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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Jun 16. 2023

손절이 필요할 때

너와 나의 선이 타협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를 때

몇 년 전 Paula와 '화남/분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Paula는 화가 난다는 것은 대부분 경계선에 관한 것이며(anger is often about boundary), 일종의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즉, 왜 화가 났는지 분석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는 '나의 어떤 부분이 건드려졌는지'를 알 수 있는 신호 혹은 '나 자신을 좀 더 들여다봐줘야 한다'는 알람으로 해석하라고 했었다.  


당시에는 꽤 오랜 기간 크게 화낼 일 없이 지냈다. 물론 부정적인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계절성) 우울감, 무력감, 자기 자신에 대한 의구심,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 상황에 대한 답답함, 짜증, 이 정도였고 정말로 화가 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선을 넘기 전까지는. 


여러 번 참았던 걸로 기억한다. 원래라면 진작에 싫은 소리를 했을 텐데, 어차피 자주 보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 자가 나에게 그렇게까지 큰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가끔 '어라?' 싶을 때가 있었지만 그냥 과하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삼 세 번의 법칙'따위에 구애받지 말고 초장에 잡았(?)어야 했다. 상대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준 내 잘못이지. 


이 자는 약속 시간을 지킨 적이 거의 없다. 30분 늦는 것은 예사였고, 심지어 약속을 까먹기까지 했다. 30분을 기다리다 오지 않아 전화를 해보면 각종 '감사하다, 미안하다' 미사여구를 붙이며 가장 중요한 메시지인 '약속을 까먹었다'는 말을 그제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웃고 넘길 수 있었다. 문제는 심각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정한 전화 약속도 까먹고 (심지어 자기가 정한 약속시간인데!) 30분 정도 연락이 닿지 않았을 때였다. 진짜로 화가 났다. 나중에 까먹었다며 연락이 왔을 때는 정말 험한 말 나갈까 봐 대화를 내 쪽에서 먼저 멈추고,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자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놈의 '미안하다'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그 난리(?)를 치고 다시 잡은 약속에서 그는 20분을 또 늦었다. 


5분, 10분 늦는 경우까지 싸잡아서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1분 1초도 늦지 않고 정확하게 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나도 5분, 10분 늦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니 많다). 하지만 30분을 말도 없이 늦거나, 약속 자체를 까먹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백 번 양보해서 예기치 못한 일로 30분 넘게 상대를 기다리게 할 수도 있다고 치자. 이런 일이 3-4번 넘게 반복되거나 약속 자체를 잊고 있다는 것은, 상대에게 이 약속을 얼마나 하찮게 생각하는 지를 매우 명백하게 보여주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만약 중요한 면접, 상사와의 전화 등이었다면 늦었겠는가. 게다가 이 사람은 그렇게 '번개'를 좋아했다. 어쩌다 한 두 번이면 모를까, 내가 있는 곳 근처에 올 때마다 갑자기 당일에 만날 수 있냐고 물으면 퍽 난감하다. 게다가 자기도 큰 기대를 갖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니 편하게 거절하란다. 자주 거절해야 하는 사람이 느끼는 마음의 부담 같은 것은 애초에 머릿 속에 없는 것이다. 처음 몇 번은 '번개'에 응했지만, 나중에는 그놈의 '번개'를 약속해 놓고 그 약속을 까먹었을 때, 더 이상은 '번개'에 응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번개'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이 자와의 '번개'가 싫었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사람은 나와의 약속에서 그나마 '예를 갖춰서' 대한 것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약속에서도 자기 남자친구와 노느라 40분을 늦고도 미안하다는 사과가 없었다거나, 그다음 약속에서도 1시간가량 늦고도 해맑게 웃으면서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자의 시간 개념은 나와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결론 밖에 나지 않았다. 나에게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니 최대한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것이고, 타인의 시간도 같은 이유로 존중해야 하는 대상인데, 이렇게 자기 내키는 대로 널을 뛰면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다고 볼 수밖에.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그렇지만 매우 명백하게 그 사람을 향한 퇴장 명령을 내렸다. 


