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 시상대(aka. 졸업식)에 서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이 날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살면서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에 큰 의미를 두질 않았기에 박사 졸업식이라고 해서 기필코 참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해외 유학의 특성상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다른 도시나 나라로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졸업식 참석을 위해 다시 이곳을 방문한다는 것은 시간적/재정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에, 제 마음속에서 박사 졸업식은 늘 필수가 아닌 선택이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논문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10개월 동안 마음을 바꾸어 '짝꿍과 봄 졸업식 참석'이라는 목표를 세웠는데요. 이유는 단순했어요. 바로 날씨 때문이었습니다.
앞선 글에서 밝혔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졸업을 위한 요건과 졸업식을 위한 요건은 아주 별개였습니다. 졸업은 논문 디펜스를 마치고 수정 후 학교 측의 승인을 받으면 그만이기에, 연중무휴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반면, 졸업식은 1년에 두 번 -- 봄 & 가을 -- 만 진행되기에, 정해진 날짜에 맞춰 각종 요건을 충족시키고 졸업식 참석 신청 및 학위 가운 대여를 해야 합니다. 졸업식에 큰 의미는 두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간 수 년에 걸쳐 졸업식 시즌을 지켜보며 내린 결론은 있었습니다. 졸업식에 참석하려면 봄에 하자. 으슬으슬한 가을/초겨울 날씨에 얄팍한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은 채 캠퍼스를 덜덜 떨며 다닐 생각을 하니, 졸업식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거든요.
그래, 할 거면, 봄이어야 한다.
현실적인 부분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면서 졸업식 참석은 좀 더 실현가능한 선택지가 되었습니다. 논문 심사가 진행되던 마지막 2-3개월 동안, 졸업 후의 삶에 대한 그림이 얼추 그려졌어요. 당장 다른 나라 혹은 도시로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졸업식에 참석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게다가 이 여정을 같이 달려온 짝꿍과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졸업식 참석을 위해 부모님들을 초청하진 않았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음(?)에 오시라고 말씀드렸다는 편이 더 맞겠네요. 출전 선수가 시상대에 서는 것만큼이나 영광 가득한 순간은 없겠지요. 오랜 시간 걱정은 감춘 채 묵묵히 응원으로 일관하신 부모님과 그 순간을 함께 하는 것만큼 뜻깊은 장면도 없을 거고요. 저 역시 부모님께 박사 학위 가운도 입혀 드리고 캐나다 국내 여행을 다니는 모습을 그려보곤 했지만, 졸업과 동시에 무거운 현실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이 몇 곱절 더 크게 작용했습니다. 부모님이 오신다면 그들을 모시고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시간적/재정적 여유가 있어야 할 텐데, 저나 짝꿍이나 그런 부분에서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어요. 일단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비자 신청, 구직 활동/새 직장 적응, 그리고 이사 --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밀려왔거든요. 졸업식 즈음에는 이삿짐을 싸느라 정신도 없고 집도 폭탄 맞은 꼴이 될 것인데 그 와중에 여행을 계획할 수 있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어른들의 방문을 일방적으로 미뤘어요. 추후 상황이 나아지고 우리가 어른들을 편안하게 모실 수 있을 때 오시는 게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졸업식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post-graduation life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축하 파티나 하고 여행이나 다니며 쉬라고 하는데, 현실은 아주 달랐습니다. 나중에 이 순간을 돌이켜봤을 때, 제대로 쉬거나 진정한 축하를 누릴 여력이 전혀 없었음을 안타깝게 여기게 되리란 걸 이미 알면서도, 방법이 없었어요. 너무도 굵직한 것들이 한꺼번에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덜덜 거리며 굴러가고 있었거든요.
