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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8.0] 좋은 선생이란 무엇인가

by 너굴이

오늘은 저의 오래된 고민을 풀어볼까 합니다.


적잖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케이스를 보면서 다각도로 생각도 해보고 스스로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속 시원히 답을 내놓기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스승', '선생', 혹은 '가르치는 사람'의 덕목과 역할에 관한 것입니다.


살면서 숱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일단, 잉태되는 순간부터 '선생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선생님으로 일하고 계셨거든요. 요즘도 워킹맘으로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만, 저희 부모님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아이를 낳아 키우던 시절에는 '워킹맘'의 삶이 더욱더 각박했습니다. '워킹맘'이라는 단어조차 없었고, 육아 휴직이라고 해봐야 출산 후 한 달이 전부였던 비인간적인 시대였지요. 따라서 저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여러 교육기관과 '선생님'의 손을 거쳤습니다. 이후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대학, 대학원, 그리고 박사 졸업을 한 현재에 이르기까지 숱한 선생님들이 제 인생에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가르치는 사람'이야말로 제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제가 만난 선생님의 범주는 다양했습니다. 친절한 선생님, 따스한 선생님, 웃음이 밝은 선생님, 인자한 선생님, 무서운 선생님, 때리는 선생님, 강약약강 선생님, 사이코패스 같은 선생님, 저를 잘 파악하시는 선생님, 저랑 닮은 구석이 많은 선생님, 인간으로서 존경심이 샘솟는 선생님, 등등. 무수히 많은 선생님들과 짧고 긴 인연을 맺었지만, 정작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저에 대해 대해 생각해 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좋은 선생님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여전히 저만의 정답을 찾는 중이지만, 그리고 제가 반드시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참을성'이야말로 좋은 선생님이 가져야 할 덕목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요.

여기서의 '참을성'은 단순히 10초에 한 번씩 올라오는 내면의 화를 무조건 눌러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육에 있어서의 올바른 참을성은 가르치는 대상에 맞춰 유연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선생'이 가져야 할 참을성이란, 이미 답을 알고 있고 가르쳐주고 싶어도 학생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적당한 가이드라인만 주면서 기다릴 수 있는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가르치다 보면 제 풀에 지쳐 그저 답을 알려주고 끝내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매 순간 그런 유혹을 맞이해요. 영어, 수학, 논술 과외를 하던 대학/석사생 시절부터 캐나다에서 학생들의 에세이를 채점하고 논문 작성을 도와주기까지, '나의 목소리'가 올라오는 순간이 참 많았습니다. 특히 영어나 수학처럼 답이 바로 보이는 순간에는, "이거잖아(aka. 이것도 모르니)" 라며 참을성 없이 학생에게 답을 투하한 순간도 많았지요. 사견입니다만, 누가 가르쳐주는 답은 휘발성이 강합니다. 배우는 당사자의 뇌에 오래 머물지 않아요. 스스로 연산 증명과정을 도출해 보거나 (비록 답안지를 보면서 베끼더라도), 혹은 특정 단어로 영작을 해 보거나 하는 등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지 않으면, 타인이 강제적으로 떠먹인 답은 뇌에 오래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배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도 나온 것 아닐까요.


한편, 인내심의 범주를 조금 늘려 친절을 포함하는 정서로 이해한다면, 이는 시간적 여유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 아주 오래전 사회심리학자들이 '친절'에 대해 수행한 연구가 있습니다 (https://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5697). 간단히 요약하자면,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남을 도와줄 여력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 속담은 친절과 인내심에도 적용되는 말이었습니다. 시간이 곧 돈이 되는 현대 사회에서, 내 시간이자 돈을 써 가면서 남에게 친절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애초에 시간 혹은 돈에 쪼들리지 않는 환경이라야, 주변도 돌아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좋은 선생이 지녀야 할 덕목인 참을성에도 '친절과 시간적 여유'를 그대로 접목시킬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시험 성적을 빨리 올려야 되는 환경에서는 학생의 탐구를 기다려 줄 여유가 없을 겁니다. 빠른 성적 상승은 돈과 직결되니까요. 주변과 경쟁하며 "저 집 아이는 여기도 다니고 저기도 다니고, 어디에서 상도 탔고, 어느 학교에 진학한대"라는 말은 가뜩이나 없는 시간적 여유를 더 쪼그라들게 만듭니다. 오늘과 내일을 희생해서 남보다 앞서 나가는 것에만 집중하면 답을 찾기 급급하여 진정한 배움의 과정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어지지요.


