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레오 Mar 14. 2020

03. 노부부의 밴쿠버 여행을 보며

나는 밴쿠버에 왜 가는가?

(2019 밴쿠버에 다녀온 경험을 작성한 글입니다)


비행기 좌석에 앉으니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감을 느꼈다. 여권번호 끝 한자리를 잘못 입력하여 eTA 신청이 안되었다는 항공사 직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리는 힘이 풀리고 정신은 혼미했다.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하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일들은 감당하기 버거워 보였다. 초조했다. 두려워할수록 불안은 사고를 더더욱 마비시켰다.


항공사 직원의 적극적인 대응 덕분에 다행히도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제야 걱정은 안도로 불안은 해방으로 급격하게 변했다. 긴장을 많이 했던 탓인지 이륙하고 얼마 되지 않아 피로가 몰려왔다. 짧은 시간에 여러 감정들의 교차를 경험하는 건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만큼 고된 일이다.





3인 좌석 가운데 복도 쪽 자리에 앉았다.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와인을 부탁했다. 한 잔 쭉 들이켜고 잠을 청하고 싶었다. 옆 좌석 노부부는 안대와 귀마개를 가져다줄 것을 요청했다. 승무원이 자리를 떠나자 할머니는 혼잣말하듯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며늘 아가랑 손주가 많이 기다리겠는데?’, ‘수속하고 짐 찾고 하면 늦겠는데......’ 노부부가 나누는 대화가 귀를 기울였다. 아들 내외는 이미 오래전 캐나다로 이주를 했고 공항에 며느리가 도착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오기로 했나 보다. 할머니는 말투에 걱정이 배어 있었다. ‘길어야 몇십 분 늦어지는 걸텐데, 왜 이렇게 전전긍긍하실까?’ 왠지 모를 호기심이 일었다.


아내와 네 살 딸은 앞 좌석에 앉았다. 딸은 아빠가 뭐 하는지 궁금한 듯 뒤로 돌아 재롱을 부린다. 히죽거리는 모습을 보니 피로감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말을 걸려는 찰나 아이는 다시 홱 돌아서 엄마에게 안긴다. 승무원이 오자 노부부의 대화도 잠시 끊겼다. 나에게는 와인을 노부부에게는 안대와 귀마개를 건넸다. 노부부는 앞자리 꼬마가 신경 쓰이는 듯했다. 안대와 귀마개를 착용하고 바로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10시간 남짓 아이의 재잘거림과 함께 고단한 비행을 함께해야 하는 처지다.


노부부가 안대와 귀마개를 꺼내려고 할 때, 딸은 다시 뒤로 돌아섰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해맑은 미소를 흘린다. 이번에는 아이의 시선이 아빠가 아니라 노부부에게 향해 있었다. 아이 웃음은 해독제다. 노부부는 안대와 귀마개를 내려놓고 아이에게 장난을 건다. ‘우쭈쭈! 까꿍!’, 아이가 까르르 거리며 화답한다. 노부부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이름이 뭐니?’, ‘몇 살이야?’, ‘아이고 귀여워라.’ 아이와 대화를 시도하는 노부부의 얼굴에서 얼핏 그리움이 읽혔다. ‘캐나다에 있는 손주 얼굴이 아른거리지 않았을까?’ ‘어디 손주뿐이겠어 아들 내외 얼굴도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 노부부의 포근한 얼굴은 더욱 도드라졌다. 노부부의 여행 목적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나는 밴쿠버에 무슨 목적으로 가는 걸까? 노부부의 모습을 보나 다시금 본질적인 질문이 괴롭혔다. 오직 현재만을 살아보자는 다짐도 여행이라는 단어 앞에서 자주 흔들렸다. 여행은 무엇을 얻어와야 한다는 의무를 소리 없이 강요하는 괴상한 단어다. 이럴 때마다 나는 늘 포르투에서 보낸 시간이 떠오른다.


2013년 6월 어느 날,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홀로 2박 3일을 지내기로 했다. 리스본에서 출발한 기차가 포르투 상 벤투 역에 도착했다. 첫날에는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파스텔 톤 페인트를 칠한 집들은 무지개 폭죽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가는 곳마다 독특한 매력을 뿜고 있었다. 예스러움과 세련함의 조화가 소란스럽지 않게 스며든 도시였다. 포르투 골목은 마치 오래된 금고에서 보물을 찾은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다음 날, 해리포터를 쓴 영국 작가 조앤 K 롤링에게 영감을 준 곳으로 알려진 렐루서점과 마제스틱 카페를 둘러봤다. 잔잔한 도시에 우뚝 솟아 있는 클레리구스 종탑에 올라 포르투 전경을 내려다 보기도 했다. 둘러볼게 너무 많아 흥을 주체하지 못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다리가 아파 조금 쉬기로 했다. 근처 기념품 상점에서 엽서 두 장을 사서 잔잔히 흐르는 도루강 옆 아담한 카페에 앉았다. 유명하다는 포르투 와인 한 잔을 시켜 놓고 한 장은 나에게 또 다른 한 장은 부모님에게 썼다. 포르투에서 느낀 감정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글로 전하고 싶었다. 가장 의미 있는 기념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낯선 땅에서 보고 즐긴 내용을 줄줄이 써 내려간 뒤 마지막에 한 문장을 덧붙였다. “아버지, 어머니 다음에는 꼭 모시고 올게요!” 포르투는 꼭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도시였다.


포르투에 특별한 계획을 세우고 가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냥’ 갔다. 예전처럼 시간에 쫓겨 감정을 낭비하기보다 여유를 두고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다. 포르투에서 기대한 건 ‘여유’였다. 엽서에 담았던 수줍은 약속은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꼭 다시 오겠다는 고백은 아직도 내가 포르투에서 받은 인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포르투는 나에게 그런 곳이다.

포르투 도루강에서 엽서를 썼다




밴쿠버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궁금했다. 여행자는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떠난다. 휴식을 위해 떠나기도 하고 유명 건축물을 보러 떠나기도 하고 인생에 어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여행의 목적과 현실이 언제나 일치하는 건 아니다. 완벽한 계획에도 쉽게 균열이 일고, 철저한 정보 조사에도 허점은 있기 마련이다. 계획과 달리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고 미리 예약한 레스토랑의 음식 맛이 전혀 입에 맞지 않아 먹지 못하기고 하고 심지어 애써 찾은 관광지가 때마침 휴장을 하기도 한다.


낯선 시간과 장소에서 나도 늘 불확실성과 마주했다. 밴쿠버는 처음 보는 이방인 가족을 친절하게 맞이해주길 바랬다. 시간에 날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시간을 온전하게 맞춘 여행이 될 수 있기를 갈망했다. 포르투에서 그랬듯 새로운 감정을 삶에 새겨 앞으로 인생의 방향을 한 발자국이라도 틀을 수 있기를 다시금 되뇌었다.


와인에 취기가 올라왔다. 노부부는 불편한 좌석에서 세상에서 가장 편한 얼굴로 잠들었다. 피로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어느덧 창 밖으로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밴쿠버에 다다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02. 밴쿠버 가는 비행기를 못 탄다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