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전
올해 아껴둔 휴가를 쓸 때가 왔다. 아내와 딸의 출국일까지 12일 남았다. 캐나다로 갈 때까지 오롯이 시간을 함께 보내려 일주일 휴가를 냈다. 같이 일하는 팀장과 상무도 다소 놀란 눈치다. 휴가를 써야 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너도 가니?’였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나도 회사에 자원(Resource) 가운데 하나다. 갑자기 퇴사라도 한다면 당장 자원을 충원하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걱정이 될 법도 하다.
팀장은 기러기 아빠 3년 차다. 아내와 두 아이는 미국에서 거주한다. 잠깐 시간이 비어 휴가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나눴다. 가족을 못 보며 사는 건 쉽지 않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나 보다. 팀장은 농담을 건 낸다. “기러기는 처음 6개월이 가장 힘들고, 그 보다 더 힘들 때는 다시 합치기로 하기 전 6개월이다.”라고 했다. 웃자고 한 말이겠지만 기러기 아빠, 기러기 남편이 되는 현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아무 문제없이 캐나다에 갈 수 있을 줄 알고 집을 미리 팔았다. COVID19로 캐나다는 외국인 입국을 제한하여 밴쿠버행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허가를 받기 위해서 캐나다 이민국에 추가 서류를 제출하고 승인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도 아내와 딸은 입국 허가가 났지만 일정이 지연되어 출국 날까지 지낼 곳이 없어졌다. 남은 일주일을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반자발적인 홈리스가 됐다.
입국 지연의 아쉬움보다는 남은 일주일을 호텔에서 가족과 함께 머물 수 있다는 기쁨이 훨씬 더 컸다. 새삼 왜 그동안 이런 시간을 갖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지극히 평범한 질문이지만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시간이 없어서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어설픈 답을 억지로 끌어냈다. 집, 회사 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무엇 때문에 시간이 없었을까? 하루 24시간 가운데 절반 가량을 회사에 쏟는 것은 그 무게가 얼마나 무겁길래 단 일주일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영원히 흐를 것 같던 시간은 한정됐다.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기질도 조급을 못 이긴다. 시간관념은 무한에서 유한으로 바뀌자 삶을 바라보는 태도도 따라 변했다. 태도가 변하니 평소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내가 들고 있는 가방이 무거워 보이고, 자기 전에 챙겨 먹는 영양제를 먹는 시간도 눈에 들어오고, 아내가 내일 누구와 언제 어디에서 약속을 잡았다고 했는지도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야근, 피곤, 무심, 야근, 피곤, 무심으로 아주 일관된 삶을 살아간다며, 그래도 행복하냐고 묻곤 했던 아내가 웬일이냐며 놀란다. 시큰둥한 말투지만 표정이 예전보다 훨씬 밝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낮 시간에는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전화하는 일이 드물었다. 아내로부터 전화가 오면 불안하기도 했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 점심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혹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걸까?’ 아내는 말한다. 오늘 월급날이라 돈 입금되었다고, 이번 한 달도 고생 많았다고, 이 말하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어색했다.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되찾는데 꽤 오래 걸렸다. 한정된 시간이 우리를 억누르자 ‘혼자’에서 ‘함께’가 됐다.
5년 전 여름, 우리는 결혼 준비로 바빴고, 이 여름 우리는 이별 준비로 바쁘다. 물론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고, 삶이 어긋나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5년 전 지금,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미리 준비한 목걸이를 걸어주며 손수 쓴 편지를 읽어줬다. 어설프고 불완전했지만 아내는 오롯이 그 순간에 집중했다. 편지 내용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진부하지만 담백하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부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너는 언제나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만든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부부가 되어서도 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물론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안녕을 준비하는 일주일을 준비하다 보니 아내가 새삼 고맙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보낸 과거, 현재, 미래를 계속 떠올린다. 과거에 대한 미안함, 미래에 대한 희망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도 매우 중요하다. 남은 시간만큼은 오롯이 서로에 집중하며 순간을 즐기고 싶다. 5년 동안 우리를 짓누르던 책임감, 돈, 불안, 걱정, 실망, 원망을 모두 다 내려놓고 서로만 바라보는 것보다 더 좋은 안녕을 준비하는 방법이 있을까? “우리는 뭔가를 ‘하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게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의미 있다”던 미국 심리학자 웨인 다이어의 글귀에 유독 눈길이 간다.
간디의 전기에서 기억에 남은, 무척이나 멋진 일화를 들려드릴게요. 어느 날 간디가 기자들로부터 그의 철학을 몇 글자로 정리해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위대한 베다어 문학인 <우파니샤드>를 인용했습니다. “내려놓고 즐겨라!” 이 말은 당신이 하는 일을 내려놓으라는 말이 아니라, 일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그저 그 일을 즐기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따르라.’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따르면 이제는 부정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런 것들은 인생에 들여놓지 않을 때라는 사실을 발견할 겁니다.
- 웨인 다이어, 인생의 태도, 210-211, 더퀘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