궁금하긴 했다. 왜 그렇게 대책 없이 늦을까. 왜 미리 계획하지 않고 매번 갑자기 약속을 잡을까? 일이 터지고 난 후에 미안하다고 사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왜 자기 멋대로 선을 넘지?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것이 틀림없기에 내 머리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정한 약속에서도 20분을 지각한 그에게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 대신 분명하게 알렸다. (앞으로 혹시 또 나와 만날 일이 있다면) 시간 약속에 많이 늦지 말라고. 나에게는 내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내 방식을 존중해 달라고. 내 표정과 태도에서 이전과는 다른 단호함을 느꼈는지, 그 이후로는 아주 조심스럽게 나를 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Paula랑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궁금증이 생겼다. 

내가 까칠해서일까, 당시에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그 사람이 싫어졌기 때문에 내 시간이 1분도 낭비되지 않게 하고 싶어서였을까? Paula는 내 질문을 듣더니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냐고 물었다. 응, 있지... 


주로 내가 바빠서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 몸이 아파서 짜증이 쉽게 솟구칠 때,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외부 일에 유난히 더 빡빡하게 구는 나 자신을 느낀다고 답했다 (이 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내가 강박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내가 정한 스케줄이 외부의 상황에 의해 흐트러질 때 '욱' 하는 분노가 올라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럴 때는 짜증이 아니라 '화'가 난다. 헛소리에도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너그럽게 반응하려면 체력을 키워야 한다는 김영민 선생님의 말씀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인가. 신체적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적 품을 넉넉하게 키워야 각종 개소리에도 머리털 하나 흔들리지 않고 대응할 수 있다는 건 잘 알겠는데, 나같이 '예민한' 사람에게는 그게 꽤 어렵다. 그래서 나는 '선택과 집중'의 지혜를 발휘하여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나의 에너지를 털어 넣은 친절을 베풀자고 마음먹었는데 ('베푼다'는 단어가 젠 체하는 것 같아서 싫지만, 일단은), 가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지냈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 나와 전혀 잘 지낼 수 없는 사람임을 알았을 때가 제일 난감하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매번 내 입 안의 혀처럼 굴 수는 없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이 항상 내 컨디션을 알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미친 듯이 예민한 사람처럼 굴지 않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미성숙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짜증이 분노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끊는 법을 탑재해야 했다. 


Paula가 말했다. 

항상 마음상태를 체크하라고. 나에게 충분한 에너지가 있는지, (아무리 사소할지언정) 어떤 제안을 받아들일 여력이 있는지, 내 마음에 충분한 여력이 있는지 등을. 이미 말했듯 분노는 주로 선을 넘느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나의 선이 무엇인지 잘 알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정신적, 신체적 피로가 심할 때 친절을 유지하지 어렵다고 말하며, 내가 그렇게 특별한 케이스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다만, 화가 난다는 것은 누군가 나의 선을 침범했다는 징후일 수 있기에 그게 무엇인지 미리 잘 알고 남이 침범하기 전에 내가 적극적으로 피하거나 혹은 상대에게 미리 언질을 주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내 상태가 어떤지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봄으로써 나에게 좀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며. 위의 세 가지 질문을 던졌을 때 "No"라는 답이 나온다면 상대의 부탁이나 제안을 거절하거나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마음의 여유도 없는데 해야 할 일을 쑤셔 넣어 과하게 스트레스받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약속한 시간이 끝날 무렵 Paula가 말했다. 


"You are claustrophobic"


평생을 아무런 문제 없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했건만, 이제 와서 폐소공포증이라니? (이때까지만 해도 MRI를 찍기 훨씬 전이었기에 폐소공포증이 발생할 만한 상황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었더니, Paula가 웃으며 말했다.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는 폐소공포증이 없을 수는 있지만, 타인이 내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하면 바로 마음에서 선을 그어버리는, 그런 류의 claustrophobia란다. 결국, 나에게는 '선'이 그렇게 중요했었나 보다.  


