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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Jun 29. 2024

나의 '불안이'를 위한 소파

인사이드 아웃 2

주의: 인사이드 아웃 2는 시도 때도 없는 눈물과 콧물을 유발합니다. 스포... 일 수도 있으니 스포주의!! 





지루한 초여름. 

연구실에 처박혀서 오로지 밥시간 아니면 산책 시간만 기다리는 밴쿠버 고시촌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짝꿍도 나도 알 수 없는 짜증과 답답함이 단전에서 치밀어 오르는 걸 보고 머리에서 열을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신과 의사 작가님의 귀여운 그림체를 곁들인 영화 리뷰를 본 것이 떠올랐다. 한참 전, 한국에서 '슬픔'이가 어쩌고, '기쁨'이가 어쩌고, 하던 영화의 속편인 모양이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전편도 보지 않은 채 요약본 영상만 후루룩 보고 영화관을 찾았다. 아무리 그래도 누가 '기쁨'인지 '슬픔'인지, 이름은 알아야겠기에. https://brunch.co.kr/@ninuhari/94#comments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라서 그런지 러닝타임은 짧았지만, 주변을 보니 제작진이 성인 관객을 노린 것이 틀림없었다. 칭얼거리는 아이들, 신나서 재잘대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눈물을 훔쳐내고 코를 훌쩍이는 엄마아빠 관객들이 내 주변에 즐비했다. 그 틈을 타 나도 모처럼 줄줄 울었다. 관람 후 리뷰를 좀 찾아봤더니 오열했다는 글도 많아서 내심 안심이 되었다. 나만 꼴사납게 질질 운 것은 아니군. 


영화 소개 글에서 '불안이'를 새로운 빌런 정도로 소개한 경우도 간혹 보였었는데, 웬걸, '불안이'는 너무 귀엽고, 안쓰럽고, 애착이 많이 가는 캐릭터였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 Maya Hawke - 가 열연을 해서 더 애정을 느꼈던 것 아닐까). 큰 눈과 가로로 길게 늘어진 입. 눈은 크지만 공백도 어마어마해서 펭수의 눈처럼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그것. 웃상인 것처럼 입은 크지만 정작 웃는 것보다, 계획을 짜는 데에 혹은 에너지 드링크 6캔을 한 입에 털어 넣기에 더 적합한 큰 입. 각종 시뮬레이션을 돌리느라 바빠서인지 머리는 폭탄 꼬리 같고, 묘하게 불편한지 줄무늬 폴라티의 목 부분을 계속 손으로 붙잡아 늘리고 있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는, 그런 아이였다. 


전편에서는 보다 일차원적인, 그렇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감정 (기쁨, 슬픔, 공포, 분노, 까칠함)을 다뤘다면, 속편은 주인공 Riley가 사춘기가 되면서 생긴 보다 복잡한 감정을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불안, 부끄러움, 무력감, 질투를 대변하는 캐릭터들의 색깔도 쨍한 원색이 아니라 색 조합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는 색 (예: 주황색, 분홍색, 푸르딩딩한 색 등)이 아닌가 생각해 봤다. 


1시간 40분 남짓한 러닝타임 내내 Paula와 나눴던 숱한 '기억 구슬'이 내 '장기 기억 저장소'에서 퍼올려지는 느낌이었다. 제작진들이 심리학자나 상담가들의 자문을 많이 구했음을 확신하게 만드는 대사나 시각적 장치들이 많이 보였다. 주옥같은, 아니, 어쩌면 끔찍하게 익숙한 대사와 장면들이 나의 장/단기 '기억 구슬'을 찬찬히 소환했다. 


 



I'm not good enough 


"I'm a good person (나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투명 크리스털 자의식 나무가 뜯겨나가자, 그 자리를 오렌지빛 "I'm not good enough(나는 아직 부족해)" 자의식 나무가 대신한다. Riley의 결연한 듯 그렇지만 한편 원망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오디오 효과를 차치하고서라도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무언가를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 선생님과 동료, 친구들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마음,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등등. 너무도 익숙한 그 "I'm not good enough"의 울림. 그것은 바로 Paula와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녹여보고자 했던, 견고하디 견고한 나의 자의식이 아니던가 (https://brunch.co.kr/@boyish-aaron/38).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라고 했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열등감과 욕심이었다. 


