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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그래서 올림피언이 되었나요?

by 너굴이

프롤로그의 제목을 기억하시나요?

네, 맞습니다. 이 글을 대체 왜 쓰냐는 질문이었지요. 에필로그도 수미쌍관으로 마무리해 볼까 합니다.

그래서, 이 글은 도대체 왜 썼나요?


이 일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글을, 나는 왜 썼을까. 1주일에 한 편씩, 4개월에 걸쳐, 글을 올릴 때마다 고민해 보았습니다. 서울대 뇌인지과학 이인아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해마를 훈련시키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일기를 쓰는 것이라고. 저는 결국 또 나 좋자고 이 '일기'를, 굳이, 공용 플랫폼이라는 공간을 활용하여, 썼던 것이었습니다. 제 30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박사과정을 반추해 보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만, 과연 읽는 사람에게도 즐거운 경험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세상에는 이런 방식으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음을 알리는 하나의 예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족하겠습니다.


저는 부러져 한 줌 재로 없어지지 않았고, 좁은 산도와 같은 이 과정을 결국 통과했습니다. 이 길의 끝에 영광이 있을지 넓은 바다가 펼쳐질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끝난다는 그 사실에 조금 안도할 뿐입니다. 처음 박사를 시작할 때, 어느 한 방향으로 길이 정해졌다는 사실에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처럼, 이제 이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고 다음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 다해 감사합니다.


저에게 박사과정이란 단순한 학위과정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학술적 성장뿐 아니라 내적 성장을 위한 기나긴 여행(spiritual journey)이라 생각했기에, 학위 논문과 박사학위가 나타내는 것 이상의 개인적 성장이 뒤따라왔길 바랄 뿐입니다. 또한 스스로 원해서 걸어 들어온 길을 마침내 일단락 지었다는 사실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중간에 포기했더라도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잘 살아갔을 겁니다. 하지만, 늘 짧고 강력하게 끝낼 수 있는 일을 좋아하는 제가, 그래서 과연 이 기나긴 길을 걸어낼 수 있을지 숱한 낮과 밤을 자문하느라 마음을 태우던 제가, 마라톤 경기의 finish line을 통과한 것만으로도 뿌듯합니다.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워하던 일을, 시간은 좀 걸렸지만 결국 해냈다는 그 기억으로 남은 인생을 좀 더 단단하게 살 수 있을 겁니다.


아쉬웠던 부분이 왜 없었겠습니까.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일도 있었고,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움을 삼키는 순간도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니,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없이, 모든 일이 그때 그 자리에서 필요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그렇게 빚어져 오늘에 이르렀고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조건 없는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를 단순히 운으로 치부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지 말자는 다짐을, 논문 디펜스하는 날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공부해서 남 주라"는 가르침을 전해주신 어느 선생님의 말처럼, 배운 것을 써먹어 타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거기에서 가장 큰 뿌듯함을 찾겠습니다.


박사논문은 어차피 출판을 하지 않기 때문에 PDF 형태로만 존재할 것이고 acknowledgements(감사의 글)는 영어로 쓰여 제 진심을 잘 전달하기에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하여, 이곳에 제 감사 인사를 대신하려 합니다. 부끄러워 보내지 못했기에 발신인 없는 편지 같은 느낌이지만, 언젠가 이 글을 읽을 수도 있으니까요.






엄마, 아빠.

두 분의 희생과 조건 없는 사랑으로 저는 제 욕심껏 세상을 누비고 살아요. 남들보다 더 오래, 더 많이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그저 네가 하고 싶은 일이니 걱정 말고 하라던 그 말. 그 말 뒤에 조용히 잠든 걱정을 애써 모른 척했습니다. 제 꿈이 더 소중하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요. 자식들을 일찍 타지로 떠나보내고, 차라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면 더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었을까, 라며 읊조리는 아빠의 입술 끝에서 자식인 나는 절대 가늠할 수 없는 애달픔을 느꼈습니다. 나는 어쩌면, 존재로써 부모에게 더 큰 외로움을 주는 대상이었을지도요.


이곳에서의 제 삶은 나름 평안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캐나다에서 변하는 제 모습이 좋았고 이곳에서 삶의 터전을 가꾸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생긴 것도, 모국어도, DNA도 모두 한국인이지만, 내 정체성과 국적은 내가 만들어나가는 것이고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저에게 캐나다는 제가 선택한 집이었습니다. 한국은 그저 내가 선택의 여지없이 태어나고 자라 일정시간 시간을 보낸 곳으로 마음속에서 자리매김하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향해 늘 신경줄이 하나 뻗어나가 있는 이유는, 엄마 아빠가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겠지요.


