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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Jun 29. 2023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권리

아이는 없어요. 그리고 없을 거예요. 

"너굴이씨도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내가 살고 있는 밴쿠버는 흔히 말하는 West Coast vibe가 충만한 곳으로 다양성 존중을 삶의 기치로 삼고 있는 도시이다. 내가 첫 해에 살았던 기숙사 역시 실로 다양한 삶의 양식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이 덕분에 나도 모르게 한국에서 배양해 온 성적 지향성 그리고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을 아주 빠르고 확실하게 던져버릴 수 있었다. 아직 내 안의 한국인 DNA가 다 희석된 것은 아니겠지만, 어지간한 상황에는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을 자주 쓰는 나를 종종 본다. 알게 모르게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가치관에 얽매여 살았던 것 같은데, 나의 일부분이 말랑말랑해지고 있는 것 같아 이곳에서의 내 변화가 마음에 든다.  


다만, 캐나다에 살고 있지만 내가 한국에 있는 것이 아닌가 헷갈리는 경우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인들의 '정상 가족'에 대한 견고한 선입견을 마주할 때이다. 몇 번의 예외는 있었지만 이곳에서 만난 로컬들은 내가 먼저 내 개인 정보에 대해 떠벌리기 전까지 먼저 궁금해하지 않았다.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등등. 동성애 및 각종 다양한 성적 지향을 존중하게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어서 그런지, 우리가 흔히 '결혼'이라는 단어를 들으며 떠올리는 이성애자와의 법적 결혼은 숱한 가족 형태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정서가 지배적이다. 상대가 동성애자일 수도 있고 common-law partner와 같이 살고 있을 수도 있고 트랜스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상대의 사생활에 대해 단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좋은 습관을 장착하려 노력했다. 상대가 성전환 수술을 두 번해서 원래의 생물학적 성별로 돌아왔든, 이혼을 5번 했든, 이성애자였다가 동성애자가 되었든, 그럴 수 있다. 정말 그럴 수 있다. 왜 그러면 안 되는가? 어디까지나 상대의 선택으로 나타난 결과가 나의 선입견에 의해 재단당하지 않게끔 선을 지키는 것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나의 의무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와 짝꿍이 캐나다에서 만났던 한국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의도가 좋았던 그렇지 않던 상관없이), 가임기 부부가 보이면 그들에게 자식이 있거나 곧 자식을 낳을 것이라 확신한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이는 없으세요"로 시작하는 대화는 정말 정중한 편이고 주로 젊은 층에서 많이 사용된다. 연배가 좀 있으신 분들과의 대화는 대부분 아래처럼 기승전 '아이'로 끝나는 양상을 보인다. 


"캐나다 온 지는 얼마나 되었대?" [중략] "아이 낳으면 여기만큼 키우기 좋은 곳이 없어."

"하는 일이 어떻게 되남?" [중략] "더 늦기 전에 아이 낳아야지."

"어머, XX 쪽에 살다니 너무 좋겠네." [중략] "나중에 아이 낳아보면 알겠지만, 거기가 학군은 좋은데 어쩌고..." 

등등 부부 사이에 아이가 있어야 한다는, 그 '정언명제'의 꼴을 한 레퍼토리는 끝이 없다. 


이 정언명제의 끝판왕은 아이러니하게도 밴쿠버에 도착한 바로 그 첫날 마주했더랬다. 당시 밴쿠버에 도착하여 바로 기숙사로 들어갈 생각으로 비행 편을 알아봤었는데, 기숙사 사무실이 열리는 시간에 도착하는 비행 편이 없었다. 아직 젊음을 믿고 혈기방자하게 설칠 때라, 기숙사 체크인 하는 날 새벽 1시에 도착하여 공항에서 노숙을 하다가 오전 8시까지 기숙사에 도착할 궁리로 비행 편을 골랐다. 결과적으로 아주 좋지 않았던 선택이었는데, 그 이후 나는 내가 더 이상 공항에서 노숙할 나이가 아님을 실감하고 비행 편에 돈을 쓰는 쪽을 택하고 있다. 8월 말 밴쿠버가 그렇게 추울 줄 몰랐지... 


