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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깅이 Apr 15. 2023

7일차 - 카레짜 호수

여행이 무서운 아이의 이태리 여행기 (8)

일어나서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라면 먹고 자서 부은 얼굴인지, 피곤해서 부은 얼굴인지, 아니면 살찐 얼굴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가 평소에 거울에서 보던 아이와 다른 아이를 마주했다.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마냥 걸을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한발씩 떼어 보았다. 평지는 아프지만 걸을 수 있고, 내리막은 많이 아프지만 걸을 수 있고, 계단은... 음...아아아...악~~  머 그런 정도의 상태였다.


피렌체 외곽의 오래되었지만 넓고 사람 냄새 나는 숙소의 소소한 조식을 먹으러 나섰다. 키 크고 호탕한, 발성으로 친절을 완성한 주인 아주머니가 프라이팬에 바로 스크램블에그랑 베이컨을 만들어 주셨고, 아메리카노를 불쌍하게 부탁한 친구에게 "니 마음 안다" 는 듯한 따뜻한 얼굴로 "아메리칸 커피" 를 두잔이나 끓여주셨다. (오르비에토의 커피 부심 가득하던 카페 사장이 째려보면서 발음하던 "아.메.리.칸.커.피" 와는 다른 부드러운 발음이었다.)


훌륭한 조식을 마치고, 숙소를 나섰다. 오늘의 행선지는 돌로미티. 돌로미티는 4월인 지금은 스키장도 닫고, 케이블카도 닫고, 온 동네가 휴가를 떠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계절이다. 5월은 되어야 케이블카들이 관광을 위해 운행을 재개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돌로미티 사진들에 감격한 우리는, 그냥 그 근처에 가서 숨이라도 쉬고 오고 싶었다.


목적지는 돌로미티 초입에 있는 카레짜 호수. 숙소에서 4시간 30분 정도 가면 된다. 처음 동네를 빠져나오는 게 순탄치 않았다. 아무래도 숙소로 들어올 때 길을 한번 잘못 들어서 시내 쪽으로 진입한 경험을 한터라, 길을 잘못 드는 것에 굉장히 민감해진 상태라서, 나갈 수 있는 다섯개의 길 중에 2번과 3번과 4번을 헷갈리며 두어차례 길을 잘못 들게 되자 차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 찼고, 우여곡절 끝에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첫번째 휴게소 도착. GRILL 이라는 마크를 본 것 같은데, 카페테리아식의 음식들이 매우 다양하고 훌륭해 보였다. 조식 먹은지 얼마 안 되어 식사는 건너뛰고, 커피 한잔 마시고 다시 출발.


두번째 휴게소 도착. 여기는 아무래도 북쪽으로 많이 올라온 상태라서인지 상대적으로 작은 사이즈의 휴게소였다. 약간 아쉽긴 했지만, 예전에 밀라노, 토리노 방송사 출장갔을 때 구내 식당에서 자주 먹었던 추억 돋는 라자냐를 한접시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계산할 때 30 cent 길래 동전을 야무지게 처리하려고 주섬주섬 맞춰서 드렸더니, 아저씨가 몹시 당황해하며 '유 게이브 미 제로쓰리, 디스 이즈 쓰리제로' 라고 하셔서 뒤늦게 내가 드린게 3센트라는 걸 알게 되어 엄청 민망했다 ㅠㅠ


이 곳 에서는 기름을 넣어야 하는 미션이 있었다. 친구는 자못 비장한 상태였다. 눈앞에는 알 수 없는 알파벳으로 가득한 커다란 주유소가 있고, 기름을 지금 넣지 않으면 목적지까지 갈 수 없는 상태였다. 주변을 스캔해서 가장 친절할 것 같은 아저씨 한명을 발견, 노련하게 "Excuse me" 하고 다가서는 친구의 뒷모습에는 자못 비장감마저 내비쳐졌다. ("니가 친절하지 않으면 난 니가 친절할 때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같은 느낌이었달까) 다행히 아저씨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친절했고, "너 차 정말 개솔린 맞아?" 라고 물었을 때 친구가 살짝 버버버 하자, "내가 확인해 줄게" 하면서 차로 같이 가서 보고 확인해 주기까지 했다.


