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굴이 Jun 08. 2023

공부란 무엇인가

June 2023

김영민 선생님의 글을 좋아한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로 확실한 독자층을 굳히셨는데, 나도 그 '무엇인가' 시리즈에 매혹된 독자 중 한 명이었다. 내가 지금 젊음과 각종 관절 건강을 투자하고 있는 분야랑 조금 가까운 업계에 종사하고 계시기도 하고, 예전에 지금 학교에서 강연을 하신 적도 있다 (직접 뵙진 못했지만). BTS와 어떻게든 끄나풀을 엮어보려는 소녀 팬의 마음으로 선생님과 나 사이에 조그맣게라도 비슷한 구석이 없을지 고민해 본다. 김연아 선수 이후로 오랜만에 갖는 팬심. 


'나는 이 공부를 왜 하고 있는가', '이 공부는 해서 대체 무엇에 써 먹는가' 등등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명쾌하게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선생님의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일견 무용해 보이는 '학문'을 계속하는 자의 소명 의식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정해진대로 공부하고 시험보고 합격하고 또 공부하고 졸업하고, 를 반복하는 삶에서는 소명 의식 따위를 고민해보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좋은 성적과 합격은 내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는 것이었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편하게 먹거나 잠을 자는 것도 죄스러워야 하는, 이분법적 가치관을 뼈에 새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고뇌를 거치며 스스로를 설득시킬만큼 만족스러운 소명 의식이 있다고 생각했고, 나름 확고한 가치관으로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가치관은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이었고,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와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공유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Paula가 비유했듯 지금 내가 겪고 있는 mid-life crisis와 같은 전환기 앞에서는, 이전의 내 삶을 하드캐리했던 성공 방정식 같은 것들이 하등 힘을 쓰지 못했다. 그 당시의 나에게는 맞는 방정식이었지만, 더 이상 나에게 해답을 줄 수 없게 되었다. 


문제는 새로운 방정식이 순식간에 뿅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 경험치와 변화하는 가치관에 따라 내가 이 공부를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를 유연하게 바꿨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새로운 방정식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전통적으로 '성공 방정식'이라고 일컬어지던 길을 진지한 고민 없이 맹목적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마음과, 더 이상 그 '성공 방정식'이 나에게 통할 것 같지 않다는 마음이 늘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은 늘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기에, '개혁'을 꿈꾸는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위치한 그 부분은 늘 가만히 고개를 들어봤다가 조용히 쭈굴해지기 일쑤였다. 표면적으로는 일이 잘 진행되는 것 같았지만 나 만의 소명의식을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조정하지 못했으니, 사소한 일을 계기로 마음이 무너지고 연이어 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제는 내가 하는 일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은 모순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고, 책에서 배운 내용으로는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빠르게 변하면서도 과거의 문제를 답습한다. 이 와중에, 종속 변수라는 둥, 통제 변수라는 둥, 모델링이라는 둥, 변수 측정이라는 등등의 이야기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만약 데이터가 내 계획대로 잘 구해졌다면 지금과 같은 혼란은 겪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데이터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mid-life crisis는 언제고 왔을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회의감은 스스로를 후려치는 습관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내었다. 내가 보는 세계는 지극히 작고, 어쩌면 편협할 지 모르는 그 세계이고, 내가 하는 일이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조차 모르겠다며, '회의감' 부분이 목소리를 낸다. 그렇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후려치기' 파트가 떠올라 이렇게 말한다. 조금이라도 흥미로워 보이고 유의미한 연구는 이미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이 하나씩 꿰차고 있고, 내가 거기에 어떤 유의미함을 보탤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독창적으로 풀어내야 하는 속칭 '배운 자'들의 숙명. 독창적으로 무언가를 해 볼 능력은 고사하고, 이 과정을 통과하기 위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조차 잘 배양했는지 모르겠다고. 이토록 셀프 후려치기에 능하니 이 과정에 있으면서 건강한 자신감을 배양할 수 없었고, 억지로 자신감이라는 것을 빚어서 끌어올려봤자 혹은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아봤자, 가면증후군(Impostor Syndrome)과 유사한 증상만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동양의 미덕인 '겸손'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김영민 선생님의 <공부란 무엇인가>는 제목부터 이미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뽐내고 있었다. 선생님의 주장을 빌자면, 공부의 진정한 기대효과는 조금 더 까다로운 인간이 되는 것과 자기갱신의 체험이다 (까다로운 인간 부분은 웃자고 하신 이야기 같지만,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돈을 더 잘 벌기 위한 공부, 더 유식해보이기 위한 공부, 학위를 통해 학연을 만들기 위한 공부, 즉각적인 쓸모에 연연하는 공부, 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지식탐구를 통해 무지했던 나로부터 도망치는 오늘을 기대한다고 했다. 깊어진 지식으로 좀 더 섬세한(sensitive) 인식을 하고, 보다 정교한 언어를 통해 내가 체험하는 우주를 확장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문명의 발달에 기여할 수 있다고. 공부가 즉각적인 쓸모와 거리가 멀면 멀수록, 즉, 현실적으로 무슨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언뜻 불분명해 보이는 일에 성심껏 종사하는 이들에게서는 자기 통제력을 놓지 않는 파계승 같은 '간지'가 보인다고도 한다. 이러한 "정신적 척추 기립근"이야말로 유용성의 신화가 지배하는 오늘, 무용한 것에 매진하는 이에게 허락된 마지막 기대효과라는 말로 글을 맺으면서.  


