(2009)), 산골 집에서 외부로 힐긋 고개 돌리는 ‘눈길’(<옥자>), 머리 위 반지하 창문을 ‘등진’ 공허(<기생충>)까지, 인물은 현실의 어느 지점에서 출발해 현실이라 믿기 힘든 사건을 경유하고 신뢰를 잃어버린 현실과 함께 허구가 되어버린 자신으로 회귀함으로써 닫힌 세계를 마주한다. 봉준호 작품의 인물들은 거짓을 돌파할 출구 없는 세계에 남겨진다. 응시와 주시에도 불구하고 가로막힌 진실은 어떤 몸짓을 흔적으로 남길 뿐이다. 봉준호 감독은 언어로 추어올릴 수 없는 영역에 진실이 있다고 주장한다.


  봉준호 감독 영화의 롱 쇼트(long shot)는 텅 빈 영역에 힘을 부여한다. <마더>에서 어머니(김혜자)는 클로즈 업(close up)의 얼굴과 풀 쇼트(full shot)의 극단적 사이즈를 오간다. 클로즈 업이 친숙함 이면에 어른거리는 광기의 에너지를 포착한다면 롱 쇼트는 2.35:1의 화면 비율이 만들어낸 잉여의 여백으로 인물을 작게 압축한다. 어머니가 춤을 추던 갈대밭이나 홀로선 수평의 대지, 커다란 시멘트벽은 인물의 에너지와 의미를 여백으로 가두며 텅 비어버린 시간 자체를 현전시킨다. <살인의 추억>의 기차 터널의 깊고 넓은 암흑은 사건 자체를 집어삼키는 공백으로, <괴물>에서 한강의 깊은 어둠은 작게 불을 밝힌 강두의 매점을 뒤덮을 것 같은 불안으로 의미를 압도한다. 옥자와 함께 우리 밖으로 나가는 <옥자>의 미자 왼편엔 죽음의 집합에 속한 슈퍼돼지들이 있다. 죽음의 압도적인 양과 소수의 생은 불균형한 무게로 한 화면에 담긴다. 미자가 속한 자연이라는 여백은 소비사회로의 통로를 차단하는 바리케이드처럼 미자와 옥자를 보호한다. 인물을 작게 비추는 익스트림 롱 숏(extreme long shot)에서 무의미한 여백은 의미의 영역을 짓누른다.

  롱 쇼트의 텅 빈 영역은 인물과 세계의 긴장, 사선의 운동을 위해 마련된 중간지대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극단적 명암대비와 (왜곡되고 과장된 공간의 표현 방식인) 사선구도를 통해 불안정하고 이질적인 세계를 표현한 것처럼 봉준호 감독 작품에서 사선의 불균형은 낯선 세계로 이행하기 위한 관문으로 등장한다. 산골에서 도시로 구불구불 이어진 <옥자>의 산 중턱 도로처럼 <기생충>의 계단은 상부와 하부의 두 공간을 가로지르기 위한 비스듬한 줄타기, 아슬아슬하게 기어오르다가도 곧장 미끄러져 추락해버리는 사선의 운동을 위해 놓여있다. 롱 쇼트는 사선의 운동으로 이어질 공간적 관계에 객관적 시점을 유지한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하녀>(1960), <충녀>(1972), <육식동물>(1985)) 속 계단이 상승의 도구이자 추락의 장소로 등장하는 것처럼 <기생충>의 계단 역시 인물을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행시키기 위해 놓인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감정의 동요 없이 관조하는 시선으로 추락을 비춘다. ‘남궁현자의 작품’으로 소개된 <기생충>의 저택은 계단들, 주로 어른들의 공간인 1층과 아이들 공간인 2층, 생활공간과 지하로 분할된 공간 사이에 몸을 숨기며 엿듣거나 도망가는 인물의 운동에 의해 분할되고 통합되길 반복하는 공간의 복잡한 운동을 중심에 놓으며 인물을 돌연 솟아오르도록 하는 극적 순간을 연출하기도 한다. 계단의 사선 운동은 저택의 외부에서도 이어진다. 프레임을 가로지르는 사선은 익스트림 롱 쇼트로 비치는 공간의 거대함과 틸트 다운(tilt down)으로 강조되는 추락의 운동으로 완성된다. 기택과 남매는 폭우에 휩쓸려 성북동 비탈길 북쪽에서 남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달리며, 계단과 다리, 터널을 따라 물에 잠긴 동네와 반지하 집에 다다른다. 롱 쇼트의 여백은 인물의 운동을 예비함과 동시에 인물을 프레임 바깥으로 밀어낸다.