나이 차이가 적지 않게 나지만 월등히 우수했던 동생을 둔 덕분에, 열등감은 나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피하지방 같은 감정이었다. 가뜩이나 지기 싫어하고 스스로를 향한 욕심이 많은 편인데, 다른 곳도 아니고 의식주를 같이하는 공간에 똑똑이가 있으니 욕심이 열등감으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나에게는 왜 동생 같은 우수함이 없나,라는 자책과 셀프 후려치기, 그리고 더 고군분투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아무도 나에게 "왜 동생만큼 똑똑하지 않니"라고 면전에서 묻진 않았지만 일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비교였고, 그게 성적표라는 가시적인 비교지표로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해 버리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상당히 물들였다고 생각한다. 지역 수재였던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모를 보면서, 나도 그 아이만큼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한 번도 "공부해라" 혹은 "너는 왜 (쟤와 다르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주변 공기로 흘러나가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내 목표는 당연히 그 아이와 비슷한 수준의 탁월함이 되었다. 같은 학원을 다닐 때에도, 내 앞에서 입이 마르도록 동생을 칭찬하는 원장들의 태도가 나에겐 어떻게 다가왔을까? 내가 어린 동생에 비해 덜 우수하다는 것이 퍽 자존심 상했고, 그 이야기를 왜 내 앞에서 하는지 이해를 못 하던 나날이었다. 여담인데, 난 그래서 황희정승의 검은 소, 누렁소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말 못 하는 짐승이라도 면전에서 비교하지 말라는 아주 뜻깊은 교훈이 담겨있으니. 


"I'm not good enough"가 나의 감정 제어판을 잠식한 것은 고등학교 때 절정에 달했다. 당시 부모님이 원하던 진로와 나의 진로는 퍽 달랐다. 엄마는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 등등 당대 여성 리더들의 자서전을 많이 사주었었는데, 그걸 읽으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키워나갔다. 어른이 되면 그렇게 큰 세계를 경험해 볼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던 아이는 외국어에 흥미를 붙였고 그렇게 이 언어 저 언어 배워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정상회의를 주로 담당하는 어느 동시통역사의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언어로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이어주는 것이 참 의미 있고 멋져 보인다고 말하던 엄마도 기억난다. 엄마가 이런 자잘한 에피소드를 기억할 진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던 나에게 언젠가부터 외국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직업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시통역사라든지 외교관이라든지 뭐 그런 것들. 근데 고등학교 진학을 했더니 난데없이 의사가 되면 좋겠다네? 육성으로 "읭" 소리가 나왔다. 뭐야, 의사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같았으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칼 같이 말하고 내 길 갔을 테지만, 아직 자신의 기질이나 성격도 잘 모르고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15-16살의 내가 주변 어른들의 말에 휩쓸리지 않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교육과정상 문, 이과 구분이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과를 정해야 하는 시스템이었는데 결국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이과를 선택해 버렸다. 내 고난의 행군, 즉, "I'm not good enough"라는 자의식 나무는 이때부터 무럭무럭 뿌리를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모의고사 성적이 큰 변동없이 전국 1% 정도는 나와야 의대를 가든가 말든가 하겠지. 외국어를 너무 좋아했던, 그렇지만 의대 진학할 성적은 죽었다 깨도 나오지 않는 어느 여고생은 언젠가부터 식사를 거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 정신을 지배하는 그 생각은 아마 이때부터 배양되었던 것 아닌가 싶다. 내가 밥 먹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 밥 먹을 시간이 어디 있어, 공부해야지. 아침부터 자식 둘과 남편의 아침을 건사하고 미친년 널뛰듯이 자신의 직장으로 출근했다가, 퇴근해서 또 가족과 집안을 챙기며 쉴 틈 없이 움직이는 엄마. 밤 10시에 마치든, 새벽 2시에 수업을 시작하든 (믿기 어렵겠지만 진짜 그런 곳이 있다), 힘든 내색을 하진 않지만 졸린 눈을 억지로 떠 가며 나를 실어 나르느라 바쁜 아빠. 비싼 학원 수업료. 그리고 두 아이의 교육비 외에는 지출을 아끼는 부모님. 아이도 안다. 아직 직접 돈을 벌어보진 않았어도 돈 벌기 쉽지 않다는 것 잘 안다. 내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은 부모의 피를 뽑고 살을 잘랐기에 가능하다는 것도 사무치게 안다. 