한편, 스스로에게 친절하지 못한 사람이 남에게 친절하거나 인내심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20대 내내 스스로에게 강퍅하게 굴었던 저는 가르치는 대상에게 친절함을 내보일 여력이 없었습니다. 다양한 경로로 남을 가르쳐봤지만, 그때마다 속에서 올라오는 조급함이 금방 답답함으로 전환되는 것을 보면서, 좋은 선생님이 될 자질이 저에겐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만나게 된 '훌륭하지 못한 선생님'들을 보면서, 또 그들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알게 모르게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가르치는 자리에 앉지 말아야겠다고 확고하게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 험난하고도 어려운 세상, 그다지 좋은 선생님이 될 자질이 없어 보이는 제가 굳이 남을 괴롭히는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선생'이라는 큰 카테고리를 조금 좁히다 보면 '교수'라는 직업이 나옵니다. 그런데 말이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구 중심 대학의 교수는 선생의 부분집합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 중 하나가, 교수를 가르치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인데요.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라 하겠습니다. 교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본분은 '연구활동'입니다. 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가르치는 능력도 탁월하면 좋겠지만, 대학에서는 연구활동을 잘하고 못 가르치는 사람을 연구 실적이 형편없고 잘 가르치는 사람보다 훨씬 선호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즉, 교수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 연구자의 성격을 짙게 띠고 있기 때문에, '선생'의 부분집합이 아니라 이와 큰 교집합을 가진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합하겠습니다 (물론 '연구'하는 선생님도 많이 계시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티칭 중심 대학에서 근무하는 교수들도 많습니다. 다만, 지극히 세부적인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고 본인이 독자적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동시에 티칭을 곁들이는 것이 연구 중심대학 교수직의 본분이라는 점을 보건대, 일반적인 선생님과의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티칭이 너무 수준 이하라면 곤란하겠지요. 흔히 말하는 교과서 펴 놓고 줄줄 읽는 교수, 수업은 하지 않고 학생들 조별과제만 시키는 교수 등은 수준 미달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랬다가 총장실에 불려 가거나 승진 및 연봉에서의 불이익을 받아도 놀랍지 않을 일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교수'로서의 삶을 경험하진 못 했습니다만, teaching assistant 및 instructor로서의 가르치는 경력은 그래도 꽤 쌓인 편입니다. 한국과 캐나다에서 모두 학생들을 가르쳐봤기에 양국의 특징에 대해서는 밤을 새워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굳이 길게 늘어놓진 않겠습니다만, 단 한 가지의 특징을 꼽으라면 다음을 들 수 있겠네요. 캐나다에서는 학생을 '고객'처럼 받들어모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도 미국보다는 덜 하다고 합니다만...). 학생은 수업료를 내고 배움을 '구입'하러 온 사람이기 때문에 교수와 조교, 그리고 학교의 모든 시스템은 그러한 needs에 부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때문에 수업 내용이나 교수/수업조교의 가르치는 방식에 대해 학생이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또한 성적 이의제기도 어렵지 않게 하고요. 스승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는 동양의 미덕은 이곳에서 깡그리 사라지죠. 일단 선생/교수를 이름으로 부르면서 시작하니까, 그 언어의 차이가 야기하는 인지적 차이도 상당할 겁니다.