  현실에 숨은 진실은 하나의 무,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의미의 담지체가 이끄는 이야기로 펼쳐진다. 인물들은 이 대상물이 이끄는 거짓 여정을 충실히 뒤따른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여성 희생자들은 어둡고 음산한 굴에 갇힌다. 각각 두만과 강두를 연기한 송강호 배우는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연쇄살인범과 괴물을 찾기 위해 그 흔적을 쫓는다. 주인공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연쇄살인범과 괴물이고 인물 찾기를 중지하고 방해하는 것은 다른 세계 즉, 서울 또는 미국에서 온 인물들, 위로부터 조직된 군중 또는 관료적 집단들이다. 동기를 부여하던 대상이 사라질 때 이들의 운동은 정지하며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에 의해 이야기는 카메라 바깥으로 확장된다. 보는 이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놓고 돌연 사라져버리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맥거핀(macguffin, <해외 특파원>(1940)의 암호, <오명>(1946)의 와인병,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의 캐플런, <사이코>(1960)의 돈다발 등)처럼 말이다. <마더>와 <플란다스의 개>는 인물로 내파(implosion)됨으로써 확장되는 거짓의 운동을 보여준다. <마더>에서 진실을 구하는 어머니의 범인 찾기는 아들 도진(원빈)이 살인범이라는 진실(살인사건 목격자인 고물상 노인)에 도달한다. 이 어머니는 거짓되길 자처함으로써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가족조차 없는 종팔(김홍집)에게 진실을 뒤집어씌우고 아들과 동반 자살하려 했던 과거의 진실을 망각하고자 침을 놓는다. <플란다스의 개>의 고윤주 역시 스스로 거짓이 된다. 애완견을 죽인 진실의 대가는 우연히 진실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던 지하실 노숙인 최씨(김뢰하)에게 대속된다. 개를 죽인 가해자‘강사’ 고윤주의 진실은 개를 잃어버린 피해자란 ‘교수’ 고윤주의 정상 서사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내면의 거짓에 고립된다.

  <설국열차>와 <옥자>, <기생충>에 와서 거짓은 현실에 내재한 속성으로 확장되면서 세계 자체를 거대한 공백으로 만든다. <설국열차>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계급의 최상층부인 윌포드(에드 해리스)의 칸으로 진입하면서 커다란 거짓을 마주한다. 혁명이 인구조절이란 시스템 선순환적 운동의 일부였고 커티스 자신이 구원자가 되어야 한다는 운명 말이다. 커티스는 시스템 심장부에서 엔진의 부품이 된 아이를 마주하고서야 거짓 문제에서 깨어난다. 커티스는 요나(고아성)에게 성냥을 건네줌으로써 시스템을 유지하는 윌포드의 진실이 아닌 남궁민수(송강호)의 환상을 선택한다. 거짓을 통해 확인된 진실은 참/거짓의 세계를 포기하고 바깥의 삶의 가능성으로 길을 튼다. 생존자 아이들이 마주한 외부 생명체 북극곰은 공포와 죽음의 의미로 외부를 차단한 열차의 세계가 거짓임을 확인시킨다. <옥자>의 미자는 숨은 진실 속에서 옥자와 단 한 마리의 새끼돼지를 구한다. 끝없이 생산되고 고기로 소비될 슈퍼돼지와 무한한 이익을 취하려는 독점 대기업 시스템은 온전히 남는다. 진실 바깥의 거짓, 거짓으로 포장된 진실을 그리는 봉준호 작품의 세계는 내적 모순과 커다란 공백을 내재한 영화 바깥의 세계인 자본주의의 현실로 연장된다.



