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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Apr 15. 2024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누구는 온갖 유리 그릇이 다 떨어져 박살이 났다고 했고, 누구는 책이 떨어지며 산을 이뤄 문이 열리지 않았다고 했다. 


내 방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서랍장이 다 열려서 내용물이 빠꼼히 보이는 정도였다. 어차피 높은 선반이 없고 애초에 물건을 많이 두지 않았기 때문일테다. 책상 위의 간단한 장식품들이 내동댕이 쳐졌다며 조용히 엎어져 있었다. 욕실 선반 물건들도 큰 샴푸통 하나만 수직낙하를 시도, 성공한 것 외에는 다 괜찮았다. 실내 바닥이 타일로 되어 있는 구조라, 유리병 하나라도 떨어져서 파편이 널부러져 있을 줄 알았건만, 진도 7이 넘는 지진을 겪은 방 치고는 나름 온화했다. 


동네 고양이 카페를 찾아가 사장님께 무사하셨었냐고 안부를 물었다. 오전 시간에는 카페 구석구석에서 잠들어 있을 고양이들이, 지축이 흔들리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마징가 귀를 하고 동공을 키운 채 앉아 있었다고 했다. 영문을 알 길 없는 흰검이 고양이에게 궁디팡팡을 선사하며 물어봤다. "무서웠지?" 


다른 단골 카페와 식당 사장님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이름 모를 만두 가게 사장님, 작은 사원의 신자들, 학교 학생들, 등등. 다들 "괜찮았지만 무서웠다"라고 그날을 기억한다. 지진에 이골이 나 있는 대만 사람들에게도 무서운 지진이었다니. 새삼 그 위력을 가늠해 봤다. 


착한 사람이라고 좋지 않은 일을 피할 수 있으리란 법은 없지만, 착한 사람들이 그런 일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길 속절없이 바라본다. 





대만에 도착한 첫 주 어느 날. 

기숙사 방 침대에 누워있는데 문득 '이 침대가 물침대였던가'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흔들흔들.

워낙 오래된 건물이고 침대 매트리스 상태도 좋지 않았기에 내 몸으로 반동을 주어서 생긴 움직임인가 생각했지만, 1초 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지진이구나, 싶었다. 


지진을 '겪어봤다'라고 하기에 그간 내 경험은 너무 일천했다. 2016년 9월 경 발생했던 경주지진을 서울에서 미약하게나마 느낀 것을 제외하고, 내 인생에 지진은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밴쿠버도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하긴 하는데, 7년 살면서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으니 캐나다 서부연안은 일본이나 대만만큼 지진이 자주 발생하지는 않는 듯하다. 물침대 매트리스를 느끼며 바로 구글 검색을 했더니 1분 전 대만과 오키나와 사이 바다 깊은 곳 어딘가에서 진도 4.0 정도의 지진이 발생했단다. 지진이 잦은 이 지역은, 이번에 진도 7.4의 큰 지진이 발생한 대만 동부 화롄현 부근이다. 


몇 초 흔들리다 말릴래, 일으키던 몸을 누이며 순간 방 안을 돌아봤다. 

재난대비 용품이 하나도 없었다. 부엌이 있는 공간이 아니니 스프링클러도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최소한 가스 누출로 화재가 날 위험도, 터지는 물줄기에 전자제품이 망가질 가능성은 낮을테니까. 엘리베이터 없이 4층에서 1층으로 뛰어내려 가야 하는데 그것도 다행이라 생각하면 될까, 싶었다. 재난 시에는 그간 누리고 살았던 모든 문명의 이기가 위험으로 변한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가능하면 두 발을 빠르게 놀려서 건물을 탈출한 뒤 지하철이나 방공호 쪽으로 뛰어야 한다. 영화 Zombieland에서 주인공 Jesse Eisenberg는 좀비에게 쫓기며 이렇게 외친다. 

"It's all about cardio (유산소 운동이 중요하다고)!!!"