아이는 죄스러웠다. 가시적인 성과가 바로 나오지 않는 것도 죄스러웠고, 그래도 먹고살겠다고 3시 세끼 밥을 먹는 것도 죄스러웠고, 홍차와 커피를 섞어서 대접으로 마셔봐도 쏟아지는 졸음이 죄스러웠다. 차라리 나에게 왜 그 정도밖에 안 되냐고 화를 내줬음 했다. "공부해라" 소리 입 밖에 단 한 번 내지 않은 채, 마치 자기가 짊어진 운명의 수레바퀴인 양 묵묵한 희생으로 일관하는 것이 더 내 목줄을 옥죄었다. '아직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너무도 부족한데. 이 점수로는 어림도 없는데. 더 열심히, 더 잘해야 하는데'라는 사고회로는 내 안의 '불안이'가 제어판을 잡고 있어서 만들어진 생각일 테지. 언젠가부터는 "I'm not good enough"라는 목소리가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느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단계로 발전했다. 내가 밥을 먹을 자격이 있나. 내가 잠을 자도 될까?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을 끄고 침대로 갈 수가 없는 날이 이어졌다. 불을 켜고 자거나, 새벽 3-4시까지 자지 않고 버티는 일이 흔해졌다. 잠은 무슨 잠이야, 성적도 안 나오는데. 그렇다면 새벽 3-4시까지 굉장히 효율적으로 공부를 했느냐. 당연히 그것도 아니었다. 몸만 일찍 축내는 지름길을 걸었을 뿐. 척추 팔아서 공부해 봤자 의미 없다는 것을 한참 뒤에 깨달았으나 그때 내 나이는 더 이상 10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척추 팔고 머리털 팔아 공부하겠다고 버티던 그 시절의 나는 아직 그런 것들을 알기엔 애처로울 정도로 어렸다. 


보통 고3이 되면 고1 때 맞춘 교복이 맞지 않아서 아예 살 때 한 치수씩 크게 산다고 들었다. 실제로 내 친구들은 고3이 되면서 엽기떡볶이로 스트레스를 풀다가 점점 살이 오르더니 교복 치마 주름을 트는 상황까지 갔다. 밥을 거르기 시작했던 나는 살이 빠지고 탈모가 오더니, 교복 치마를 두 번 접어서 입어도 허리와 치마 사이에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몸이 허접해지고 말았다. 그럴 밖에. 그때 나는 하루에 1끼만 먹었으니. 


그래서 그놈의 중요하고도 중요한 대학은 어딜 갔냐고?

나는 당연히 의대에 갈 성적을 받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성적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하는 게 없었다. 수능을 다 치르고 느낌적인 느낌으로 망했음을 직감하면서 집에 돌아오는 길, 재수를 결심했다. 단, 이과가 아닌 문과로 시험을 다시 치러볼 작정으로. 당연히 극심한 반대가 뒤따랐다.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 선생님, 과외 선생님, 내가 아는 모든 선생님들이 나를 뜯어말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교육과정이 바뀔 시점이라 내가 재수를 해서 다음 해 수능을 치고 원서를 낸다면 내신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른이 되면 무모한 도전보다는 안전빵을 선호하게 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하나같이 "다시 도전한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이유로 나를 말렸다. 하지만 나는 정말 다 상관없었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정신을 덜 차렸는지) 지금보다는 잘할 자신 있다는 자뻑도 좀 있었다. 이대로 점수 맞춰서 대학을 가면, 내가 하고 싶은 길에서 최선을 다해보지 못한 채, 내가 원하지 않던 길에서 내가 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평생 살아갈 것만 같았다. 최소한 내가 좀 더 잘 할 지도 모를 길, 아니,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은 길에서 노력은 해보자고 생각했었다. 