권위있는 인물이 이렇게 정리해주니 참으로 반가웠을 정도로 (마치 시험 문제의 답을 맞힌 느낌), '정신적 척추 기립근'과 같은 관념이 나에게 완전히 새로웠던 것은 아니다. 이 고요한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최대한 내 안의 에너지를 나에게 집중시켜야 한다. 비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곳이기에 누가 뭘 했고, 언제 졸업을 했고, 어디에서 무슨 연구를 하고 등등의 이야기가 들리면, 최대한 내가 하는 일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나는 아직 자기 통제력을 잃지 않은 파계승의 간지를 체득하지 못하여, 주변과의 비교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다. 그래서 약간의 물리적 거리를 두고 내가 스스로의 일에 확신이 들 때까지 (혹은 뭐라도 내 놓을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조용히 혼자 일하는 방식을 택했다. 겉으로는 어쩌면 파계승의 간지가 조금 감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안은 그리 건강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며 큰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둥, 데이터를 구하느라 오래 고생하다가 지쳐버렸다는 둥, 내 건강도 이제 보살펴야 하는 단계라는 둥, 크고 작은 잡음이 몸에서 들린다는 둥, 주제를 중간에 바꿨다는 둥, 다 핑계일 순 있지만 어쩌면 그렇게 한꺼번에 합치해서 선을 (혹은 악을?) 이루는지.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학교에서 수영 경기가 열렸다. 덕분에 수영장은 못 가게 되었지만 운동 선수들의 경기를 직관할 수 있다니, 흥분한 상태로 수영장에 입장하고 보니, 2020년 도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Maggie MacNeil이 출전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금메달리스트의 경기를 직관하다니!' 라는 흥분으로 설렜으나 경기 휘슬이 울리기 전 출발선에 서 있는 9명의 선수들을 보니 순간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속도가 탁월함으로 치환되는 세계이니 상위권 선수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이 맞겠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나는 모든 선수에게 눈길이 갔다. 처음에 잘 나가다가 힘이 빠져서 뒤쳐지는 선수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응원하기도 하고, 작은 체구로 보아 시니어 대회에 첫 출전한 것 같은 주니어 선수가 크게 좌절하지 않고 긍정적인 힘을 받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탁월한 자들 가운데 더 탁월함을 보임으로써 금메달을 획득했던 Maggie는 독보적이었다. 누구보다 오래 잠영을 했기에 관객석에서 보아서는 선수가 출발한 후 어디에 가라앉아 있는지 알기 힘들었다. 다른 선수들이 물 밖에 나오고도 한참 후 수면으로 떠올라 스트로크를 시작하는 모습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막판에 몰아치는 힘도 실로 대단해서 반환점을 지난 후 2등과의 격차가 더 벌어지는 모습에 계속 입을 벌리고 봤던 것 같다. 단순히 실력이 훌륭해서가 아니었다. 탁월함을 추구하는 자에게서 느껴지는 간지. 그리고 감동. 문득 가만히 저 선수(혹은 모든 선수)의 하루를 머릿속에 그려봤다. 부상으로 시달렸을 나날들, 원하는 만큼 기록이 나오지 않아 좌절했을 낮과 밤, 매일 물과 육지를 오가며 몸을 단련했을 숱한 세월들이 그려졌다. 어쩌다 기록이 잘 나오면 매우 기쁘겠지만 그런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고 다시 스스로를 담금질해야 했을 시간. 그래, 탁월함이 쉽게 갖춰지면 재미가 없겠지... 순간 스스로에게 물었다. 기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날도 훈련의 일부로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순 없을까. 잘 하는 날만 나의 영광으로 기억하지 말고, 잘 되지 않는 시간도 배움으로 조금 덜 아프게 받아들일 수 없을까. 기록 싸움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갈고 닦는 이 시간을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으로 보면 안 될까. 나의 성장을 보기 위해, 나에게 약속한 바를 지키기 위해 이 짓(?)을 하고 있다고 늘 공공연하게 말하지 않았나. 




