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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스피노자의 "기쁨의 윤리학"

윤리학 전공자라면 이미 익숙하지만, 현대 윤리학은 크게 세 범주로 나뉩니다. 첫째, 임마누엘 칸트가 중심이 된 "의무론 윤리학(deontology ethics)가 있습니다. 둘째, 존 스튜어트 밀이 중심이 된 "공리주의 윤리학(utilitarian ethics)가 있습니다. 셋째,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심이 된 "덕 윤리학(virtue ethics)"가 있습니다. 사실상 현대 윤리학에는 이 세 범주 외에는 별도의 윤리학이 없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윤리학들은 상대방을 비판하며 성장해 왔고, 이제 학계에서는 이 외에 다른 윤리학 범주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사실상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윤리학들은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그 핵심은 동일합니다. 바로 "목적론(teleology)"이죠.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비롯된 목적론은 이미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며, 다양하고 양립할 수 없는 변종들이 잔뜩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적론이요? 누구의 목적론이요?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칸트?" 이렇게 묻게 되지요. 그렇다면 제가 윤리학의 관점에서 말하는 "목적론"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바로 "현재의 나는 충분하지 않다(I am not enough NOW)"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스피노자가 지적했듯이, 모든 편견의 어머니이자 원천입니다. 그리고 그의 언어는 비논리적이면서도 매우 교묘해서, 우리들을 속여넘깁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목적론적 언어(teleological language)가 워낙 우리들에게 익숙해서, 우리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의식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목적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가능태(potentiality)입니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만약 내가 "현재" 가능태라면, 나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미완성품이며, 결과적으로 현재에는 not enough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는 완벽한 덕(perfect virtue)을 갖추기 위해 불굴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완벽한 덕은 최종 원인(final cause)이자 목적(telos)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미래에 달성될 수 있는 완벽한 덕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아무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거든요. 제시카 헤이지(Jessica Hagy)가 잘 요약했듯이, 완벽은 거짓말이며, 예를 들 수도 없는 것이며, 달성이 불가능한 목표입니다(Perfection is a lie. It’s an idea without an example, an unreachable goal.)

https://www.forbes.com/sites/jessicahagy/2016/10/20/imperfect-is-everything/?sh=2481cd5d5eaa

하지만 칸트와 밀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완벽한 이상형을 상정한 뒤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며 우리를 등떠밉니다. 그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충분하다는 "진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칸트 철학이 "의무론"으로 불리지만, 공리주의 윤리학이나 덕 윤리학에서도 의무들은 차고 넘칩니다. 더 나아가서, 공자와 맹자의 유학을 칸트와 아리스토텔레스로 망쳐놓은 2차 연구들이 압도적 주류를 형성함에 따라, 이제 제가 사랑하는 유학 또한 영원히 "꼰대 철학"으로 자리잡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윤리학"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니, 칸트와 밀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아닌 다른 어떤 윤리학을 새로 만들어내어야 할까요? 놀랍게도, 우리는 윤리학을 새로 만들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모든 인간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 영원히 완전하고 충분하다"고 증명해낸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있으니까요. 심지어 스피노자의 대표 저작 이름이 바로 <윤리학 Ethics>입니다. 그리고 잘 훈련된 철학이자 대학 교수인 앤드류 유파(Andrew Youpa)는 전문 용어를 사용해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다름 아닌 "기쁨의 윤리학(the ethics of joy)"라고 설명합니다.  

철학이나 윤리학 분야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책이 지니고 있는 파괴력을 실감할 수 없습니다. 흔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행복 윤리학"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이미 워낙 많은 목적론자들이 이 "행복"이라는 단어를 타락시켰기에, 이제 우리는 학문적으로 행복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군들 "행복"이라는 단어를 싫어하겠습니까?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덕 윤리학에서 행복은 지금 당장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최고의 행복"을 느끼기에는 아직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완벽한 행복은 미래 어디쯤에 있다고 여겨지는데, 그런 주장을 하는 어떤 학자들도 구체적으로 그 "완벽한 행복"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냥 학자들의 말장난이지요.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마치 전문가인 것마냥 늘어놓는 것.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온건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공격할 때에는 누구보다도 매섭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궁금증이 남습니다. "아니, 이미 우리의 존재가 있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해버리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 남습니까? 그냥 가만히 숨만 쉬고 있다가 죽어 버리면 됩니까?" 이것이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목적론자들이 걱정했던 바이지요. "지금의 나는 부족하니, 무엇인가를 자꾸 해서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should, must, ought to)"라는 잘못된 사고방식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비윤리적 백수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맹자가 강조했던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그는 죽는 순간까지 부지런히 저술에 몰두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현재 완전하다면(We are enough NOW), 이제 우리는 무슨 동기로 삶을 살아갈까요? 바로 "기쁨(JOY)"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주장했고, 앤드류 유파가 짚어내었던 스피노자 윤리학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제 내가 진정 하고 싶어서, 내가 즐거우니까 합니다. 내가 불완전하니까 더 완전해지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기쁘고 즐거워서 그냥 합니다. 이제 "행복"이라는 단어조차 불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타락해서, 더 이상 제게 감정적인 울림을 주지 못하거든요. 기쁨은 그나마 아직까지 칸트주의자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건드리지 않는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도 씹선비들이기에, 기쁨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추상적인 "행복"만 읊조렸을 따름이지요. 칸트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의깊게 읽어본 어느 독자라도, 그 철학 안에는 joy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joyless한 이론들이지요.


공자는 <논어> 첫머리에서 "내가 진정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항상 익히니, 기쁘지(joy)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말했습니다. 기쁨(joy)이라는 관점에서 <논어>와 <맹자>를 읽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아니, 올바른 독법을 통한 올바른 이해가 열립니다. 제가 기쁨이라고 말했을 때, 공자가 미친 사람처럼 하루종일 쪼개고 다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누구나 삶에는 굴곡이 있고 힘든 시기가 많지요. 공자는 몇 번씩이나 살해 위협을 당했으며, 그의 정치적 소망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자연 속에 짱박혀 사는 은자들에게조차 조롱당하기 일쑤였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근본적으로 기쁨으로 살았으며, 기쁨으로 행위하고 타인과 기쁨을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맹자는 이를 제대로 파악해서 "여민동락(與民同樂)"으로 정리했지요. 이제 우리는 공자와 맹자, 그리고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다름 아닌 "기쁨의 윤리학"이며, 오늘날 사범대학에서는 전혀 접할 수 없는 새로운, 그러나 사실은 오래된 미래(old future)임을 이해했습니다. 이제 이 기쁨의 철학, 기쁨의 윤리학은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 개념과 이어져서, 이 윤리학의 가치를 진정 이해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철학 전문 서적은 아니지만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훨씬 접근하기 쉬운 책인 <조이>를 소개하며,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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