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보든 말든 눈이 새빨개지도록 울며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읽었던 <엄마를 부탁해>의 표지는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다. 이후 몰아치듯 신경숙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었고, 캐나다에 가서는 한국에서 미리 구입해둔 전자책을 아껴가며 읽고 또 읽었더랬다. 또, 어디 가서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인지 말할 기회가 생기면 한국 여성 작가 중(좋아하는 작가가 너무 많아 나름 국가와 성별로 분류한 대답!)에는 김형경과 공지영, 신경숙을 좋아한다고 답하곤 했다.
그러나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책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고, 나름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을 찾아 헤매는 사이 신경숙이라는 작가는 내게 서서히 잊혔다. 모국어에 대한 목마름으로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를 몇 번이고 들으며 새롭게 알게 된 고전 작가들에 대한 책에 빠진 것도 한몫했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차고 넘치므로 이미 몇 권이나 읽은 작가는 자연스레 다시 찾지 않게 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와 신경숙 작가의 요가. 마침 그 둘(작가와 그들이 각자 선택한 달리기와 요가 모두)에 심하게 매료되었던 경험이 있던 터라 망설이지 않고 종이책을 구매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이들에게 혼자 하는 운동이 가지는 의미가 무얼지 더 들여다보고 싶기도, 그러면서 내가 배울 점을 찾아보고 싶기도, 아니, 어쩌면 더 솔직하게 나에게도 작가가 될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혹 그들과 어디 하나 닮은 구석이라도 있는지를 구태여, 구태여 찾아보고 싶던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신경숙 작가 역시 이 책을 쓰며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요가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었다. 그의 글을 읽는 동안 '이렇게까지!' 싶을 때가 여러 번이었다. 달리기에 대한 그의 존중을 중독이라고 말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내겐 그리 보였다. 그리고 달리기 중독은 나를 자주 맥빠지게 했다. (... 중략 ...) 그는 달리기에 작품 쓰는 만큼의 공력을 들이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달리는 그의 숨결과 땀방울과 호흡이 느껴졌다. 읽는 내가 달리고 있는 기분까지 들었다. 무엇에 대해 글을 쓰려면 이 정도는 중독된 다음에 써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내가 쓰고 있는 요가에 대한 글쓰기가 무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요가 다녀왔습니다> p.197과 198
하루키는 풀 마라톤을 20회 이상 완주한 시점에도 42킬로를 달리고 나면 가장 처음 달렸던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늘 더 좋은 기록이 나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시작해, 몸의 연료가 다 떨어져가며 여러 가지 일에 대해 화가 나다가, 급기야 가장 나중에는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달리는 자동차가 된 기분으로 마라톤을 끝내는 것, 그러나 이내 고통스러웠던 것도, 한심한 생각을 했던 것도 모두 잊고는 다음에는 좀 더 잘 달려야겠다는 결의만 남는다는 것이다.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 이 똑같은 프로세스를 반복한다는 것이, 아무리 애를 써도 변경 불가의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러므로 반복에 인해 변경 가능한 것은 오로지 그것을 대하는 나 자신의 태도밖에 없다는 것이, 나는 참 좋았다. 인생 전체의 시간을 들여 꾸준함을 쌓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무수한 반복을 통해 찾아오는 그 희열의 감각을, 나 역시 놓지고 싶지 않았다. 혹 어떤 사람들은 내가 '집에서' '혼자' '꾸준히' 운동하는 것이 '대단하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나는 그 과정에서 고통보다 희열을 더 자주 맛본다. 내가 들인 것보다 얻은 것이 더 큰 관계에서 대단하다는 평은 사실 적절치 않다.
두 다리를 들어 올리고 코어에 힘을 주면서 몸을 일직선으로 만들려고 할 때마다 균형을 잃고 흔들리다가 넘어지곤 하던 어느 날이다. 신기하게도 그날 홀로 머리 서기가 잠깐 되었다. 한 삼십 초쯤 서 있다가 곧 균형을 잃고 넘어졌지만 그날의 삼십 초가 있고 난 다음날부터 나는 홀로 머리 서기를 하게 되었다.
<요가 다녀왔습니다> p.170
얼마 전 이적이 인스타그램에서 '고수'에 대해 써놓은 쪽글을 본 적이 있다. 극도로 거부하던 고수를 외국 여행 중 쌀국수와 같이 먹었다가 고수의 존재 이유가 온몸으로 납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벼락같이 기호를 바꾸고 인생을 그 전과 후로 나눠버리는 경험 앞에 완성된 취향이란 없으므로 늘 마음을 열어두자는 말도 덧붙어 있었다. 신경숙 작가의 홀로 머리 서기를 위한 삼십 초가 바로 그 벼락같은 순간이지 않았을까?
나는 어떤 이야기든 그걸 글로 쓰려고 마주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과 나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실감하는 사람이며, 문장으로 완성하고 난 후에야 그 시간을 내가 살아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요가 다녀왔습니다> p.56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간다. 다시 고쳐 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나간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p.185
누구에게나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순간이 있다. 의식적으로 자각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내가 나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유독 어떤 때는 그 느낌이 몸의 감각으로 다가와 더욱 생생하게 전해지기도 한다. 달리기를 하며 거친 호흡이 느껴질 때, 맨발로 흙의 감촉을 느끼며 걸을 때, 일출이나 일몰을 볼 때, 산에 비친 구름의 그림자를 볼 때, 물에 비친 산등성이를 볼 때, 그리고 글을 쓸 때. 나는 그렇다. 문장을 다듬어가며 무심코 지나간 생각과 감정을 한 데 모으는 작업을 거쳐 비로소 내가 아닌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 인해 나의 경계가 더 분명해지는 것. 가끔은 세상으로 보내어지지 않은 노트북 폴더에 갇힌 글들이 무소용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무어라 부르든 끄적이는 행위는 멈추지 않고 있다.
2022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