처음 가는 도시이고 곤란한 상황을 면하고 싶어서 미리 한국에서 택시를 예약했었다 (공항에서 나오면 바로 택시 탑승장이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검색 결과 나온 아무개 한인택시 업체에 카톡으로 연락하고 예약을 컨펌받았다. 오전 8시로 약속된 택시를 기다리며 밤새 덜덜 떨었더니 새벽 5시가 되기 전 슬며시 떠오르는 아침 해가 퍽 반가웠다. 만나기로 한 시간,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내 이름 석 자를 목 놓아 부르고 있었다. 보통은 누구누구'씨' 정도는 붙이지 않나, 하는 찰나의 의문을 감추며 택시 조수석에 올라탔다 (왜 그랬을까, 뒷좌석에 타지). 뭐, 예상은 했지만 50대로 보이는 택시 운전수는 역시나 궁금한 점이 많았다. 왜 밴쿠버에 오게 되었는지, 어디서 공부하는지, 무슨 전공인지 등등. 보통은 내 전공을 들으면 예의상 '우와' 하는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나는 이쯤에서 그들의 '우와'를 반사해 주고 전공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를 취하면 보통은 목적지까지 조용하게 간다 (아니, 그럴게 아니라 다음부터 누가 전공을 물으면 그냥 형사소송법이라고 할까... 아이디어 추천받습니다). 


하지만 이 아저씨는 달랐다. 내 '반사' 따위 가볍게 무시한 채,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갑자기 열변을 토하다가, 자기는 몸은 외국에 있지만 마음은 늘 한국에 있는 진짜 한국인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묻지 않았는데요 ㅠ). 내가 처음부터 한국말을 못 하는 일본인인 척했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처음 오는 도시에 대한 약간의 설렘과 흥분, 그리고 수면부족으로 내 정신줄을 조금 느슨하게 잡았던 것이 틀림없다. 아저씨의 말에 너무도 충실하게 맞장구를 치며 목적지까지 10분 정도 남았을 무렵, 너무도 예상이 잘 되어 놀랍지도 않은 질문이 들렸다. 왜 한국도 아닌 밴쿠버에서까지 이 질문을 들어야 하는 걸까. 


"아니 근데, 이렇게 과년한 처자가 유학 나오면 결혼은 언제 하고 아이는 언제 낳는대?"


이미 결혼을 한 5번은 했다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당시의 나는 너무도 정직했다. 아이 낳을 생각이 없다고 뱉은 내 말을 채 갈무리하기도 전에, 아저씨는 식어빠진 애국 프레임을 들고 왔다. 출생률이 반토막인데 (당시에는 0.78명보다는 조금 나았다), 가임기 여성이 애를 안 낳는다니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냐,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자기 공부만 하면 다냐, 나는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캐나다로 왔지만 마음만은 조국에 있으며 큰일이 터지면 달려가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등등. 그 순간 수면부족으로 인한 짜증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조용히 목적지까지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멈추지 않았다. 아까는 말을 잘하지 않았냐는 둥, 언제는 또 대화를 해야 세대 갈등을 줄일 수 있다는 둥 하지 않았냐며 (내가 왜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을까 진짜...). 뻗쳐오는 성질을 누르며, 아저씨와 저는 다시 볼 일이 없을 테니 줄일 갈등도 없고 조용히 목적지까지 가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3번을 똑같이 반복하니 아저씨가 마침내 입을 닫았다. 당시 팁에 대한 개념이 조금 부족했던 나는 이 불쾌함을 겪고도 팁을 30%나 내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알고 봤더니, 미터기 끄고 달린 요금이 로컬 택시가 부르는 금액보다 20불가량 높았다!!), 입을 닫아달라는 내 요청에 입이 댓발 나왔던 아저씨는 묵직한 팁에 입이 헤 벌어지며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 에피소드는 나에게 적잖은 짜증과 충격을 안겼지만 동시에 꽤 괜찮은 예방접종이 되었다. 그 이후 밴쿠버에서 만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로부터 우리의 자녀 계획에 대한 질문(혹은 공격)을 받을 때면, 때로는 발랄하게 때로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의 거짓 대답으로 받아치게 되었다. 늘 솔직할 필요는 없더라... 아니면 그냥 한국어를 못 하는 검은 머리 캐네디언인 척하는 것도 꽤 도움이 된다. 