의대는 이미 물 건너갔으나 여전히 큰 리스크를 선뜻 감당하기 어려웠던 부모님은 사범대를 추천했다. 당시 지역 국립대 사범대에 수시로 이미 합격을 했었고 최종 면접만 남아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앞으로 걸어갈 길이 구만 리인 아이에게, 아니, 구만 리가 아니라 그 길이 구십만 리가 된다 해도, 선생님이란 직업은 결코 갖고 싶지 않은 직업이었다. 의사가 될 깜냥인지 아닌지는 몰랐어도 선생님은 죽었다 깨도 되고 싶지 않았음을 아이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참고로 우리 엄마는 선생님이었다). 부모님께 '나는 선생님이 될 자신도 생각도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그들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담임 선생님뿐 아니라 진학 담당 선생님, 담당 과목 선생님의 닦달이 여러 날 이어졌지만 나는 너무도 확고했다. 면접날 아침, 정말 가지 않을 거냐는 부모님의 말에 "응, 안 가요"라고 대답하던 장면이 아직 기억난다. 반 친구들 중 하나는, 내가 사범대 수시 면접을 거부했다는 이야길 듣고 "배가 불러 호강한다"라고 말하고 갔다.


속 모를 사람들은 마구 말하고 다니겠지만 그런 것 따위 1도 관심 없었다. 그때의 나에겐 더 중요한 목표가 있었으니까. 실력은 없으면서 이상향만 하늘 높이 두고 있던 소녀 같아서 나도 내가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그때 퍽 처참한 마음이었다. 탁월한 똑똑함과 성적을 자랑하던 내 동생은 부모님께 일말의 걱정도 끼치지 않은 채 자기의 일을 묵묵히 아주 잘하고 있었고, 나로 인해 엄마아빠의 걱정이 늘어났을 테니 끝없는 죄스러움이 또 내 마음을 잠식했다. 가장 처참했던 부분은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었던 내 꿈이 공기 중에 흩어진 것. 서울은 뭐랄까, 그곳은, 약속된 자유의 땅, 같은 곳이었다. 지방 사람들의 서울 동경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 서울은 보다 다면적인 의미를 지닌 일종의 상위 개념이었다. 수시 및 논술 시험을 치르러 KTX로 서울을 왔다 갔다 할 때면 서울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저 멀리 보이는 'Yonsei' 마크가 새겨진 빌딩이 있었다. 연세재단세브란스 빌딩이라는 사실은 그때 몰랐고, 그저 그 마크 하나가 "자유를 갈망하는 자, 나에게로 오라"와 같은 종소리 같았다.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 내가 살던 그 지방 도시에 대한 답답함, 더 큰 곳을 향한 오래된 갈망, 등이 잘 버무려진 채 나의 서울 바라기를 더욱 부채질 해댔다. 그래서 지역 사범대에 진학하라고 권하는 부모님이 더 원망스러웠다. 나는 서울을 가야 하는데. 저 약속된 자유의 땅으로 가야 하는데. 그때만 해도 지금과 달리 지방이 소멸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지역 거점 국립대의 사범대 졸업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 대학은 한 때 드높은 명성을 날리던 곳이었고, 그 대학 졸업생들이 고려시대 호족처럼 그 지역을 꽉 잡고 있었으니 그냥 작고 아담한 정원 같은 땅에서 평생 편하게 살려면 그 대학 졸업장을 따는 것이 나았을 테다. 하지만 나는 '서울'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더 크기 위해서 더 넓은 곳이 필요하다는 1차원적인 생각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이 더 강하게 작용하였다.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나에게. 내가 시시하지 않다는 것을 (I'm good enough). 나도 넓은 바다에서 헤엄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는 '서울'이 바로 그 징표였다. 


결론적으로 나는 원하던 문과로 전과하여 재수를 했고, 원하던 대학의 원하던 학부를 갔다. 모두가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저을 때, 나는 그저 속으로 다짐할 뿐이었다. 보여주겠다고. 내신에 불이익이 있든 없든,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남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으로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매일같이 각오를 새로이 했다. 새벽같이 재수학원으로 '출근'해서 자정이 다 되어서야 '퇴근'하는 삶을 살았으니, 그 해 엄마와 동생의 얼굴을 많이 보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내 픽업을 담당한 아빠의 뒤통수만 매일 2번 보았을 뿐. 개인적으로 문과에서 이과로 전과하여 대입을 다시 도전한다는 건 아주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차원이 다른 난이도의 수학 그리고 과학탐구에서 좌절할 가능성이 너무 높다. 하지만 이과에서 문과로 오는 경우도 생각만큼(?) 쉽진 않았다. 남들은 3년 하고도 1년을 더 준비해서 치르는 사회탐구 영역을 내가 1년 만에 처음부터 새로 하자니 막막했다. 무엇보다 '두 번 실패할 수는 없다'는 명제가 온몸의 세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름이 지나면서 오장육부가 쫄려왔다. 긴장이 극에 달해서 11월이 되니까, 사과에 빨대를 꽂아서 마시겠다는 기염을 토하고 있더라. 