  <기생충>은 거짓과 환상의 완전한 승리를 보여줌으로써 가로막힌 세대의 암울한 조건을 비춘다. 주인공 기택 가족이 사는 ‘반지하 집’은 세계의 공백을 지시했던 어둡고 캄캄한 지하세계(<플란다스의 개>의 아파트 지하(인), <살인의 추억>의 현실 곳곳에 숨어있던 시커먼 굴, <괴물>의 지하 은신처, <마더>의 동굴 같던 약재상, <설국열차>의 지하 엔진실, <옥자>의 슈퍼돼지 수용소, <기생충>의 지하 벙커)와 정상 세계의 경계에 위치한다. 공간은 가족의 계급 정체성을 규정한다. <기생충>의 기택은 <괴물>의 강두보다 조금 현명해진 듯 보이지만 열심히 살아도 가족에게 누를 끼친다는 점에서 여전히 무능한 가장이다. 창업한 대만 카스텔라 가게가 망하면서 반지하 집에 오게 된 기택은 짧은 대사에서 치킨 가게에 대리주차, 대리운전 등 다양한 일을 전전했음을 알 수 있다. 방역차 소독가스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기택만이 짐짓 비장한 포스로 피자 상자를 부지런히 접지만 결과는 죄다 불량이다. 불량 상자를 질책하던 피자시대 사장(정이서)과 언쟁이 벌어지고 남매 기우와 기정(박소담)이 발 빠르게 대처한다. 부모는 사고를 치고 자식은 뒷수습 한다. 노상 방뇨, 방역차 연기, 폭우의 물까지 접하고 싶지 않은 모든 힘에 무방비로 노출된 위치, 그렇지만 완전한 나락으로 주저앉지 않은 반지하라는 어정쩡한 위치에 선 사람이 세우는 계획이란 힘을 견디고 버텨내는 생존 가운데 눈앞의 기회를 잡는 것뿐이다. 부지런한 가족에겐 계획할 여유가 없다.

  기택의 가족을 아래에서 위로, 반지하에서 지상 위의 세계로 이끈 것은 ‘산수경석’이란 이름의 돌(이하 수석)이다. ‘가정에 많은 행운과 재물운을 가져온다’는 성격까지 부여된 이 의미심장한 수석은 민혁(박서준)을 기우와 만나게 하고 기택네 가족을 저택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 맥거핀이다. 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이 돌을 수석으로, 어떤 ‘상징’으로 바라보는 가족들로 인해 수석은 맥거핀이 된다. 수석이 ‘행운과 재물운’의 상징이었던 것처럼 기우는 박 사장의 운전기사가 되려는 기택에게 밥을 먹는 기사식당조차도 상징적이라고 해석한다. 기우는 다송(정현준)의 그림을 보며 ‘상징적이다’라고 말하지만, 상징에 사로잡힌 기우의 눈에 다송의 자화상은 기회(기정의 일자리)로만 해석된다.

  기우의 오인은 보이지 않는 ‘선’을 넘도록 이끈다. 이 선은 상/하로 나뉜 계급적 구분뿐 아니라 빛과 어둠,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다. 박 사장에 의해 언급된 이 선은 <설국열차>에서 시스템의 존속을 위한 각 칸 사람들의 ‘자리 지키기’와 동일한 의미이다. 하인 또는 노예는 주인이 만들어놓은 선 또는 자리를 지켜야 하지만 기택의 존재감은 특정할 수 없는 냄새와 사랑이라는 말로 종종 선을 넘으며 박 사장의 심기를 건드린다.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성립하려면 하인은 주인을 돕는 자신을 숨겨야만 자리를 보장받는다. 선을 넘는다는 것은 주인의 의존적 상태와 무능을 확인시키는 일이다. 하인은 자신의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주인이 만들어놓은 선 아래로,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어둠의 유령이 되어 존재를 감춰야만 한다. 기택의 ‘사랑’이라는 말이 박 사장의 불쾌를 유발하는 것은 주인을 하인과 동등한 인간, 아내 눈치를 보며 생활하는 한낱 가장 정도로 주인의 위치를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사랑 운운하는 기택에게 박 사장은 ‘일의 연장’임을 강조하며 주인의 위치로 기택을 누른다. 폭발할 듯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하인에게 말이다.

  계급을 구분하는 선은 비슷한 처지의 두 가족이 만났을 때도 반복된다. 문광(이정은)의 등장으로 지하 벙커 속 근세(박명훈)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 충숙은 문광과 동등한 위치임을 부인한다(“불우이웃끼리 이러지 말자 언니야”/“난 불우이웃 아니야”). 계단에서 엿듣고 있던 기택 가족이 우르르 쓰러져 정체가 탄로 나 상황이 역전되자 이번엔 문광이 충숙을 거절한다(“저기 동생...”/“동생은 얼어 죽을”). 두 부부는 서로가 같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조선중앙TV 앵커 흉내를 내는 문광에게 종북 개그라며 즐거워해 주거나 홍수로 물에 잠긴 집안에서 충숙의 선수 메달을 소중한 보물로 챙기는 허울뿐인 가장들의 모습이, 대만 카스텔라 가게가 망하면서 큰 빚을 진 가정사가, 서울의 주변부인 경기도1)에서 흘러들어온 부부의 개인사까지 두 부부는 닮아있다. 울퉁불퉁한 시멘트 길과 벽, 다닥다닥 붙은 다세대주택, 전깃줄이 그물처럼 허공을 가득 메운 기택네 동네는 산업화의 흐름에 따라 한때 번창했고 현재는 재개발과 도시 정비의 흐름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인 지역들, 한때 도시를 이끌던 개발의 주변부였지만 현재는 낙후된 거주지들을 상기시킨다. 두 지하 가족은 서로를 거울 이미지로 반사한다.