짝꿍은 예전부터 비상용 가방, 화생방 방독면, 가정용 소화기 등 재난에 대비하는 용품을 구매하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심심하면 가정용 소화기도 한 번씩 흔들어주고 (오래 세워두면 내용물이 굳는단다), fire blanket이라는 방화 용품도 부엌에 걸어둔 뒤 가끔 어떻게 뒤집어쓰고 탈출할지 동선을 체크한다. 우리의 비상용 가방에는 각종 전투용 식량과 응급의료 용품, 각자의 상황에 맞는 생필품이 빼곡하다. 실제로 기숙사에서 가끔 fire alarm이 울리면 (대부분 실수로 울린 것이지만) 우리는 늘 이 비상용 가방을 챙겨서 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짝꿍은 어느 날, 4층 우리 집에서 발코니를 통해 지상으로 내려가야 할 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휴대용 사다리를 구입하자는 제안까지 했었다. 솔깃했지만 그 정도의 상황이 생기면 커튼을 묶어서 밧줄로 쓰자고 대답하고 말았다. 대신, 스프링클러가 터질 경우를 대비하여 무엇을 보호하고 무엇을 챙길지 업무분담을 하는 것으로 그날의 대화를 마쳤다. 


밴쿠버의 집에 비해 타이베이에서의 내 방은 재난에 1도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나마 안도(?)가 되는 사실은 단 하나. 지금 남아있는 건물들은 1999년 9월 21일 발생한 대만 역사상 최악의 지진(치치 대지진, 혹은 921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건물이라는 것. 치치 대지진은 진도 7.7 규모의 지진으로, 당시 사망자 수만 2400명이 넘고 11,000명에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대만 중부 난터우 현에서 발생한 터라 그 근처인 타이중(Taichung) 시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타이베이와 북부는 진앙지에서 거리가 꽤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한 진동이 느껴졌다고 한다. 당시 이 지진으로 대만 전역에 건물 수 만 채가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그렇게 대만 지진의 역사를 공부(?) 하다가, 내가 방금 겪은, 화롄현 앞바다 저 멀리 어디에선가 발생한 진도 4.0 정도의 지진은 귀여운 수준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출처: 미국 지질조사국 (USGS),

 https://earthquake.usgs.gov/earthquakes/eventpage/us7000mau8/map 

**별표 모양으로 표시된 곳이 이번 4월 3일 지진의 진앙지였던 화롄현. 타이베이는 대만섬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기 때문에 화롄현과의 거리차이가 꽤 난다 (고속열차로 2시간 정도 소요). 





그로부터 며칠 뒤.

또 물침대 매트리스가 느껴졌다. 

이번에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느낌은 며칠 전의 그것과 똑같았다. 흔들흔들. 

검색결과 이번에는 진도 4.2-4.3 정도의 지진이었고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화롄현 앞바다 어딘가에서 발생했단다. 동네 주변 방공호 역할을 하는 건물이 어디 있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다행히 바로 앞 건물이긴 한데, 4층 계단을 신속히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화를 보이는 곳에 꺼내놓고, 여권과 중요한 서류를 한 곳에 모아 두었다. 


일본에 거주할 때 지진을 느껴본 적이 있는 짝꿍은 나의 물침대 매트리스 경험 소식에 내심 걱정을 했다. 지진 대피 훈련도 받은 적이 없고, 지금보다 조금 더 큰 지진이 온다면 패닉이 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이후 곧 3월이 왔고 이제는 물침대 매트리스가 느껴진다 해도 '읭?' 하고 말 수준의 둔감함이 생겼다. 그리고 4월 1일, 나는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바로 이틀 뒤인, 4월 3일, 월요일, 대만 현지시각 오전 7시 58분, 사람들이 한창 하루와 한 주를 시작할 준비로 분주할 때 7.4의 지진이 화롄현을 강타했다. 


서울이 대만보다 1시간 빠르기에 약 오전 9시 반 정도부터 메시지가 두다다 쏟아졌다. "Are you okay"로 시작하는 메시지가 대부분이었다. 구글을 도배하고 있는 대만 지진 소식. 내가 아는 사람들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알고 지내던 학교 사람들 뿐 아니라, 자주 가던 카페와 식당 사장님들, 고양이들까지 생각났다. 나는 괜찮지만, 내가 무사하다고 마냥 '괜찮다, 다행이다'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재난이지 않은가. 