항상 "너 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라"라고 말해주신 덕분에 제가 하고 싶은 길을 걸음에 있어 막힘이 없었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여 하지 못했던 일에 가슴 아파할 때도, 너의 능력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을 걸으면 된다고, 알려주셨지요.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날아볼 수 있도록 정신적 자산을 일궈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 <와일드 로봇>의 주인공 로지의 아낌없는 헌신과 희생을 보며 부모님 생각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올림피언'이 되었냐구요?


이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고, 순탄한 듯하다가도 험했습니다. 별달리 특별할 것이라곤 없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그랬어요.


단순히 박사 프로그램 시작할 때부터 요이땅 하고 기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까요. 20대 초중반 시험공부를 하던 때부터 시작된, '스스로에게 나를 증명하기' 프로젝트가 이토록 오래 이어져온 것이었습니다. 제가 spiritual journey라고 명명한 이유는 결국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토록, '내가 목표한 일을 이뤘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럼, 박사모하나 썼다고 해서 이 프로젝트가 막을 내렸냐 하면, 또 그건 아니에요. 저는 아직도 저를 통해 보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번쩍번쩍 빛나 보이는 자리, 거들먹거릴 수 있는 지위나 명함, 떵떵거릴 만큼 차고 넘치는 돈, 남들이 알아서 고개 숙여주는 명예 -- 이런 것들은 제가 원하는 것과 거리가 멉니다.


하루라도 빨리 박사 학위를 받고 싶고, 교수가 되고 싶고, 등등, 뭐 이렇게 가시적인 타이틀에 혹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어요.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 선수는 금메달을 따지 못한다고. '금메달'이라는 목적에 집중하는 순간 마음의 평정을 잃고 몸에 힘이 들어가게 된다고. 그러니, 항샹 금메달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그 말씀이요. 마음이 조급해질 때, 누가 나를 어서 "박사"라고 불러주길 원하는 마음이 커질 때, 내 안에서 '금메달'을 향한 집착을 버릴 수 있도록 나를 다잡았습니다. 제 목표는 금메달 하나 따고 선수 생활 접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목표는 이제 다시 설정해야겠지만, 그래서 수반되는 불확실성도 분명 존재하지만, 저는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임하려고 합니다.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현실을 아주 무시할 순 없겠지만, 설마 하니 뭐, 굶어 죽기야 하겠습니까. 그저 '운전면허증'을 받았으니 이제 도로에서 직접 차를 몰아보면서 새로운 journey를 꾸려나가면 되겠지요.


이 과정을 겪으면서 몇 가지 달라진 점 혹은 변화를 위한 포석의 계기 비슷한 것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안 되면 되게 하라', '해야 하면 할 수 있다'와 같이 포항제철 창업주 정신과 비슷한 마인드를 갖고 살았는데, 이젠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 크게 변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몰아붙이지 않는 것이 너의 성장"이라는 제 상담사의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젠 몸이 힘들어서일지도요...).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타인의 평가에 맞춰져 있던 마음의 구심점을 제 안으로 끌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의 특성상 비교에서 아주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제 곤조를 지키는 법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저라는 사람의 mechanism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 큰 수확입니다. 무엇이 나의 발작/불안버튼인지, 내가 화가 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이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등등. 제 몸과 마음을 잘 다룰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체화할 수 있는 과정이었습니다.


또한,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이 늘었습니다. 세상은 다양하고 우리는 타인의 오늘과 어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나만의 잣대로 타인을 평가하는 일에서 조금은 거리를 둬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한다는 그럴싸한 말 대신에, '당신도 오늘 하루를 치열하게 버텨내고 있군요'라는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조금씩 제 안에서 자라남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 입장에서는 일견 이해되지 않거나 불쾌할 수 있어도 그냥, "그럴 수 있다" 라고 생각하기 쉬워짐을 알았습니다. 대단히 마음이 넓어서 혹은 그릇이 커져서가 아닙니다. 그저, 불필요한 감정에 오래 묶여있는 것이 결코 나를 위한 길이 아님을 깨달아서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삶이 녹록지 않은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나까지 불필요하게 뾰족한 눈을 더할 필요는 없다는 마음이 생겨서입니다.






자, 이제 정말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그동안 저의 박사과정을 되돌아보는 이 여정에 동참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했습니다.

저는 또 다른, 좀 더 신나는, 일기를 들고 나타나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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