의치한의대 및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대한 열망은 재수 시장을 먹여살리는 큰 원동력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재수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인식이 이미 그 당시에도 팽배했었다. 한 반에 80명 남짓한 학생, 그런 반을 20개 넘게 보유한 대형 재수학원은 마치 사학재단을 방불케 할 정도로 운영되었다. 게 중에 재수에 성공하는 학생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반마다 실력 차이가 크기 때문에 뭉뚱그려 말하긴 어렵지만, 평균적으로 80명 정원 한 반에서 자기가 목표로 한 대학을 가는 애들은 5명 남짓이다. 대부분은 삼수까지 할 여력이 되지 않아서 혹은 너무 힘들어서 그냥 점수 맞춰 간다. 난 그 5명 안팎의 '선택받은 자'가 반드시 되어야만 했기에 눈을 바닥에 내려 깔고 공부만 했다. 2-3월 경, 다들 뼈라도 갈아낼 것처럼 엄청난 눈빛과 대단한 각오를 다진 채 재수를 시작해도, 한 달 뒤 벚꽃이 채 지기도 전 서로 친해지고 연애하고 싸우고, 아주 난리 법석도 그런 난리법석이 없다. 그렇게 어울리다 보면 흐름이 흐트러지는 건 시간문제다. 재수 1년이 긴 것 같지만 돌아서면 어느새 11월 수능이 온다. 1-2달 슬럼프 겪는 건 그야말로 사치였다. 사람 좋아하던 나는 각오가 흐트러지는 것이 싫어서 친구들도 최대한 늦게 사귀고, 나중엔 반도 바꾸고, 또 나중엔 아예 밥을 걸렀다 (구내식당이 있었다). 밥 먹다가 친해지면 나중에 모른척하기 더 힘들어지니까. 그리고 밥 먹을 시간에 책 한 자라도 더 봐야 하니까.  


내 뇌가 '위기 상황'을 인지하면 두 가지 명령을 내리는데, 그건 바로 "먹지 마라, 자지 마라"였다. 

그 당시 그놈의 '성공'만을 염원하던 나에게 먹고 자는 일은 사치라고 생각했고, 매일같이 부족한 부분을 찾아 보충하고 외울 생각에 심리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마음이 아프다. 허공에다 숨을 불어넣는 것보다도 더 공허한 이야기겠지만 그 때의 나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가 어떤 성적을 받든 어떤 대학을 가든 밥 먹는 일에 자격이 필요하지 않고 잠자는 일에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18살의 내가 믿을 때까지 끊임없이 말해줄 거다. 시간이 흘러 이런 생활패턴을 눈치챈 엄마의 걱정은 잔소리쯤으로 치부했고,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들의 걱정도 귓등으로 들었다. 정말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성공'을 위해 자기 학대 정도는 우습게 여기는 그 사고회로를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장착했더니, 이후의 내 삶에서 여차하면 그 사고회로가 가동되더라. 단순히 건강을 망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 마음이 아주 오랜 시간 서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뭉개지고 있었다. 세상에 밥 먹을 자격, 잠 잘 자격 같은 게 어디 있나. 그냥 먹는 거고 그냥 자는 거지. 지금이라면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밥과 잠에 누가 자격을 붙이냔 말이다' 라며 일갈하겠지만, 바로 그 짓을 내가 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발상은 내 자존감을 뿌리부터 갉아먹기 시작했다. 성공 조건부적 마음가짐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나'라는 개인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성공한 모습만이 내 모습일 테고,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은 내가 아니거나 혹은 밥 먹을 자격도 없는 인간이 되겠지. 


그래도 세상에 다 좋은 일 없고 다 나쁜 일 없다고 했던가. 