작년 가을부터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잇따른 출산 소식이 들려왔다. 가장 친한 친구도 어렵지 않게 엄마가 되었고, 누군가는 피임에 실패해서, 누군가는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등등, 제 각각의 이유를 뒤로 한 채 첫 아이 혹은 n번째 아이를 품에 안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 내 주변에서는 나 빼고 모두 임신과 출산 소식을 들려주었는데, 이를 지켜본 나의 친구는 내 주변에 출산운이 충만하다며 내가 삼신할머니 아니냐고 묻기까지 했다. 다른 친구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그닥 없어 보이는 나에게, 주변의 친한 사람들이 아이를 낳으면 또 아이를 갖고 싶어질 수 있다고 조심스레 말하기도 했다. 나는 가만히 웃었다. 내가 삼신할머니가 되어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퍽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삼신할머니의 연락을 받는 것은 나에게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 


한국과 다른 출산 및 산후조리 문화 덕분에(?) 내 주변 지인들의 한 달배기 아이들을 차례로 만나는 영광을 누렸다 (이곳은 출산 후 다음날 혹은 다다음날 퇴원해야 한다. 여건만 된다면 꼭 병원에서 출산하지 않아도 된다. 산후조리원 따위는 없고, 한국인 가사도우미 혹은 친정엄마의 도움을 빌려 집에서 산후조리를 한다). '핏덩이'가 무엇인지 한 달배기 아이들을 보면서 알게 되었고, 신생아가 어떻게 '아기'가 되는지 그들을 보며 간접경험을 쌓아나갔다. 그 아이들이 조금씩 통통해져 갈 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그 아이들의 부모를 보며, 그들에게 진심으로 축복을 보냈다. 아이들은 예뻤다. 물론 내가 예쁠 때만 본 것이겠지만, 24시간 중 23시간을 징징대며 울다가도 단 5분 웃어주면 힘듦이 가신다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절대적으로 아이는 예쁘고 사랑스럽다. 


나는 아이가 예쁘지 않기 때문에 낳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나와 짝꿍도 심심할 때 우리가 아이를 낳는다면 어떤 생김새일지, 어떤 스타일의 엄마와 아빠가 될지, 가정법적 대화를 종종 나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까지이다. 우리에게는 태어나지 않은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현실이 될지 말 지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떤 순간보다 두 발로 딛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잘 살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장류진 작가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는 아이를 그랜드 피아노에 비유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구절 덕분에 작가의 소설을 찾아 읽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내 마음의 상당 부분을 잘 대변해주고 있기에 통째로 이 곳에 인용하려 한다.  


"[...]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 안에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테고 패브릭 소파와 소파스툴, 원목 거실장과 몬스테라 화분은 둘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거실을 통해 부엌으로 가려면 한가운데로 가로지르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고 피아노의 뒷면과 벽 사이로 겨우 지나가거나, 기어서 피아노 밑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 이제야 비로소 누리게 된 것들을 남은 인생에서도 계속 안정적으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 이십 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작중의 화자에게 아이란, 그랜드 피아노처럼 감당도 안 되는데 순간의 욕심으로 들여놓아 나머지 삶의 부분이 잿빛으로 바라는, 그런 비합리적인 선택으로 다가온다. 지금 누리고 있는 소소한 경제적 자유마저 박탈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화자는 은연중에 출산과 육아는 여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풍요로운 선택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언젠가부터 한국사회에서의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는 먹고사는 데에 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의 전유물로 변해버린 풍토를 생각하면, 아이를 그랜드 피아노에 비유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선택이었다. 


급하기는 한 모양인지, 한국 정부는 꽤 오래전부터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붓는 동시에 숱한 질적/양적 저출생 해법 및 분석을 토해내고 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여 생각하는 '해법'에 다소 회의적이지만 여하간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 중인 것 같기는 하다. 관련된 분석을 보면 가임기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굵직한 이유로 경제적 어려움, 경력 단절 우려, 보육 시설 부족, 과도한 교육비 등이 꼽힌다. 주된 이유가 경제적 어려움과 교육비 등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의 육아란 대체적으로 부담스러운 그랜드 피아노를 장만하여 평생 머리에 이고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흥미롭게도 내 주변의 캐나다 사는 한국인들 대부분이 최소 2명에서 많게는 3-4명까지 낳아 기르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한국에서 해결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캐나다에서는 해결되었거나 혹은 해결될 수 있다고 믿게끔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캐나다의 복지정책과 사회구조는 한국의 그것과 상당히 달라서 단순히 출생률이라는 결과만 보고 캐나다의 정책이 우월하다는 결론을 내면 안 될 것이다.  


