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2019년 밴쿠버에 다녀온 경험을 작성한 글입니다)
짙은 먼지가 풀어낸 잿빛 하늘은 물러설 기미가 없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처럼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고 느꼈다.
지쳐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늘 자정을 넘겼다. 주말에도 간혹 불려 나와 일을 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보다 어떻게 활용될지 모르는 보고서를 꾸미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이게 정상인 양 지난 3년을 일정하게 버텼다.
어느덧 회사를 옮긴 지 3년이 됐다. 이전 직장 경력까지 하면 벌써 10년을 회사에 묶여 살았다. 바쁜 생활에서도 요령 있게 연애를 했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출산했다. 무슨 용기가 있었는지 2년 동안은 경영학 석사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상의 무게는 바뀌지 않았다.
신입사원 때 기획부서에 배치됐다. 직장을 세번이나 바꿨지만 하는 일은 계속 전략 아니면 기획이다. 미래를 그리고 전략을 수립하는 일은 늘 두꺼운 벽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벽에 균열을 낼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벽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자리다. 손쉽게 끝나는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내의 조바심도 덩달아 커졌다. 아내는 삶이 버거울 때마다 늘 푸념하듯 캐나다 밴쿠버 이야기를 풀어놓곤 했다. 이십 대 초반 밴쿠버에서 3년을 지낸 아내는 그때를 항상 그리워했다. 아름다운 자연, 사람과 가족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 개인 시간 존중, 여유가 넘치는 생활양식, 아내의 기억 속 밴쿠버는 늘 이런 모습이었다.
유난히 뿌옇던 4월 어느 날,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용기를 냈다. 2주 하고도 3일을 더해 17일 휴가를 신청한 것이다. 누군가는 뭔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유난 떠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회사에 충실하게 순응하며 살아온 나에게는 결코 작지 않은 도전이었다. 여름휴가 5일도 눈치를 보며 쪼개 쓰기 일쑤였는데 무려 12일을 덧붙여 긴 여행을 무작정 선포해버렸다.
사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라도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떨어져 있고 싶었다. 아내는 밴쿠버를 고집했다. 내가 꼭 캐나다 생활 방식과 문화를 직접 체험해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여행지를 찾아 헤매느라 쓸데없이 힘을 쓸 생각은 없었다. 망설이지 않고 휴대폰을 열어 자주 이용하는 여행 앱에서 밴쿠버행 티켓을 끊었다. 3개월 뒤 7월 9일 출발이다.
아내는 숙소며 레스토랑이며 꼭 가봐야 하는 장소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행복한 표정은 최근 몇 년간 보지 못했다. 아내는 들떠 있었지만 나는 아직 낯섦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보다 의미 있는 시간이길 바랬기 때문이다.
쉽게 얻을 수 없는 기회다. 누군가는 여행에서 인생을 배웠다 하고,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하고, 심지어 돈을 벌기도 했다 한다. 여행을 다녀온 뒤 난 어떨게 달라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이러다간 여행마저 비참해지겠군, 머리를 비우고 온전히 나 답게 즐기다 오자’ 마음을 고쳐 먹었다. ‘여행은 오로지 현재를 살게 한다’, ‘여행할 힘을 얻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김영하 작가의 말은 큰 위안이 되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벌레로 변해있다. 한 가정의 가장 역할을 하며 충실하게 생활비를 벌어오던 그레고르는 가족들로부터 끝내 버림받는다.
카프카는 산업혁명 시대에 물질적 가치만을 좇던 세태를 <변신>을 통해 비판한다. 머리가 찌근거렸다. 가족과 단절, 물질적 인간관계, 역할이라는 껍데기가 나를 규정하는 현실, 나는 그레고르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회사 생활이 끝나면 나도 그레고르처럼 되는 건 아닐까?’라는 물음은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여행을 하면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 여행 날짜를 기다리며 회복과 치유를 갈망했다. 게으른 익숙함에 금을 깊게 내고 싶었다. 평범한 일상에 묵직한 자극을 주고 싶었다.
떠남으로써 삶에 새로운 결을 더할 수 있을까? 밴쿠버 여행은 어떤 형태로든 인생에 새로운 결을 새길 수 있는 재료를 줄거라 확신했다. 다만, 재료를 알아차리는 방법과 어떤 레시피로 양념하고 요리할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었다. 오롯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몫이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다 보면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만 품었다.
2019년 7월 밴쿠버 여행은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