나를 키우는 바람 같은 존재였던 열등감은, 그리고 "I'm not good enough"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나의 성장에 일면 도움을 주기도 했다. 기를 쓰고 서울로 갔더니, 뛰어난 인간들이 좀 많아야 말이지. 지지 않으려고, 얕잡아 뵈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노력하던 밤들이 숱하게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내가 가진 그릇보다 더 크게 성장한 적도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 역시 시험과 경쟁의 연속이었기에 열등감은 늘 내 뒷목을 잡아챌 준비를 하고 있었다. 20대는 시험 준비, 대학원 진학, 그리고 유학 준비와 같이 경쟁과 자기 검열을 일상화하는 삶으로 점철되었다. 당연히 열등감은, 나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그 목소리는, 늘 내 등가죽에 붙어있다가 잊을만하면 내 뒷목을 슬슬 긁으며 채찍질을 가했다. "네가 지금 밥 먹을 시간이 있는 줄 알아?", "네가 지금 그 실력으로 잠이 오니?"와 같은 속삭임과 함께. 어느 순간부터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상수값이고, 노력하다 어디 하나 고장 나거나, 살이 빠지거나, 피를 보거나 정도는 해야 '제대로 된' 노력을 했다며 스스로를 인정하는 내가 있었다. 필기시험 준비를 하느라 하루 18시간 공부를 하면서 필기구 2대 정도는 부러뜨려야 뿌듯해하는 내가 있었고, 크고 작은 시험마다 조금은 볼이 야위어야 만족하는 내가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성인 아마추어 콩쿨이지만 스스로에게 뿌듯하고 싶어 무척이나 열심히 피아노 연습을 했었다. 거기서 만족하면 좋았으련만, 나는 기어이 새끼손톱이 부서져 피가 나는 꼴을 보고서야 뜨는 해를 이마로 받으며 집으로 돌아갔었다.






'불안이'가 제어판을 장악하고 끊임없는 시뮬레이션을 생성해 내며 Riley의 교감신경을 파국으로 몰아붙일 때, 아이는 결국 패닉을 맞이한다. 하키 경기장 페널티 룸에서 Riley가 겪었던 증상은 참으로 익숙하여, 허구적 인물이니(게다가 애니메이션이니) 정말 누군가 아픈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아이가 많이 안타까웠다. 과호흡, 흉통, 두통,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박동, 자율신경계가 고장 났나 싶을 정도로 흘러내리는 식은땀, 그리고 폐로 산소가 충분히 들어오지 않는 바로 그 느낌. 내가 지금 4D 영화관에 와 있나, 순간 생각했다. 


'불안이'가 미쳐 돌아가는 바람에 감정 제어판 주위로 돌풍이 일어났다. 다른 감정들은 근처에 갈 엄두도 못 내고 벌벌 떨고만 있다. "I'm not good enough" 자의식 나무를 뜯어버리고 어렵게 되찾아온 "I'm a good person" 자의식을 새로 갖다 연결하지만 '불안이'가 일으킨 오렌지 돌풍과 미쳐 돌아가는 감정 제어판이 이미 정상의 범주를 넘어선 듯하다. 여러 번 튕겨났다가 겨우겨우 '불안이'의 돌풍 속으로 들어간 '기쁨이'가 '불안이'를 마주하는 장면에서 나는 꼴사납게 으앙 울지 않게 위해 입을 앙 다물어야 했다. 


제어판에서 손을 떼지 않는, 아니,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손을 뗄 수 없어진 것 같은 '불안이'의 눈은 공허했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 마냥 제어판 스틱에 손을 붙박아두고 있던 '불안이'는 돌풍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 '기쁨이'를  쳐다보지 못한다. 어딘가를 쳐다본다기보다 그저 먼 피안을 바라보는 눈으로 한참을 얼어있던 '불안이'. 제 몸도 가눌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이'의 커다란, 그렇지만 공허한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자기가 제어할 수 있는 선을 이미 훌쩍 넘어버려 어찌할 바 모르는 '불안이'. 눈물조차 시원하게 흘리지 못하는 '불안이'. 큰 눈과 늘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하던 큰 입이 더 처연해 보였다. '불안이'는 숨 쉬는 것도 잊은 듯했다. 


수많은 가상의 시나리오(projections)를 만들어서 plan b, plan c,... plan z까지 만드는 '불안이'였다. "만약에 (what if)"라는 말을 달고 사는 '불안이'였다. 내일 발표에서 실수하면 우스워보일거야. 선생님이 내가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할 거야. 이번 초안을 잘 써야 좋은 추천서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이번 페이퍼를 잘 써야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수많은 학자들 앞에서 너무 바보같이 보이면 평생 쪽팔릴 거야. 좋은 대학을 가야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좋은 논문을 써야 나의 선생님들이 뿌듯해하실 거야...... 