학위 논문 승인 및 졸업 과정은 이전 글에서 저의 짜증을 눌러 담아 풍부하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자기들이 만든 데드라인을 쿨하게 넘겨버릴 정도로 얼탱이 없는 학교 행정과 그로 인해 단전에서 올라왔던 제 짜증은, 캐나다 행정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였지요. 이게 단순한 논문 승인 및 졸업이 아니라, 봄 졸업식 참석과 관련된 과정이었기 때문에 제 짜증이 10배로 증폭되었습니다. 학생이 데드라인에 맞춰 모든 일이 진행되게끔 필요한 서류를 제출해 봤자 학교에서 승인을 늦게 한 바람에, 저는 진짜로 봄 졸업식은 물 건너간 줄 알았습니다. 해당 데드라인 이전에 학교 승인을 받지 않으면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대문짝만 하게 써놓았으면서, 본인들이 시킨 대로 기한 내 제출한 서류가 4-5일 늦게 처리되는 해프닝 때문에 적잖은 마음고생을 했거든요. 사실, '짜증'이라는 단어는 사건의 무게를 가볍게 보이게끔 제가 고른 것이고요. 당시에는 진지하게 dean에게 공식 항의 메일을 보낼까 생각했었습니다. "늦었지만 다 처리해 줬으니 된 거 아냐?"라는 담당 직원의 마인드를 보며, 그나마 교직원이라서 해고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거 아닐까, 미국이었으면 징벌적 손해배상 충분히 때렸을 것 같은데, 등등, 짝꿍과 별의별 이야기를 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에 비하면, 귀찮은 절차이긴 했지만, 졸업식 참석을 위한 요건 (신청, 서류 절차, 등등)을 맞추는 것은 '일' 축에도 속하지 않았답니다.
졸업은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동시에 막막함과 불확실성이 대폭 늘어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특히 job market이 얼어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지요. 저는 이력서에 gap이 생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최대한 졸업 후 바로 일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어차피 요즘은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해서 모두 학계에 남는 것도 아니고, 저 역시 이분법적 직업관 -- academia vs. non-academia -- 에 갇혀있을 생각은 없었기에 일단 다가오는 기회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논문 수정을 하던 와중 여러 차례 job interview를 거쳐야 했기에 다소 바쁘긴 했지만, 다행히 좋은 결과로 이어져 밥 굶을 걱정을 하진 않아도 되었습니다. 물론 직업 불안정성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여기서 안주할 순 없으니,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고자 계속 가능성을 타진하였습니다.
졸업 직후 저와 짝꿍을 가장 번거롭게 했던 부분은 놀랍게도 job application이 아니었습니다. 급변하는 캐나다의 이민정책의 영향을 우리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음을 느낀 지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졸업 후 워크퍼밋' 신청 요건 중 영어점수 제출이 추가된 부분이었죠. 예전에는 졸업장만으로 워크퍼밋 신청이 가능했습니다만, 이민자에 대한 장벽이 높아지면서 모든 학위 소지자들은 영어 시험을 치고 특정 기준을 넘는 점수를 제출해야 워크퍼밋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사학위 소지자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그 덕에 영어시험을 관장하는 기관은 떼돈을 벌지 않았을까, 추정만 할 뿐입니다. 물론 넘어야 하는 기준이 높진 않으니, 대충 봐도 별일 없을 겁니다. 다만, 제 생각엔, 시험은 시험이기에, 본인의 영어실력과 상관없이(혹은 영어로 박사논문을 쓴 것과 상관없이) 영어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거창한 '공부'가 아니라도, 시험 유형에 익숙해지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하죠. 이 지점에서 저와 짝꿍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머리뚜껑이 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이제 막 논문을 제출하고 승인받아 녹초가 되었는데 또(!!!!)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해야 된다니요. 내 전문성을 기르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절차인데 말이죠. 그저 시험을 치르기 위해 400불에 가까운 돈을 지불하고, 혹시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모의고사를 풀어야 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매우 달갑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어 시험장에서 짜증과 불만이 가득한 미국인 응시자를 마주한 이후, 그나마 내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라 덜 억울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영어권 국가에서 온 사람이라도 캐네디언이 아닌 사람들이 이 워크퍼밋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영어 점수 제출이 필수라고 합니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요.