  수석이 이끈 것은 동일한 역사의 서로 다른 두 얼굴, 도플갱어(Doppelgänger)는 아니었을까? 수석은 먹고 먹이는 관계로 이어 붙여진 복제들, 흉내 내기의 달인들, 진짜를 연기하고 모사하는 가족들을 숨은 진짜 얼굴과 대면시킨다. 유령 또는 그림자로 나타나 이상한 불안을 불러일으키던 근세는 기택의 이중 자아로 가족 앞에 마주한다. 이 만남은 기택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리 당도한 죽음인 미래로 확장되는 기이한 시간과의 마주침이다. 기택은 최종적으로 근세의 자리를 택하며 동일한 운명을 반복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봉준호 감독의 단편<흔들리는 도쿄>(<도쿄!>(2008))에서 지진이라는 사건이 히키코모리(카가와 테루유키)를 어둠 밖으로 밀어내고 자신과 동일한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린 피자 배달부(아오이 유우)를 만나게 했던 것처럼 수석이 이끈 사건은 동일한 얼굴이 내재한 이질적 타자성을 마주하게 한 후 기우와 가족들을 죽음으로, 어둠으로 이끈다.

수석을 인물과 닮은 분신, 복제를 만나도록 이끈 공백으로 볼 때 기우가 아버지에게 건넨 사과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수석은 상징에 매혹된 기우에 빌붙어 끊임없이 친구 민혁을 환기시켰을 것이다. 집 앞 노상 방뇨하는 행인에게 호통치던 민혁을 따라 하듯 기우는 다혜에게 저돌적으로 스킨십하며 ‘기세’를 강조하거나 노상 방뇨하려는 행인을 향해 물을 뿌려댄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기우는 ‘이럴 때 민혁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해보거나 ‘다혜야 나 여기 잘 어울려?’하고 질문한다. 기우는 자신만의 계획을 가진 친구 민혁이 되려 했다.

  기우가 아버지에게 건넨 사과는 민혁을 모방한 데 대한 사과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민혁의 그 기세까지 완전히 모방하지 못해 요지경이 된, 원본인 민혁 ‘되기’에 미치지 못한 자신을 탓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음날 기우는 수석을 들고 저택 지하로 내려간다. 민혁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나 수석은 기우를 내려쳐 찍어 눌러 끊어냄으로써 상징의 세계관과 착각을 부정한다. 숙주를 죽이고 어둠에서 빠져나온 수석은 자연의 빛에 놓이고 인간을 무한한 침묵에 가둔다. 민혁의 거짓 분신은 민혁을 흉내 내던 거짓을 죽이고 거짓에 승리를 고한다.


  <기생충>의 엔딩시퀀스는 이야기의 주인이 거짓이고 거짓이 진실임을 선언한다. 기우의 1인칭 독백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깜박이는 저택 전등을 기택의 모스 부호로 읽은 후 아버지 1인칭 시점의 독백으로 바뀐다. 구조 신호가 아버지 목소리로 진술되는 편지로 확장되고 이 메시지는 다시 기우가 해독한 모스 부호로 괄호 쳐진다. 반지하 집으로 달려간 기우는 돈을 벌어 저택을 산 후 아버지와 재회하겠다는 편지를 완성한다. 모스 부호로 완성된 이 편지는 다시 기우의 계획으로 괄호 쳐진다. 현실의 한숨은 이 낙관적 전망을 밀어내며 가변적 시점변화의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는다. 카메라는 시점의 주인이 바뀌는 나래이션과 상관없이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는 객관적 시점을 유지하며 상상과 현실, 주관과 객관을 효과 없이 동일하게 비춘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주관과 객관이 혼종된 시간 속에서 옳고 그름, 실제와 환상을 가늠할 기준은 없다. 지하의 신호는 아버지가 보낸 신호인가? 아버지는 현실에 존재하는가? 신호와 아버지는 상징만을 보는 기우의 망상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엔딩시퀀스는 균열을 봉합하는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균열을 만들어낸다. 질문의 끝은 이것이다. 이 이야기는 살아있는 기우의 이야기인가 죽은 기우의 이야기인가. 반지하 집 기우에서 출발해 기우로 끝나는 전체 이야기는 한 젊은이의 전망도 비전도 없이 영원히 순환하는 운명 자체가 된다.      