가임기에 있지만 아이를 낳지 않을 생각을 하는 여성 1인으로써, 위의 저출생 문제점 분석에 동의한다. 당장 나만 봐도 학생이니 경제적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고, 정부 보조를 받으며 아이를 낳는다 해도 이곳의 사교육비도 만만치 않게 들기 때문에 늘 허덕일 가능성이 크다. 집이라도 장만할라치면 밴쿠버의 미친 집값이 서울의 그것보다 더 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기 때문에, 경제적 여유를 누릴 가능성은 많지 않다. 그간의 간접경험을 토대로 이곳에서의 육아도 천상계의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관문은 데이케어인데 그 대기가 어마무시하여 최소 2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혹자는 출생과 동시에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고도 했다. 베이비 시터를 부르는 것도 다 돈이라서 결국은 조부모의 손을 빌리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학교에 입학하면 대학에 가기 전까지의 학비는 무료이지만 사교육비는 똑같이(어쩌면 더 많이) 든다. 각종 예체능은 한 두 개씩 기본으로 시키고, 여름만 되면 이런저런 캠프에 보내야 하기 때문에 (한국/중국 엄마들은 또 자녀가 뒤쳐지는 꼴을 못 보니 각종 '학원'에 보낸다),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물론, 한국에서처럼 학원 뺑뺑이는 없기에 아이들이 들로 산으로 뛰어노는 모습은 매일같이 볼 수 있다. 뛰어놀게 해도 부모가 받는 죄책감은 한국에서의 그것보다 좀 덜한 것 같다. 부모의 소득이 일정 기준 이하로 낮으면 보조금이 꽤 나온다고 알고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 중 한 사람만 일을 하고 나머지 사람이 육아를 담당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나은 옵션이 될 수 있다고 들었다. 


이곳은 꼭 엄마가 주 양육자여야 한다는 통념이 약한 것 같다. 따라서 아빠가 아이들을 전담하고 엄마가 주 수입원으로서 역할하는 집도 많다. 사회적으로도 가족을 항상 우선시하기 때문에 family emergency에 대처하기 위해 휴가를 내거나 출퇴근 시간을 조금 유동적으로 조정하는 것 등에는 꽤나 유연한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적으로 주양육자가 엄마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가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경력 단절 문제는 한국, 캐나다 할 것 없이 가임기 여성의 화두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육아와 경력단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같은 주제로 전여옥 씨가 20대 초반 여성과의 설전을 주고받는 장면이 늘 떠오른다. 방청객이었는지 지정된 토론 패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커리어가 단절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20대 초반의 여성에게, 전여옥 씨는 대체 무슨 커리어가 있다는 것이며 무슨 커리어를 갖고 싶다는 것인지 되물었다. 조금은 발끈한 듯 보이는 20대 여성이 '모르겠어요. 작가가 될 수도 있고, 기자가 될 수도 있고' 라며 쏘아붙였다. 전여옥 씨는 '나는 기자도 해봤고, 작가도 해봤고, 엄마도 해봤고 다 해봤지만 엄마가 되는 것이 내 커리어에 단 한순간도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강력한 한 방을 코웃음과 함께 선사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분통해하는 20대 여성의 클로즈업을 끝으로 짧은 영상은 여기서 끝이 났지만, 내 마음에는 거대한 물음표가 생겼다. 꼭 해 놓은 것이 있어야, 사회적으로 번듯한 커리어가 있어야 자식을 갖지 않겠다는 선언이 정당화되는 것인가? 어떤 결과와 상관없이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혹은 낳겠다고 선택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인가? 육아와 커리어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중국계 여성이 아이 다섯을 낳아 기르는 쇼츠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 영상에 달린 대다수 댓글들은 '공부도 잘하고 우수한 인재가 아이까지 많이 낳다니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공부도 잘 못 하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직업을 가지지 않은 여성이 아이 다섯을 낳으면 그 가치가 퇴색되는 것인가? 사회에 공헌한 바가 적으니 아이라도 많이 낳아 다행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반대로, 아직 어떤 커리어를 걸을지 정하진 못했지만 혹은 그 어떤 쌓아놓은 커리어도 없지만,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그렇게도 비난받을 일이어야 하나?  