오랜만에 만난 Yves와의 미팅에서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래'라는 고전적인 질문을 받았다. 이 질문을 여러번 받았기에 내 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어제 했던 것 처럼 오늘 해야할 일을 하고, 오늘치 운동을 하고, 짝꿍과 밥을 해 먹고, 산책을 가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겠다고. 그의 오묘한 표정을 보면서, '너는 어떻게 보낼래'라고 나도 물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그 이후로도 긴 대화를 나눴다. 우리가 속한 사회의 부조리함과, 나 뿐만 아니라 꽤 많은 학생들이 이 분야에서 열정을 잃거나 흥미를 잃었다는 이야기. 권위있는 자들이 읊어대는 모델링과 이론이 대체 얼마나 유용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인간적인 면모라고는 지극히 없는 이곳에 정이 떨어졌다고. 커다란 그리즐리 베어같은 Yves는 늘 웃음이 많아서 저 웃음 너머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 적도 많았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곰은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도 미치지 않기 위해서 치열하게 자신의 내적 동기부여에 대해 고민하고, 삶의 의미를 찾느라 몇 십권에 달하는 일기를 써 댔다고 한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지나온 시간이 아까워서 계속 해야겠다거나 탁월함을 추구하고 싶어서, 등의 이유는 그렇게 적절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게다가 탁월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금도 과부하가 걸린 내 몸과 마음에 또 다른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나의 과제로 생각하고, 다음이 있다고 생각하라고. 한꺼번에 완벽을 기할 수 없다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 안타깝게도, 20년 가까이 한국 학생들을 보다보니 Trilemma라고 부를 만한 패턴이 꼭 보이더라고 덧붙였다 (일부 중국 학생도 포함). Trilemma의 세가지 축은 다음과 같았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외적 압박 (e.g., 잘 해야 되는데, 내가 이 정도는 해야 체면이 서는데 등등), 완벽주의, 그리고 건강 문제. 한국 학생들이 유난히 몸이 약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뇌는 매우 똑똑하면서도 멍청해서 외적 압박과 내적 압박(aka. 완벽주의)이 지속될 경우 뇌가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퍼지는 상황이 올 수 밖에 없는데, 그 때에는 신체에도 영향이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이런 경향성을 보이더란다. 나의 하루에 대해 그가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밤남으로 연구실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어쩌다 창문 너머로 볼 때, 그렇게 긴장과 스트레스로 가득하고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경직된 표정이었다며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렇게 힘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이미 해 놓은 것이 많으니 거기서 다듬어 나가면 된다고 했다. 완벽을 추구하지 말자고. 한 달 전 간절하게 부탁하던 Paula의 모습이 Yves에게서도 보였다. 


작년 겨울과 올해 초 데이터로 고생할 때, 그때 지금처럼 멈추고 잠시 쉬어간 다음 대안을 찾았어야 했는데, 4-5월까지 끌고 와버린 것이 안타깝단다. 비교적 친절하고 널널한 분위기의 5월 워크샵을 가지 못하게 된 것도 아쉽다고 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문제의 시작은 4-5월이었겠지만, 내 기억으로는 이미 2월에 시작되었고, 봄에는 이것저것 다른 프로젝트를 하며 문제를 숨겼던 것 같다. 아니, 작년 여름부터였나...? 여하간 나는 언제든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풍선이었는데, 공기 중에 돌아다니는 민들레 홀씨에 맞아서 터진거지 뭐... 