어느 시스템이 좋고 나쁜지를 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캐나다에서 학생을 가르치면서 제가 기존에 갖고 있던 '가르침'에 대한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다는 점은 강조하고 싶어요. 처음에는 저도 학생들이 빠르게 답을 도출할 수 있게끔 돕는 것이 선생의 역할이라 생각했습니다. 정치학이니 정해진 답이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방법론과 같은 수업은 수학 수업과 같아서 답이 분명히 존재하기도 하고요. 그 외에는 에세이 작성이 주를 이룹니다만, 논리적 글쓰기에도 어느 정도 답이 존재합니다. 해서, 피드백을 줄 때에는 5-6가지의 채점 기준을 구체적으로 마련해놓고 그에 따라 점수 구간을 나누는 등, 매우 꼼꼼한 채점을 했더랬죠. 성적 이의제기를 원천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만, 제 마음 깊은 곳에는 '이렇게 써야만 좋은 글쓰기가 된다'라는 신념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네, 안타깝게도 다양한 사고방식을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괴발새발 쓴 글은 어느 정도 정석의 글쓰기를 할 수 있게 다잡아주긴 해야 합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만, 박사 과정의 해를 거듭할수록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단호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요. 일단 지도교수 판다곰의 역할(?)이 컸습니다. 학생을 매우 사랑하고 열정과 애정이 넘치며 늘 자상하고 자애로운, 그러면서 에너지가 넘쳐서 전 세계를 날아다니는 그를 보며 나름 속앓이를 많이 했습니다. 나는 저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설령 교수가 된다 해도 저렇게 인간애를 뿜어낼 수 있는 큰 그릇이 아닌 것 같은데. 괜히 나로 인해 학생들이 상처받고 나도 괴로울 바에는 티칭을 하지 않는 직업을 찾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이어졌지요.


세월이 흘러 지도교수와 '좋은 선생'의 자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teaching 역시 고객 서비스이자 하나의 show에 준하는 일로 여기면 된다고 하더군요. 물론 진정으로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려는 마음은 필요하겠지만, 티칭 역시 특정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니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은연중에 좋은 선생과 좋은 사람을 연결 지어 생각하던 저의 모습을 깨닫고, 판다곰의 말을 오래도록 곱씹어보던 날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다지 좋은 선생을 만나지 못해서 괴로웠던 일부 경험을 확대 해석하여 '나는 저렇게 나쁜(?)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라는 방어기제를 형성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학계에 존재하는 또라이같은 교수들, 혹은 넓은 범주의 '선생'이라는 집단에서 있을 수 있는 선생답지 못한 선생들에 관한 성토 대회를 하려면 삼일 밤낮도 거뜬할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사람들로 이뤄진 집단이나 사회라고 해도 그 상호작용의 결과가 항상 좋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개인의 단순 합이 사회는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직업을 가졌거나 그런 경로를 걷고자 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수준에서 '내가 어떤 가르침을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매일 해야 할 겁니다. 저도 가르치는 업에 종사하게 된다면 누구보다 치열하게 이 문제를 고민해야겠지요. 하지만 일견 교육철학으로 보이는 이 문제가 결국은 남에게 조금 더 시간적 여유를 내어줄 수 있느냐, 타인에게 좀 더 친절할 수 있느냐, 의 문제로도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은 비교적 최근입니다.


제 박사과정 내내, 저의 상담가는 제가 스스로에게 좀 더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진심을 다해 도와주었습니다. 박사과정 자체는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이었지만 (Phd is dehumanizing process라는 농담이자 진담은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많이 쓰이는 농담입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스스로에게 친절한 법을 조금은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길 가다 눈이 마주치면 웃으며 지나가는 캐네디언들을 따라 하다 보니, 그리고 조건없이 남을 돕는 캐네디언들에게 신세진 적도 있다 보니, 저도 그 배움을 받잡아 조금은 남에게 친절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친절을 악용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에 20% 정도는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여전히) 다짐하긴 합니다. 무언가 아직도 갈팡질팡하여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한 채 오늘의 글을 마무리 짓는 모양새가 되어 가고 있네요. 어쩌면 조금 더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 혹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제 바람이 '선생'이라는 특정 직업에 투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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