아니다. 

접근 방식이 잘못되었다. 

직업도, 결혼도, 성적 지향도, 정치관도, 종교도, 그리고 어떤 가정을 이룰 것인가 따위의 문제 모두, 개인의 선택이자 권리로 접근해야 한다. 그 어디에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다. 내가 감히 한국 저출생률의 근본적인 원인을 딱 하나만 꼽을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놈의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사회 전체가 그 근간을 두고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미적분을 떼야하고, 영어는 어느 수준까지 해야 하고, 대학은 어디를 가야 하고, 집은 어느 동네 이하로는 안 되며, 대학에서는 각종 정해진 스펙을 쌓아야 하고, 최소한 어디 대기업 정도는 들어가거나 고시는 패스해야 하고, 연봉은 최소 어느 정도여야 하고 일 년에 한 번씩은 해외여행을 가야 하며, 취미 생활을 최소한 A, B, C 정도는 가져줘야 하고, 몇 살에는 결혼을 해야 하는데 결혼은 최소 어디서 해야 하고, 몇 살이 되기 전까지는 최소한 첫째를 낳아야 하고, 그리고 그 아이가 크면 자기가 했던 '해야 하고'의 쳇바퀴를 또 똑같이 돌려줘야 하고...    


이 전제부터 깨 부수지 않으면 그 사회는 미래가 없다. 0.78명이라는 가공할만한 숫자를 기록한 저출생률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출생률이 낮은 상황이니 아이를 낳는 것이 애국이라는 말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나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 결국 미래의 세금원을 낳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뭐 그렇게 거창하게 돌려서 말하나?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어차피 국가적 차원에서 신생아는 국가의 GDP를 유지하고 엄청나게 펑크가 나버린 연금을 메꿀 수단으로 인식되는 것 아니었나? 그 어디에도 개인의 다양한 선택을 지지할 여유가 있던가? 정형화된 틀에 갇힌 개인의 생애발달주기만큼 국가적 차원에서 다루기 쉽고 편리한 것이 없다. 그 과정에서 다양성을 들먹이며 남과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해보겠다고 뻗대는 개인은 결국 '조국의 무궁한 영광과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야 한다'는 굴레에 사로잡힌 개인은 그 개인만이 가진 독특하고도 고귀한 인간성을 상실한다. 우리는 각자의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는 선택을 할 권리가 있다.  




단언컨대 나는 나를 잘 안다. 

내가 나 다움을 잃을 때, 내가 나에게 걸고 있는 기대에 내가 부응하지 못할 때 나는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무너진다. 나는 통제하려는 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지금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내 몸과 생각,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해 가끔 분노를 토해내는데, 절대 마음대로 될 수 없는 존재인 자식을 내 인생에 넣었을 때 내가 행복할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나는 큰 확신이 들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자식을 키우는 기쁨과 보람은 그 어느 것에도 비유할 수 없다고. 