큰 숙제를 던져주는 거라며 허허 웃는 Yves는 삶의 의미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추천해주었다. 다만 단기간에 되지 않을 것이라며 껄껄 웃는다. 나도 안다. 지금의 spiritual journey가 내가 살아온 방식을 바꾸는 것이라면 그렇게 금방,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명상, 이키가이, 규칙적으로 보장된 휴식, 멍 때리기, 일기 쓰기, 등등. Yves와의 대화는 Paula와 나눈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곰인 줄 알았는데, 탁월하게 섬세한 (exquisitely sensitive) 곰이었어... 




Paula와 지난 미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탁월함이라든지 혹은 나의 성장을 동기부여로 삼는 것이 그렇게 좋은 생각이 아닌가보다, 라며 말을 꺼냈다. Yves는 자신의 호불호를 강요하는 편은 아니지만, 나는 이미 그의 표정에서 다른 생각을 느꼈고, 내 이야기를 듣는 Paula의 표정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조용히 입을 뗀 Paula는 자기가 생각하건대 탁월함(mastery)은 조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 같단다. 5년 전의 내가 생각한 탁월함과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탁월함은 천지차이일텐데, 추상적인 탁월함만을 생각하다보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선을 기약없이 좇는 것이 될 뿐이라고 했다. Yves가 한 말과 비슷했다. 탁월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지금까지의 내 방정식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결코 잡을 수 없는 태양을 잡아보겠다고 이론 공부를 하고 로켓을 만들겠다며 이리저리 설치다 방전되어 죽을 순 없다. 내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해서 평생 살아보겠다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소리다. 

 

Paula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까지 버텨온 시간이 짧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라고. 이런 마음이면 안 되는 것이냐고. 오늘따라 화려한 치마를 입은 Paula가 가만히 웃었다. 자기가 이해한 내 관점은 이렇단다. 그 긴 길을 허덕이며 와서 이제 겨우 도착 지점까지 20마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조금만 더 가면 되지 뭐하러 여기서 그만두냐고. 하지만 마지막 20마일이 어떤 상태의 길일지는 모르지 않냐고 반문했다. Grouse Mt. 같은 20마일일 수도 있고 사막만 계속되는 20마일일 수도 있다. 아마도 Yves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나온 것이 너무 아까워서 포기하기 싫다는 마음이 잘못되었다기 보다, 어쩌면 지금까지 걸었던 길 보다 조금 더 험난할 지 모를 마지막 20마일을 가기 위해 지나간 것에 기대는 마음이 그렇게까지 큰 동기부여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일거라고. 아까워서 포기하기 싫다는 자세와, 지금까지의 시간과는 상관없이 끝맺음을 보고 싶다는 마음가짐은 매우 다르다고 말했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끝을 맺고 싶기 때문에 이 과정을 마치고 싶다는 능동적인 화법으로 바꾸자고. 언제 시작했고 언제 끝 마칠지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집중하자며. 이 과정도 간단하게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생각하자고.   


서서히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 몇 가지 지켜야 할 사항들을 논의하던 중,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던 질문을 꺼냈다. 우리는 살면서 항상 성장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들어오질 않았던가. 근육을 단련시키려면 조금 무거운 무게의 아령을 들어야 효과가 있다는 식의 숱한 비유를 들어왔다. 'No pain, no gain'이란 말도 그 일환일터. 내가 만약 조금만 더 노력하면 원하는 다음 단계를 향한 성장을 할 수 있는데, 지금 노력하지 않아 그 발전의 기회를 놓치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Paula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나에게 진정한 성장이란 더 이상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push가 필요하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내 평생 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던 'not good enough'의 목소리를 'good enough'의 목소리로 전환시키는 것이 나의 진정한 성장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과 같은 시기를 또 겪을 순 없지 않겠냐며.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져야겠냐고 물었다. Good enough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 내가 한 일을 후려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주는 것. 먹고 자는 일을 내 성과와 연결시켜 희생시키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자기 돌봄 (self-care)을 실천하는 것. 운동이든 할 일이든 내 몸을 너무 몰아붙이지 않는 선에서 멈출 것.  


Paula는 따뜻하게, 그렇지만 더 이상 논쟁의 여지는 없다는 어조로 덧붙였다. 

"고통은 성공과 동의어가 아니야. 이 점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에 반영시키는 것, 그것이 너의 진정한 성장이야. 얼마나 더 잘 몰아붙이느냐가 아니라, 너 자신을 얼마나 믿느냐에 관한 문제야 (Not pushing is growth for you. Pain is not equated to success. This is about trust, not about pushing. THAT IS your growth)."  

 


매거진의 이전글 나 혼자 잔잔한 호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