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프린터 너굴이다.
운동도 1시간 정도로 짧고 굵게 끝내는 편을 선호한다. 그래서 고관절이 삐그덕 거리기 전까지는 고강도 스피닝을 즐겨했고, 밴쿠버로 오기 전 잠깐 복싱을 한 적도 있다. 공통점은 단 하나. 운동의 강도가 세기에 오래 할 수 없다는 것. 수영도 쉬지 않고 오래 하는 것은 엄두가 안 나서 인터벌만 해댄다. 가장 싫어하는 운동은 오래 달리기인데, 그래서인지 마라톤을 뛰는 사람들이 그저 경이롭다.
단기 프로젝트가 있으면 모든 역량과 정신력을 집중시켜 빠르게 나를 갈아 넣고, 일이 끝났을 때의 그 가득 찬 열을 빼내는 느낌을 좋아한다. 더 이상은 건강을 위해 하지 않지만, 한 때는 나의 특기가 밤샘이라고 생각했다. 과제가 있으면 늘 밤을 새워서 끝내면 될 일이고, 급할 때에는 2-3일 깨어 있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술자리는 원래 새벽 1시부터 재미있어지는 법이니, 4-5시까지는 마시고 첫 차를 타고 가는 혈기왕성함을 뽐냈다. 저녁 10시, 11시만 되면 저절로 눈이 감긴다는 '새 나라의 어린이' 유형의 사람들이 신기했다. 어쩌다 보니 지금은 신데렐라처럼 12시 전 호박마차를 타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짝꿍과 같이 살고 있는데, 늘 보면서도 신기하다. 재미있는 일은 죄다 밤에 일어나는데 왜 잠이 오지...?
엄마는 나를 두고 '폭식하듯' 공부하는 것 같다고 했다. 폭식까지는 아닌데 싶었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그리 보일 수 있겠다 싶었다. 젊음이 영원할 줄 알고 벼락치기의 효율성을 신봉하며 살았지만, 깊은 마음속으로 나는 알고 있었다.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성실함과 꾸준함이 어쩌면 내가 진정한 성장을 이루는 데에 반드시 갖춰야 할, 마지막 치트키 같을 것이라고. 새 나라의 어린이 버금가게 규칙적으로 생활하던 나의 친구는 나의 밤샘 능력을 부러워했지만, 나는 마라토너 같이 흔들림 없는 그의 꾸준함을 높이 샀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꾸준하게 이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임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무언가를 계속해나가는 사람들에게서는, 나 따위의 하루살이가 범접할 수 없는 간지가 뿜어져 나온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직함으로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 대신, 무언가를 10년, 20년, 그리고 평생 해왔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한다.
이런. 어쩌다 보니 내 천성과 반대되는, 마라토너와 같은 삶의 방식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 오버하지 말고, 매일 조금씩 무언가를 규칙적으로 해야 내가 망가지지 않고 끝을 낼 수 있는 일. 뭐, 물론 벼락치기하듯이 이 과정을 끝내는 사람도 있다. 어차피 정해진 성공 방정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마지막 마무리 단계에서는 다들 똥줄이 타다 못해 장이 끊어질 것 같은 절박함에서 부랴부랴 마무리를 해야 일의 매듭이 지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뭐든 끝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겠지. 다만, 내 건강이 이제 '폭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도전먹방을 할 수 있는 대식가처럼 대단한 위장을 타고나지 않았다. 젊음의 취기에 잠시 취해 나도 이 정도면 꽤 대단한 위장을 가진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었지만, 그것은 그저 젊음이라는 치트키가 하룻밤 작동해 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노화는 생각보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데에서 시작된다. 늘 먹던 음식을 양껏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예전의 양만큼 먹지 못할 때. 술을 먹고 다음날 회복이 더딜 때. 예전 생각으로 운동을 하다가 자주 다칠 때, 등등. 영역만 바뀔 뿐 똑같다. 예전에 하던 대로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 어르신들 중 칸트에 버금가게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자랑하는 분들이 많은데, 아마도 천성이 칸트와 비슷하여 형성된 습관일 수도 있겠으나, 나이가 들면서 규칙적으로 살지 않으면 몸이 힘들어지는 일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스프린터라고 떡하니 대문짝만 하게 적고 이 글을 시작한 나 조차도, 이제는 폭식이나 폭음, 불규칙적인 수면을 힘들다는 이유로 하지 않고 있기에.
이 과정을 시작하면서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다음 단계의 성장을 이루려면 혹은 내가 흔히 말하는 '역치'라는 것을 넘어서 비가역적인 성장을 이루어내려면, 내가 가장 힘들어하고 잘하지 못하는 일(즉, 꾸준히 조금씩 달리는 것)을 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라고.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이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야 드래곤볼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늘 묻어두고 살았지만, 작심삼일이라고 하기엔 길고, 마라토너라고 하기엔 짧은 그런 호흡이 지속되었다.
