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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영 Oct 11. 2019

나는 잘 살고 있을까?

끝없는 인생의 의미 찾기 

아주 긴 여름이었다. 월화수목금 매일 2시간, 길게는 4시간씩 배정된 수업을 하나 맡았고, 초대받은 강의만도 3개였다. 박사과정 신분으로 캐나다 교육에 대한 자유기고가가 되어버린 삶도 이미 버거운데, 그 위로 쏟아지는 또 다른 글감들도 어느 것 하나 그냥 떠나보내지 못했다. 하나씩 마무리가 되어가는 다이어리에 클리어 표시를 볼 때마다 뿌듯함이 늘었지만, 마음 한편에 돌덩이처럼 놓인 졸업에 대한 죄책감도 그 무게를 더해갔다. 


이사까지 마치고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8월도 보름이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새로운 동네의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난데없이 물난리가 났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소리가 잠결에는 웬 소나기 내리는 꿈을 꾸나보다 했다. 따끔따끔한 눈을 한참을 비비자 비로소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보였다. 맨발로 뛰쳐나가 도어맨 아저씨에게 다급한 소리로 뭐라 뭐라 외쳤지만, 내 몰골을 본 아저씨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말투로 "아가씨, 꿈에서 깨세요."라고 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 일이다. 


반복되는 물 사고와 끝나지 않은 보수공사로 아파트 회사와 시간 다툼을 하며 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생각보다 치사하고 거칠었다. 호텔과 동생집을 전전하며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 때고 노트북을 펼쳤다. 원고를 쓰다, 아파트 세입자 관련법을 찾다, 새로 이사 갈 집을 알아보다, 또다시 원고를 쓰고, 렌털 보드에 이의 제기를 하고, 아파트 매물을 뒤졌다. 일주일이 금세 이주일이 되고, 한 달을 미처 채우지 못한 어느 날, 드디어 아파트 회사 측에서 마련해준 임시 거처로 살림을 옮겼다.


물론 그 이후에도 믿기 힘든 일들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세탁기를 쓰면 부엌과 화장실 싱크로 물이 역류했다. 하나의 배관을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는 '어차피 잠시 머물다 가는 곳, 예민하지 말자' 다짐하며 한껏 달아오른 화를 삭였다. 그러다 언제가 부터는 잠을 자고 다음 날이 되어도 물이 빠지지 않게 되었다. 또다시 공사가 시작되고 어디에도 마음 하나 누일 곳이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터졌다. 인터넷 설치에도 벽을 뚫고 회선을 찾는 대공사가 필요한 집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존재 자체가 허공으로 붕 떠버렸다. 


나를 잃었다. 


해결해야 할 일들로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어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터질 수 있을까 수없이 질문했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억울했다. 1095불이나 내고 사는 내 집에 대한 권리. 마땅히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 힘들게 싸워 쟁취해야 하는 것이 되자, 엄청난 피로가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우두커니 상처 받은 사람이 되었다. 

회복력 제로의. 


학기가 시작되자 루틴 한 일상이 다시 찾아왔다. 지도교수와 미팅을 하고, 수업에서 생동감 넘치는 학부생들을 만나고, 시간을 아껴 집 뒤에 있는 산에도 한 번씩 올라간다. 이주일에 한 번은 친한 동생을 만나 뷔페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가볍지만 긴 수다로 삶의 무게를 툭툭 털어낸다.  


여름 내내 그토록 가혹했던 일들이 벌써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느냐고 날카롭게 세웠던 예민함도 끝났다. 사회의 어둡고 치사한 면만 보았을 뿐 하등의 배움과 깨달음조차 남기지 못한 시간들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이제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처음부터 어떤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일들은 없다. '의미'라는 것 자체가 사건이 여전히 진행 중일 때는 알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므로. 삶의 매 순간마다 의미를 찾느라 결국 그 순간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한 날들이 너무 많이 쌓였다. 그냥 이제는 묻지 않기로 했다. 자꾸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종료가 되는 시점에 저절로 알게 될 것이므로. 


지금은. 


Just keep going. 



2019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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