  주인의 시간을 여러 갈래로 흩뜨려놓은 이야기는 이야기 자신이 주인이 되려 한다. 이 이야기는 머리를 다쳐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 불운한 젊은이의 망상일 수도,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젊은이가 되짚는 회상일수도(<이중배상>(1944), <D.O.A.>(1949)의 플래시백), 산자의 시간을 더듬어보는 죽은 자의 독백일수도(<선셋대로>(1950)), 상징의 세계로부터 탈출하려던 수석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수석이 주인을 부정하듯 이야기는 주인에게서 빠져나간다. 수석이 기우의 환영(재물운과 민혁의 상징)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화자의 시간, 언술의 참과 거짓, 객관과 주관의 경계를 부정함으로써 거짓이 주인임을 주장한다. 이야기의 바깥으로 밀려난 인물은 집단과 질서를 벗어난 타자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관조하는 구경꾼이 된다.

어떠한 참조물도 없이 이야기의 흔적만을 남긴 <기생충>의 이야기는 현실원칙으로 조직된 유기적 연결고리를 단절시키면서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흘러가 버린 이야기를 완성한다. 그런데 ‘흐른다’는 것은 영화란 매체가 태생부터 포착했던 본연의 운동 아닐까?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1895), <열차의 도착>(1895)이 인간의 눈이 포착할 수 없는 지속하는 운동을 포착함으로써 현실과 재현된 이미지 사이, 과거가 흘러가면서 현재가 되는 동시에 미래가 당도하는 흐름 자체를 카메라에 담았던 것처럼, 조르주 멜리어스가 <달나라 여행>(1902)에서 쪼개어진 시간을 연결함으로써 현실에서 환상으로,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이행하는 영화적 운동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봉준호 감독은 진술된 의미를 부정함으로써 다른 의미가 되어가는, 그렇지만 흔적도 없이 흘러가 버린 동시에 도달한 익숙하고도 낯선 영화적 세계를 비춘다.

  현실은 허구적 참을 부정하는 거짓 자체가 된다. 전작의 인물들이 거짓을 따라 거짓이 된 현실, 현실의 커다란 구멍으로 자리한 거짓 세계를 목격하거나 스스로 거짓이 되었다면, <기생충>은 허구적 참의 세계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이야기가 인물을 밀어냄으로써 허위와 거짓 자체가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진실이라고 결론짓는다. 기우가 가로막힌 세계는 참과 진리, 주인과 정상에 의해 계열화되지 않는 거짓의 현재들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세계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준 것은 계급의식도, 삶의 지혜도 아닌 참과 거짓을 판별하기 힘든 모호한 꿈이다. 아들의 꿈과 삶의 목표를 대체한 아버지는 환영과 불투명한 전망 속에서 확신하기 힘든 신호로만 존재한다. 전망도 실천도 없이 손 놓아버린, 이전 세대가 해결하지 못해 그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악몽이 된 현실이 아들이 마주한 세계다. 봉준호 감독은 아버지 서사에 기대어 자신의 삶을 연명할 수밖에 없는, 부모 피를 빨아먹고 살 수밖에 없는 청년 세대2)의 암울한 조건, 낙관적 전망으로 자신을 위안하고 관리하며 아버지 운명을 반복하게 될 폐쇄적 순환을 비춘다. 우리는 거짓보다 더 거짓 같은 참인 현실을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빈곤을 드러내면서 현실과 합의하지 않는, 현실 자체가 초현실적인 세계로 확장된 거짓 세계를 마주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속 거짓은 자신이 떠난 침묵 이후의 세계, 영화 바깥에서 도래할 세계를 기다린다. <끝>



1) 충숙의 메달에서 ‘성남시’, 지하 벽에 붙여진 문광과 근세의 등본에서 각각 ‘광명시’와 ‘부천시’에서 살다 ‘대림동’, ‘창신동’으로 넘어온 흔적을 읽을 수 있다.

2) 엄기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푸른 숲,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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