작년 봄 언저리, 낮이 길어지고 밤이 짧아지기 시작할 때, 나의 깊은 고민도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내 하루를 움직이는 동력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뭐 그런 류의 추상적인 질문들. 글쎄, 그 당시 마음이 힘들어서 그런 추상적인 것에 몰두한 것이었는지, 혹은 나만의 방식으로 '도피'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움직이는 동력에 관한 고민은 곧 '마라토너가 되어야 이 길을 마칠 수 있어'라는 이상한 테제에 부채질을 했다.
눈 무더기가 여기저기 쌓여 있는 계절, 오타와를 다녀왔다.
내 짝꿍보다 더 신데렐라 남편을 두었지만 본인은 올빼미에 가까운 선배와 밤새 수다를 떨며, 이 마지막 관문을 어떻게 넘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은 꾸준함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출퇴근하듯이 연구실을 나가서 몇 시간씩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글을 써야 한다는 그 꾸준함. 본인도 벼락치기를 더 좋아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꾸준함이 있었더라면 일을 좀 더 수월하게 했을 거라는 약간의 후회, 교훈, 그리고 덕담.
지도교수의 다른 제자도 만났다. P는 이미 학자로서의 길을 걸은 지 꽤 되어 테뉴어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지도 교수에 대한 이야기, 학과 욕 (공공의 적은 늘 관계를 두텁게 한다) 등등,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은 꾸준함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매일 몇 시간씩 꾸준하게 글을 써야 한다는. 그렇지 않으면 몇 백 페이지에 달하는 프로젝트를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러 시작도 못하게 될 거라고.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은 '마라톤'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40km는커녕, 4km를 거북이처럼 달리는 것도 버거워하는 내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관문을 마주하고 있구나. 결국은 이 일을 해내야, 결과가 있는 것이겠지. 지금까지 그랬듯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와 나 곧 갈릴 것 같아'라는 수준으로 노력을 해내야,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겠지. 내가 가장 힘들어하고 잘하지 못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생각이 뱅글뱅글 돌았다.
"우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모양이네."
오타와 여행기, 그리고 앞으로 3개월간의 타이베이 체류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Paula는 타이베이에 가본 적이 없다며 기후는 어떤지, 음식은 어떤지 등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었다.
"긴장되거나 부담스럽지는 않니? 최근 여기저기 비행이 너무 잦았잖아."
뭐, 13시간 30분이라는 비행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새로운 환경이 걱정되는 건 아니었고, 지금까지의 잦은 비행도 일에 관한 것이라 괜찮았다고 말해줬다. Paula도 동의했다. 신나 하는 것 같다고. 그러다가 물었다.
"근데 왜 갑자기 'consistency'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거니?"
어느샌가 '꾸준함'에 대한 동경이 집착이 되어 나를 슬그머니 짓누르기 시작했나 보다. 마치 그 '무기'를 손에 넣어야만 이 게임의 최종 보스를 깨부술 수 있다는 뭐 그런 식의 사고방식. Paula가 물었다.
"지난 4월부터 지금까지 넌 한 번도 '꾸준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8월부터 다시 일을 시작한 걸로 기억하는데, 너는 그 이후로 네가 꾸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깔끔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직장인은 아니기 때문에 매일 시계추처럼 이동하는 삶을 살진 않지만, 나름 유동성 속의 정해진 루틴에 따라 삶을 이어왔다. 약 7-8개월 동안 칼같이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략 정해진 시간에 결과물을 냈다. 크고 작은 이동과 행사, 발표,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 속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필드워크를 하는 중이니 이동이 잦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행을 늘 좋아했지만, 이제는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다가 엉덩이가 4개로 쪼개질 것만 같은 고통 때문에 예전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도시에 가는 것은 언제가 즐겁고 설렌다. 게다가 나는 시차에 큰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역시 꾸준함 보다는 변동성에 좀 더 탁월함을 보이는 건가. 꾸준함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동을 고려하면서 해야 할 일을 처리했고, 그 모든 이동이 단순히 여행이 아니라 연구의 일환이었고, 여독을 풀어야 하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걸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답을 했다. Paula가 다시 물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다음 여행이 두렵거나, 여행만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거나, 혹은 일상의 평화를 흩트리는 존재처럼 느껴지냐고.