감정 제어판을 장악한 '불안이'는 끊임없이 준비를 한다. "We need to be PREPARED"라고 외치며 준비에 준비,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기쁨이'가 그려낸 행복한 시나리오가 생성되자, '불안이'는 준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불안해한다. 에너지 드링크 6캔을 한 번에 따서 들이키는 불안이. 쥐어뜯긴 것 같은 폭탄머리로 다니는 불안이. 끊임없이 if를 반복하는 불안이. 흥분하면 사고회로의 어딘가가 자극되어 미친 듯이 후속대책을 만들어내는 불안이. 그렇게 익숙한 '불안이'는 스크린이 아닌 바로 내 안에 있었다. 


"우린 라일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 선택할 수 없어(We don't get to choose who Riley is)"라는 '기쁨이'의 말에 '불안이'는 힘겹게 제어판 스틱에서 손을 뗀다. 그리고 돌풍에 처맞고 지쳐 쓰러진 '불안이'의 한마디. "미안해. 난 그냥 라일리를 보호하고 싶었을 뿐이야 (I'm sorry. I was just trying to protect her)". 

그랬겠지. '불안이'는 그저 좀 더 잘하고 싶은 그 마음에 귀를 기울인 것뿐이었겠지.


나를 지키려고 수많은 날을 불안으로 지새우며 '준비'했건만, 결국 내 역치를 몰라서 나를 오렌지 돌풍 속으로 밀어넣고만 나날들. 나를 지키지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아야 했던, 그렇지만 속절없이 하늘이 맑아 더 속상했던 나날들. 내가 나를 몰라 더 불안했던 나날들. 내가 괴로워서라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고자 하였으나 진정 자유로운 적 없었던 날들. 나를 평가하는 사람의 시선과 한숨 한 번, 그리고 그들의 말과 글에 내 모든 감각 레이더를 동원하던 날들. 그래서 결국 내가 아프고 말았던 나날들. 


모르긴 몰라도, 제어판 앞에서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내 '불안이'의 손을 떼 준 것은 '기쁨이'가 아니었다. 이미 겪었던 힘듦을 또 겪을 수 없다며 '공포(fear)'가 발 벗고 나서준 것일 수도 있고, 나의 "I'm not good enough" 자의식을 누구보다 먼저 짚어내 준 Paula 일수도 있겠다. 


'기쁨이'의 대사와 꼭 같은 말을 나도 Paula에게 했었다. "불안을 없애는 법을 모르겠어 (I don't know how to stop anxiety)"라고. Paula는 불안은 없어지지도 않고 없앨 필요도 없다고 알려주었다. 없애려고 감정을 억압해 봤자 (bottle up), '기쁨이', '슬픔이', '분노'의 감정이 갇혀있던 유리병에서 탈출하면서 더 큰 혼란만 불러일으킬 테니. 그저,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물어봐주라고 했다. 영화 말미에서도 '불안이'가 다시 말이 많아지자 '기쁨이'가 '불안이'를 소파로 안내하는 장면이 나온다. 덜덜덜 안마 의자에서 노곤해지는 '불안이'.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고 몸에 들어간 힘을 빼는 '불안이'. Paula도 나에게 똑같은 말을 했었다. 산책을 원하는지, 커피를 원하는지, 여행을 원하는지, 운동을 원하는지, 음악을 원하는지, 등등, 나 스스로에게 늘 물어보고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 훌륭한 대화 말미에 '슬픔이'의 얼굴을 한 채 조심스럽게 묻는 내가 있었다. 

만약 내가 얄팍한 자기 합리화에 빠져 나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거라면? 

더 열심히, 더 독하게 했다면, 더 빨리 그리고 더 좋은 결과를 냈을지도 모르는데, 나의 게으름과 나약함, 그리고 약해빠진 의지박약이 나를 붙잡고 있는 거라면? 

성장과 자기 학대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모르겠다면 ... 

어떻게 해...?


'기쁨이'가 곱게 나이 들면 저런 모습일까, 싶은 Paula가 말했다. 

누군가에게는 'no pain, no gain'이 맞겠지만, 나에게는 'no push'가 곧 성장이라고. 나의 30대는 10-20대와 다를 수 있다고. 그 모든 일을 겪고 나는 성장을 거듭해 왔다고. 그러니 나는 비로소 "I'm not good enough"라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목소리에 사로잡히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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