돌이켜보면 시간 약속을 오지게 안 지키는 누군가에 의해서만 화가 났던 것은 아니다. 가족으로부터도 지나치게(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다) 사생활을 캐묻는 것 같은 질문을 받으면 '그만하라'라고 돌려 말했던 기억이 난다. 멀리 살아도 시시콜콜 다 털어놓고 말하는 부모자식 관계가 있는가 하면, 나처럼 모든 일 처리가 끝난 후 '보고 형식'으로 가족에게 '통보'하는 사람도 있다. 어차피 어릴 때부터 독립적이었고, 독립성을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자랐으니 이제 와서 새로울 것도 없다. 게다가 이제는 이역만리에 사는데, 그들이 도와줄 수 없는 일이면 말해봤자 걱정만 끼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면 미리 이야기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내가 처리하고 나중에 잘 해결되었다고 알리자, 이런 마인드였던 것 같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가족도 나에게 그렇게 해주길 바란 것은 아닐까 (오은영 박사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행동하는 대로 남들이 행동할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나 선생님같이 권위 있는 인물이 나를 지켜본다는 느낌을 받을 때 불편해했다. 공부하는 것, 운동하는 것, 사소한 일을 할 때 등등, 그들이 오며 가며 곁눈질로 지켜보는 것을 싫어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특히 내가 외국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어쩌다가 받는 내 지출 내역에 대한 질문도 묘하게 불쾌했다. 사실 엄마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얼마에 뭘 샀는지 물어본 것일 텐데, 나는 감시당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이유를 몰랐다. 엄마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남의 돈을 훔쳐서 산 것도 아니고, 내가 갖고 싶었던 피아노를 내 돈으로 샀으니 딱히 불쾌할 필요도 없는데, "얼마 주고 샀어?"라는 그 간단한 질문이 왜 그렇게 싫었을까.   


Paula는 오늘도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신선한 시각에서 답을 제공했다. 

타인으로부터 내 영역을 침범당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being intrusive), 내 방어기제가 작동된다고 했다. 문제상황 혹은 갈등 상황에서 쓰는 방법을 방어기제라고 하는데, 내가 많이 쓰는 방어기제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나를 잘 알 수 있다고 한다. '내 영역이 침범당한다는 느낌'이 방어기제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claustrophobia랑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이는 예전에 했던 TCI 기질 테스트 결과와도 비슷했다. 위험 및 자극 추구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개방성은 유의미하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외국 생활을 하거나 새로운 것을 도전하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으나 사회적 연대감을 형성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들었다. 


시작은 남다른 시간관념을 가진 누군가에 대한 푸념에서 비롯되었지만, 세션이 끝나갈 때 즈음에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나를 발견하였다. 선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개개인이 가진 '전제'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을텐데, 나는 '내가 그렇게 할 것이므로 남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과연 자유로웠던가. 모두는 각자 다른 전제와 사고방식을 갖고 산다. 물론 나도 시간 개념이 제멋대로인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타인의 지각에 관대하다고 해서 혹은 당신이 그놈의 번개를 좋아한다고 해서, 타인도 당신의 지각에 관대하고 당신의 번개 제안을 항상 좋아할 것이라 단정 짓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문제의 방점을 보다 나에게 집중시키고 싶었다. 나의 당연함이 모두의 당연함이 되리라 생각하지 말자. 사람들은 나의 예민함/섬세함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 눈에 보인다고 남의 눈에도 보일 것이라 '전제'하지 말고, 말로 설명을 해 줘야지. 그래야 내가 화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고. 어차피 화를 내고 나면 가장 큰 자괴감을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이니, 최대한 화를 내지 않는 편이 좋다고. Paula의 따스한 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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