오래 전 출장다니던 시절에 내가 기억하는 이태리 사람들은 잘 웃고 친절했었다. 난 그 때 내가 어리고 귀여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이 먹고 귀엽지 않은 나이에 여행와서 보니, 그냥 이태리 사람들이 친절한 것 같다. 역사적인 유적지에서 오래된 예술품을 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지만, 그것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주차비 정산할 줄 몰라서 쩔쩔맬 때 도와주던 사람들, 얼굴과 발성으로 친절을 완성한 호텔, 숙소 사람들, 운전할 때 끼어들 수 있게 기다려주던 사람들, 주유소에서 어버버하고 있을 때 도와주던 사람들... 인 것 같다.


기름을 성공적으로 넣고 하나의 미션이 Clear 된 후, 마지막 남은 고비는 톨비를 내는 것이었다. 토스카나에서 톨비를 낼 때, 사람이 지폐를 받아주는 톨이 닫혀 있었고, Self 로 톨비를 낼 때는 동전만 가능한 걸 확인한터라, 카드로 내는 곳을 잘 찾아서 톨비를 내야 했다. 식당이나 호텔에서는 카드 사용에 문제가 없었지만, 주차장에서 주차비낼 때 카드가 작동하지 않았던 적이 한번 있었기 때문에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더랬다. 하다가 안 되면, 내려서 뒷차에 가서 제가 현금 드릴테니, 카드로 좀 긁어주세요... 라고 불쌍하게 말하는 상상도 하면서 하여간 톨게이트에 다다랐다. 이태리 톨은 하얀 바탕에 Cash 그림이 있고, 거기에 사람 손이 같이 있으면 사람이 지폐도 받아주는 곳이다. 그 곳을 발견하고, 내 친구는 여행 후 처음 보는 찐행복의 미소가 얼굴 가득 피어올랐고, 그렇게 우리의 고속도로 여정이 무사히 끝났다.


북쪽으로 이동하며 시시각각 변하던 경치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카레짜 호수로 가는 중에 경찰 두명이 우리를 막아섰다. 엄청 귀엽게 생겨서 그나마 공포가 좀 줄긴 했지만, 한명은 총까지 들고 있었다. 면허증, 여권 등을 가져가서 몇 분이나 한참 뭔가 조사하더니 가라고 했다. 조금 무서운 기억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동안 일부러 말도 걸어주고 (취조라기 보다는 그냥 쫄지 말라고 말 걸어주는 느낌), 노말 폴리스 활동이라고 강조도 해 주고 그래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목적지에 다가오면서 주변은 온통 눈밭으로 변했다. 카레짜 호수는 작고 아담한 사이즈였고, 눈이 많이 덮여서 그나마도 많이 가렸지만, 충분히 탄성이 나올 정도로 좋았고, 호수 뒷산은 절경이었다. 산책길은 눈이 많이 덮여 있어서 걸어다니기는 좀 어려웠지만, 큰 기대 없이 와서 그런지 "이 정도도 좋고 행복해" 라는 느낌이 충분히 들었다. "나 여기 있어" 라고 자랑하기게 너무 좋은 사진이라 얼른 조카에게 사진을 보냈는데, 카톡이 읽음으로 변하지 않아서 많이 슬펐다.


현실감이 없는 카레짜 호수


카레짜 호수 근처의 숙소 주변 동네는 최근에 생긴 동네인지 건물이 모두 새로 지은듯 깨끗했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듯, 간판은 모두 독일어였다. 마을의 정취도 이제껏 본 이태리와는 다르게, 사진으로 보던 스위스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마을 곳곳에 있는 초등학생들이 그린 것 같은 표지판도 정겹고 예뻤고, 하늘과 가까워진 느낌이 풍요로웠다. 마치 독일에 온 것 같아서, 마트에서 소세지랑 맥주를 사서 독일식 야식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예쁜 동네


원래는 내일은 조금 더 위쪽에 있는 오르티세이로 가서 "예쁠 때 오면 예쁘겠지" 를 좀 더 즐길 생각이었는데, 이미 이 곳에서 충분히 본 것 같고, 돌아오는 날 베니스 본섬을 왔다갔다 하는 건 시간이 너무 촉박할 것 같아서, 전격적으로 다음날 베니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예약도 하나도 안 하고 그냥 가는 건데, 부디 관광객 많지 않고, 오래 기다리지 말고, 사고 없이... 무엇보다... 제발 맛있는 스파게티 한접시만 먹으면 좋겠다. ㅎㅎ


내일 베니스에서 놀고, 다음날 일찍 공항으로 가서, 아마도 마지막 여행기를 쓰면 끝날 것 같다. 약간 서운한 기분도 드는 듯. 아무튼, 돌로미티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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