이 모든 일은 이사 앞에서 애교가 되고 맙니다. 그간 학교의 아름다운 울타리에서 잘 보호받고 살았는데, 캐나다의 악명 높은 부동산 시장을 몸소 경험하게 되었죠. 렌탈 마켓에서는 입주자 '심사'를 거쳐 집주인이 원하는 세입자를 받는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답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믿을만한 세입자가 될 테니 나를 뽑아주세요"를 피력하기 위해 제출해야 할 서류가 참 많았습니다. 재직증명서, 소득증명서 (필요하면 세금 징수 서류), 은행 내용증명서 (실제 월급이 제때 들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추천인 (직장 혹은 사적 관계), 신용점수, 이전 집주인의 추천서, 학생비자 혹은 워킹비자 등등. 농담이 아니라, dissertation defense/job application보다 tenant application이 더 까다롭고 힘들었어요. 저와 짝꿍은 이제 막 졸업을 하고 직장도 아직 탐색 중인 데다가, 캐나다에서의 신분도 학생에서 워크퍼밋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었기에 모든 것이 불확실했거든요. Tenant로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어디까지 서류를 준비해야 할까, 내 개인정보를 어느 정도로 알려줘야 할까, 짝꿍과 매 식사시간마다 준비서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학교 밖은 재정적으로 대단히 위험(ㅋㅋ)하여, 지금 사는 공간만큼의 유닛에서 살려면 학교에서 지불하던 렌트의 1.6-1.7배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각종 공과금을 내지 않던 사치는 이제 영원히 안녕이었고요. 그렇다면 재정적 충격을 줄이기 위해 렌트가 싼 지역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학교와 다운타운으로 출퇴근을 해야 했고 재택근무도 해야 했기에, 단순히 렌트비가 싼 값 (= 거리가 먼 곳)으로 가는 것도 현명하지 않은 선택지였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10일 남짓한 기간 동안 뷰잉만 18군데를 했습니다. 참고로 뷰잉이란, 관심 있는 유닛을 직접 보러 가는 것을 말합니다. 가고 싶다고 그냥 갈 수는 없고요. 집주인 혹은 부동산 중개인과 연락하여 시간 약속을 해야 하지요. 연락이 제때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10군데 연락하면 5군데 정도 연락이 와요. 처음에는 막막하게 생각되었던 '집 구하기' 과정이었는데, 그래도 발품을 팔면서 이 도시와 인근 지역의 분위기 및 부동산 동향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느 동네로 가야 할지도 몰라서 일단 닥치는 대로 뷰잉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에 드는 동네를 발견하고 그곳만 집중적으로 공략했어요. 출퇴근을 병행하며 뷰잉을 다니는 것에도 지칠 무렵, 다행히 적당한 물건과 인연이 닿아 계약서에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곧 이삿짐 싸기에 돌입했지요. 그동안 저에게 집이란 연구실과 다를 바 없었고, 아이나 반려동물이 있는 경우가 아니었기에 짐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저의 오산이었습니다. 4-5년 쌓인 짐을 정리하려니 이것도 상당한 노동이었어요.
논문 최종 승인을 받고 정확히 3주 만에, 구직/새로운 직장생활, 영어시험/워크퍼밋, 집 계약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열심히 달리더니 어느덧 졸업식 날이 다가옵니다.
짝꿍과 저는 하루 차이로 졸업식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서로의 졸업식에 게스트로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식과 관련된 지침이 예상외로 빠듯하여 우리가 상상한 그림(같이 졸업가운을 입고 찍은 사진)은 만들 수 없었어요. 졸업가운은 본인의 학위 수여식 1시간 전에만 픽업할 수 있고 식이 끝난 이후 1시간 내에 무조건 반납이었거든요. 관객석에서 짝꿍의 졸업식을 보면서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이 1-2번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고생한 그의 노고가 어떤 형태로든 결실을 맺었다는 점이 특별히 크게 와 닿았어요. 정작 당사자는 단상 위에서 지겹고, 박사 학위 가운이 생각보다 무겁고 불편해서 얼른 벗었으면 좋겠다더군요. 이제 곧 가운을 반납하면 다시 입고 싶어도 못 입는다는 말로,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24시간 뒤, 저는 짝꿍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답니다. 어차피 별 감흥이 없으리라는 것은 잘 알았지만, 단상 위에서 1시간 반 동안이나 식순을 지켜보자니 지겹고 옷은 무겁고, 그랬습니다. 정작 짝꿍과 함께 게스트석에 앉아 있던 제 베프가 저보다 더 설레는 마음을 부여잡고 식순을 지켜봐주었습니다. 제 친구는 관객석에서 몇 번이나 울컥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연신 했답니다. 부모님은 함께하지 못하셨지만, 실시간 라이브 웹캠과 리코딩 영상을 통해 멀리서 저의 모습을 지켜봐 주셨어요. 제 친구가 심혈을 기울여 찍어준 사진 덕분에 저와 짝꿍의 순간이 기록으로 꼼꼼히 남았습니다. 남는 것은 사진이라는 말을 상기하며 열심히 사진에 임하다보니 입가에 경련이 생길 것 같았어요. 마침내 가운을 반납하는데 정말 어깨가 가벼워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이제 학생으로서의 시간은 정말로 끝이 났습니다!
다음주를 끝으로 박사과정을 기록한 이 여정도 막을 내릴 예정입니다. 다음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