그건 아니라고 답했다. 물론 꾸준히 앉아서 하루 8시간씩 글을 쓰고 하면 좋았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럴 단계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아름답게 만들어진 연구 결과물을 보고 그 모든 과정이 아름답게 일직선을 그린 것이라 생각하게 마련이지만, 사실 실상은 뒤죽박죽 그 자체다 (아름답게 일직선을 그리는 마법사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 같은 머글은 그럴 수 없어 ㅠ). 이론 좀 생각해 보다가, 데이터 때문에 머리털 쥐어뜯고, 기존 연구 살펴본다고 또 한참 리딩만 하다가, 어떤 날은 일이 안 되고 몸이 안 좋기도 하다가, 또 내야 할 과제가 다가오면 머리털 쥐어뜯으면서 글이랍시고 끄적이다가, 뭐 그런다. 별로 꾸준해 보이지는 않지만 회사처럼 정해진 프로토콜이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다.
Paula가 다시 묻는다. 그래서 2023년 8월부터 2024년 1월까지, 일을 다시 시작할 때 각별히 힘들었다든지, 다시 생활궤도를 유지하기가 힘들다든지, 뭐 그런 류의 어려움이 있었냐고. 없었다, 고 대답했다 (연말에 쉬었던 것은 논외로 치고 ㅎㅎ).
또 질문이 꽂힌다. 근데 왜 스스로 consistency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냐고.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냥 장거리 달리기는 내 적성에 안 맞고, 근데 다들 하루에 몇 시간씩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규칙적으로 글 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럼 나는 그 부분이 내 평생의 약점이니 보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뭐 이런 식의 사고방식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끄덕끄덕) "그런 것 같아. 근데 우리 꾸준함(consistency)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해보자."
Paula는 내가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형성한 consistency에 대한 나만의 정의와 그에 기반한 강박을 해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랍비와 같이 고요한 현명함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할머니 Paula의 양 볼 옆으로 늘어진, 버스 손잡이 스타일 귀걸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꾸준함(consistency)이란 늘 점검하고 보완하는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야 (checking-in and reassuring). 네가 하루에 쓸 수 있는, 혹은 일주일에 쓸 수 있는 에너지 레벨을 늘 체크해야 해. 만약 몸이 피곤하고 힘들면 하루 쉬어야지. 그다음 날도 아프면 또 하루 더 쉬는 거야. 그러면서 스스로한테 늘 물어봐. "내가 뭘 원하지? 내 몸이 뭘 원하지?"라고. 쉬는 걸 두려워하면 안 돼. 휴식 없이 달리다가 아주 퍼져서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보다, 하루씩, 이틀씩, 쉬어가는 게 훨씬 낫단다.
네 입으로 말했잖아. 8월부터 "꽤 꾸준하게" 일을 해 왔다고. 물론 여기저기 다니면서 약간의 방해요인 (interruptions)은 있었겠지만, 그건 네 일과 관련된 것이니 방해요인이라고 할 수도 없지.
꾸준함이란 죽었다 깨나도 하루 8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걸 말하는 게 아냐. 꾸준함은 보다 넓은 '스펙트럼'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해. 늘 점검하고, 네 몸이 알리는 '정보'에 귀 기울이고 적절히 반응하는 것이지. 그게 꾸준함이고, 꾸준함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야.
게다가, 꾸준함이 만약 방해를 받아야 한다면, 그건 과도한 스트레스나 번아웃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나 여행을 통해서 이뤄질 때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consistency needs to be broken not by stress but by changes, travels, and new environments). 역설적으로 새로운 환경, 여행, 그리고 변화를 통해 꾸준함을 더 잘 이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너의 케이스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이나 큰 변화,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 등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너는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구나. 그렇다면 짧지만 잦은 휴식, 여행, 그리고 새로운 환경 등으로 변주를 주는 것은 일종의 '재충전을 위한 휴식 (break to refuel)'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이건 너에게 아주, 아주 중요한 부분이야."
우와아.
이제와 새삼스럽지만, Paula와의 대화는 언제나 고요하고 우아하게 놀랍다. 상담이 진행되는 중간에는 호수 정중앙에서 파장이 번지는 것 같은 Aha moment를 주고, 상담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 깨달음의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서 상담실을 나올 때마다 미친 듯이 휴대폰 메모장에 떠오르는 생각을 휘갈긴다. 이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가둬두고 싶어서. 그리고 늘 짝꿍이 데리러 온다는 것을 만류하며 나 혼자 귀가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 소중한 순간을 장기 기억으로 만들기 위한 나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어쩌면 잠 안 자고, 밥 안 먹고,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을 추앙하는 문화에 절여졌던 내 일부가 같은 논리를 ctrl+c, ctrl+v 한 채, 꾸준함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마라톤에 능한 사람들이 별 것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여전히 무언가를 묵묵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의 우직함을 존경한다. 다만, 내가 꼭 마라토너가 될 필요는 없다는 말을 조금 더 편안하고 진심으로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인터벌로 여러 번 뛰면 42.195km에 도달하는 건 똑같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