나도 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최고급 그랜드 피아노가 내는 소리와 같겠지. 그 아이가 커서 나를 엄마라 부르고 짝꿍을 아빠라 부르며, 조금 더 커서는 온갖 재롱과 웃음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장면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조금 괜찮은 디지털 피아노에 만족하며 밤낮으로 내가 원할 때 칠 수 있는 이 피아노를 선택하겠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자식을 키워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혹은 '자식을 키워봐야 진짜 철이 든다'는 식의 말은 이미 모두에게 익숙할 것이다. 개개인이 겪는 각종 어려움을 특정 나이라서 혹은 특정 단계라서 겪을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쯤으로 치부하지 말자.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할 공산이 크다. 철이 든다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조화로운 인간이 되자는 취지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디서부턴가 나잇값을 하라는 말과 맞물리면서 특정 나이가 되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식의 '도장 깨기' 인생관으로 이어졌다. 큰 아픔을 겪어야 청춘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식을 키워야지만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양 어깨로 오롯이 이고 있는 그 '십자가'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어른이 되는 첫 관문은 지났다고 본다. 물론 자식을 키우며 이제까지 몰랐던 부모님의 마음을 알 수도 있고, 자식이 살아갈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식을 키워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른'이 되는 다양한 길은 수 십 개, 수 백개, 아니 이 지구상의 인구수만큼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자기 밥벌이를 자기가 하면, 실제 나이와 상관없이 어른이라 봐도 좋다고 생각한다. 내 생활을 내 깜냥으로 굴리고 내 노동으로 밥벌이를 하여 내 일신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개인의 그릇과 깜냥, 그리고 팔자에 맞게 각자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이미 짊어지고 있다. 어리다고 덜 힘든 것도 아니고, 돈이 많다고 인생이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부모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너른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공헌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부모라는 허울 속에서 자기 자식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남에게 피해를 알게 모르게 끼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Paula와 아이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주변에서 '쟤가 말은 저렇게 해도 언젠가 아이를 낳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지던 참이었다. 글쎄, 어쩌면 내가 여지를 줬던 것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살면서 '절대' 혹은 '반드시'라는 말은 최대한 쓰지 말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내일 일을 누가 아나),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 이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애매모호한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향해 은근히 발사되는, '육아 세계에 동참할 지도 모른다'는 명시적인 혹은 암묵적인 기대가 묘하게 불편해지지고 있었다. 


내 말을 다 들은 Paula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이를 낳지 않는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 그 어떤 정당성을 부여하는 말과 상관없이, 그건 너의 고유한 권리야. 너는 네가 원하는 너 만의 선택을 할 권리가 있단다. (You have the right to make a choice of not having a kid. It's your right regardless of any reasonable justifications.  You have the right to make your own choices)."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할 권리, 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마음이 시원해졌다. 그렇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내 선택이 옳은 선택이었음을 입증할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뿐 아니라, 삶에서 어떤 순간이 와도 나는 나만의 선택을 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고 했다. 본인도 아이가 없는 여성이었기에 어떤 시선이 내리 꽂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캐나다에서!!). 다행히 배경은 한국이 아닌 캐나다였기에 조금 상황이 나았을진 모르겠으나, Paula 본인이 살아왔던 시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상 가정 (이성애자 부부와 1-2명의 자식들)이 주류를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던 시절이었기에 소수자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고 덧붙였다. 지금은 시절이 달라져서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애자 부부와 1-2명의 자식들로 구성된 '정상 가족'이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내가 그 주류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면 나는 앞으로 '소수자'로 분류될 텐데, 그럴수록 내가 한 선택은 내 권리라는 점을 늘 가슴에 새기고 스스로에게 주지시켜야 쓸데없는 시선과 허튼소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아니, 휘둘리지 않을 것은 알지만 아주 가끔이라도 타인의 생각 없는 말들로 인해 속상하거나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일을 했었다. 

내가 대학을 가고도 몇 해가 지난 후 퇴직을 했으니, 거의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한 직장에서 보내며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고 살았다. 엄마가 일을 하던 시절은 '워킹맘'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일하는 엄마가 극히 드문 시절이었다. 나는 각종 학부모회나 운동회, 학교 행사 등에서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온 기억이 별로 없다. 어린 마음에도 별로 서운하거나 속상하진 않았고, 그저 우리 엄마아빠는 바쁘니까 그러려니 했다. 어쩌다가 두 사람이 한꺼번에 얼굴을 비추는 날이 있으면, 바쁘진 않았을까 잠깐 생각했지만, 어린 마음에 다른 집 아이들처럼 나도 엄마아빠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엄마는 육아휴직을 한 달 밖에 받지 못했다. 당시의 복지 정책이란 형편없기 짝이 없었기에, 다들 아이를 낳고 퉁퉁 부은 몸으로 출근을 해야 했단다. 때문에 나는 일찍이 분유맛에 친숙해져야 했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분유 냄새를 맡으면 달달하고 맛있고 좋다. 아침 출근 시간마다 엄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방송용 시간을 1분 단위로 체크해 가며 우리의 밥을 차려주고, 도시락을 싸 주거나 점심을 챙겨놓고, 학교를 보내고, 본인의 출근 준비를 하는 등, 속된 말로 '미친년 널뛰듯이' 사는 삶을 엄마가 퇴직하는 날까지 봤다. 그 숱한 세월을 엄마는 한 번도 친정이나 시댁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나와 내 동생을 키워냈다. 차라리 돈을 주고 시터(당시에는 '시터'라는 단어도 없었다)를 고용할지 언정, 그리고 그 귀한 시터가 행여나 싫어할까 집안일은 본인이 퇴근한 후 할 테니 아이들만 잘 봐달라는 부탁을 늘 잊지 않으며 꿋꿋하게 두 아이를 키워냈다. 


