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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영 Jan 25. 2018

나와 더 친해지는 계절

지구 반대편에서의 겨울나기

1년 중 겨울이 거의 절반에 가까운 낯선 땅으로 터전을 옮겨 온지도 벌써 4년이 넘었다. 눈이 워낙 많이 내리고 기온도 꽤 낮지만, 제법 많은 건물과 건물 사이가 지하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또 발 빠른 제설 작업으로 사실 큰 불편은 없다. 다만 나의 생체 리듬은 꽃샘추위가 몰려오기 전 반짝하고 따뜻한 봄날을 보여주던 한국에 여전히 길들여져 있는 터라 이곳의 긴 겨울이 사실 조금 지겹다. 특히 3월 첫 주, 학교가 리딩 브레이크(Reading Break)로 일주일 정도 쉼을 갖는데, 이렇게 쉬고 나서도 학기가 6주 이상 지속되기 때문에 피로한 기분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특히 박사 과정 1년 차, 2년 차 때는 코스웍에 대한 부담까지 더해져 겨울이 오기도 전부터 짜증이 났다. 9월부터 12월, 1월부터 5월 초까지 이어지는 긴 시간들을 달리기에 내 호흡이 지나치게 짧았던 까닭이다. 지도교수는 내게 간곡히 겨울 스포츠를 하나 시작하라고 조언했고, 졸업한 선배는 따뜻한 나라로 잠시 피신 가듯 떠나는 여행은 필수라고 했다. 하지만 부부가 둘 다 유학생인 우리 수준에서는 그 어떤 것도 쉽지 않았다. 



첫눈이 오던 날. 서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바뀌며 마음에도 눈처럼 희뿌연 뭔가가 쌓이기 시작했다. 들숨과 날숨 사이의 온도 차가 커질수록 마음은 더욱 분주해졌다. 가급적 외출은 줄였고, 자연스레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눈이 쌓이고 달리기를 할 수 없으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과 비례하여 셀룰라이트가 폭증했다. 몸이 한껏 움츠러드는 것을 느낄 때면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마음이 이미 움츠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더 큰 무게로 지구를 누르기 시작했다.  



마치 겨울잠을 자듯 "견디고 버티는" 겨울 동안에도 시간은 무심하도록 공평하게 흘렀다. 가까스로 마음의 여유를 찾아 기지개를 켤 때가 되면 여름방학이 목전으로 다가와 있었다. 지난한 겨울에 대한 보상처럼 여름에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에 사로잡혔지만, 달콤한 위로의 시간은 언제나 쏜살같았다. 내가 이토록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다는 것이 놀라웠고, 놀라운 만큼 자존감은 바닥을 향했다. 



겨울의 한가운데까지 흘러온 다음에야 이렇게 겨울을 미워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마저도 4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야 가능해진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자 오히려 홀가분해진다. 저항을 벗자 순응이 찾아온 것이다. 덩달아 뾰족하게 날 서있던 마음이 누그러지며 나와 계절을, 나와 상황을, 나와 주변을 단단히 분리시키려 했던 시간들에 묘한 애정이 생긴다. 그래, 많이 힘들었구나. 많이 지쳤었구나. 하고. 


 

어쩔 수 없는 것들을 끌어안자 똑같은 배경이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맑게 갠 하늘, 하얀 눈밭 위로 반사되는 햇빛, 비록 기온은 낮지만 깨끗한 공기가 되려 나 스스로를 안온하게 감싸는 느낌. 나를 포근히 지켜보는 누군가가 마치 어딘가에 실재할 것 같은 느낌이다. 스스로에게서 완전히 분리된 것 같은 적당한 거리감이 그간 나를 압도하던 수많은 'To do list'로부터 해방감을 선물한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 마쉬며 머리부터 발 끝까지 깨끗한 것으로 다시 채워가는 시간. 다른 어느 계절에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오히려 겨울을 기다린다. 나약한 인간으로서 나를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을 아는 까닭에, 싫은 것이 있어야 좋은 것이 더 분명 해지는 것처럼 나를 위해 애쓰는 시간을 통해 더 꽉 차게 여물어 갈 것을 알기에, 결국 이 삶을 통해 배울 것은 오직 나 자신이기에, 나로 침잠하는 이 계절이 소중해지고 말았다. 


2018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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