엄마는 퇴근을 하면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우리의 저녁 식사 준비와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아빠도 돕긴 했지만, 그 시대가 다 그러했듯 모든 집안 살림은 엄마의 몫이었다. 당연히 엄마의 미간은 펴질 날이 없었다. 날이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 가끔 우리가 말썽을 일으키면 그것대로 엄마의 삶이 힘들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엄마에게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선생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당했어도 엄마에게는 전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복잡하고 버거운 엄마의 삶에 나까지 보태고 싶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은 없겠지만, 내가 기억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3-4명의(혹은 그 보다 더) 시터 아주머니가 우리 집을 거쳐갔다. 어떤 아줌마는 유별나게 무서웠고, 어떤 아줌마는 지나치게 허용적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 우리 집은 근처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굳이 그 동네로 이사를 간 가장 큰 이유가 당시 우리를 봐주던 시터 아주머니의 댁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게 날 만큼 따뜻하고, 믿음직스럽고, 인자한 어른 같은 아주머니였고, 그런 성품 덕에 엄마도 의지를 많이 했었다고 들었다. 


우리가 클 만큼 커서 시터 아주머니가 필요 없게 된 어느 날, 중학생이었던 나는 괜찮았지만 나이 터울이 조금 나는 어린 남동생이 걱정되었던 엄마는 아이를 저녁까지 맡아주는 태권도 학원에 보냈다. 당시만 해도 저녁까지 아이를 봐주는 곳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었다. 엄마가 없으면 친구들이랑 놀러 나가기 바빴던 나와는 달리, 내 동생은 학원을 다녀오면 주로 혼자 숙제를 하거나 컴퓨터로만 조용히 놀던 아이였다. 


어릴 때는 마냥 무섭고 불편했던 엄마를, 그런 엄마의 삶을, '엄마'가 아닌 한 '여성'의 삶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내가 대학에 진학하고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일상의 다른 모든 부분에 소홀할 때에도 가끔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가 해주던 밥이나 빨래가 그리워서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일에 지쳐 돌아왔는데도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가사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 그 옛 시절 일을 하면서 가족을 건사하던 엄마의 삶이 대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입에 떠 넣을 밥을 차리기도 귀찮은데, 엄마는 우리 네 식구의 몫을 다 했구나. 출근 시간도 빠듯한데, 단 하루도 아침을 굶기지 않고 풍성하게 차려서 먹여 보냈구나. 퇴근하면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을 텐데 또 저녁을 차리고, 간식을 만들고, 주말이면 가족과의 시간을 보낸다고 그렇게 바삐 뛰었구나. 지금의 내 나이보다 한참 어린 나이에 나를 낳고 그 삶을 살아오며 버겁진 않았을까. 아니, 많이 버거웠을 텐데, 단 한 번도 책임감 없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구나. 나의 엄마가 아닌, 30대, 40대 여성으로서의 한 사람이, 편하지도 않은 구두를 신고 혼자 퇴근하는 길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사람은 '그랜드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은 선택을 후회할까? 가끔 나에게 결혼도 하지 말고 아이도 낳지 말고 자유롭게 훨훨 날듯이 살라고 했던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던 말이 아니었을까? 



나는 나를 잘 안다. 

내 마음에서 확신이 생기지 않는 일은 해서 좋을 것이 없다. 

'그랜드 피아노'의 소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아주 고귀하고 영롱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놓을 충분한 공간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지를 물어보기 전에, 가장 중요한 질문인 '내가 그랜드 피아노를 원하는지'부터 스스로에게 늘 물어볼 것이다. 원하지 않는다면, 왜 원하지 않는지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유를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않을 권리'에 입각한 '선택'을 한 것임을 나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된다. 그저 내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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