다행히(?) 타이베이에서 내가 알던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는 말과 함께. 모든 선반이 흔들리고, 선반 위에 올려둔 화장품, 향수, 책 등 각종 물건들이 쏟아져내리기 바빴다고 했다. 지진에 잔뼈가 굵은 대만 현지인들조차 무서웠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이들은 진도 4 따위는 지진 취급도 안 한다고 했다). 영상으로 접한 지진의 순간은 처참했다. 지하철에서 속절없이 넘어지는 사람들, 타이베이 시내 호텔 수영장에서 바다처럼 출렁이는 물, 고가도로의 육중한 가로등이 갈대처럼 가볍게 흔들리는 모습, 옆으로 기울어 내리는 건물 등을 보면서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의 규모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번 지진은 평소와 달리 화롄현과 멀리 떨어진 앞바다 어딘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육지에서 1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발생했기에 충격이 컸다고 한다. 7.4 진도의 본진이 발생하고 13분 후 6.4 규모의 여진이 다시 발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의 시간은 엄청나게 길었을 것이다. 실제로 현지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4월 3일 당일 본진과 여진 사이 시간이 짧아 큰 지진이 굉장히 오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시작은 약하게 시작했는데, 점점 흔들리는 규모가 더해지더니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대피하는 소리가 들렸고 공포감이 더해졌다고 했다. 그 이후로 진도 4.5-5 규모의 여진이 체감상 1-2시간 간격으로 이어졌고, 다음날까지도 여진은 가시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땅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 아닌 착각에 다음날은 어지럼증까지 몰려 오더란다. 여진은 약 1주일가량 미미하지만 계속 이어졌다고 했다. 


타이베이시 바로 남쪽에 붙어있는 신베이시에서는 꽤 피해가 컸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인구 밀집지역이고 화롄현과 조금 더 가깝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월요일 출근시간이었기 때문에 지나다가 건물에서 떨어져 내리는 파편, 건물 잔해, 화분 등 을 맞고 다친 사람들의 수도 상당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 사람들의 지진 대처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당일에도 본진과 두 번째 큰 여진이 지나간 이후 사람들은 곧 일상생활을 이어 나갔으며, 지하철과 고속철도도 곧 재개 되었다고 했다. 지하철에서도 승객 대부분이 열차 내에서 차분히 머물러 있었고 출구를 향한 패닉런은 나름 드물었던 모양이었다. 어떤 사람은 지하철에서 누군가가 탈출을 시도하며 자기를 뒤에서 퍽 치고 지나갔는데, 그 와중에도 미안하다는 사과를 잊지 않는 훌륭함을 보였다고도 했다. 


짝꿍은 내가 지진을 피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엄마의 사고와 수술을 겪으면서 이미 한 차례 패닉이 왔었는데, 지진에 대한 경험이 없는 내가 이 정도 규모의 지진을 첫 지진으로 맞이한다면 트라우마가 생기고도 남는다고 했다.


하지만 자연재해나 재난이 나에게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마냥 '다행이다'라고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봄 방학 기간이라, 동성로에 있는 영어 학원을 다니던 중이었다. 

수업은 늘 오전 10시 전에 끝이 났다. 학원이 번화가 대로변에 있었기에 그 바로 앞에 있던 중앙로역 지하상가를 가끔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당시만 해도 대구에서 지하철은 1호선 밖에 없었고 (2호선이 공사 중이었던 것 같다), 학교나 학원은 주로 버스나 아빠가 태워주는 차로 다녔기에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지하철을 탈 일이 없었다. 


노트나 몇 권 사려고 중앙로 지하상가 입구로 들어가려는 찰나, 입구에서 생전 처음 보는 검은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입구를 꽉 막은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스멀스멀 올라오는 연기. 처음 맡아보는 이상하고 오묘한 냄새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연기보다 더 새까만 검댕을 온몸에 잔뜩 붙인 소방대원 2-3명이 어떤 남성을 메다시피 하며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 남성의 겨울 패딩 역시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검댕 투성이었고, 그 사람의 의식이 있었는지 여부는 파악하기 힘들었던 것 같지만 죽은 사람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오늘 지하상가를 들르기는 힘들겠다, 아니, 지금 내려가면 안 될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발을 돌려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을 가려는데, 삽시간에 경찰차, 소방차, 구급차가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버스 정류장을 가기도 전에 동성로 대로가 전면 통제 되었다. MBC, SBS, KBS 등 한국의 메이저 언론사 승합차가 도착하고, 곧 굉음이 들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사히였던가 닛케이였던가, 일본 언론사의 헬기도 보였고, BBC 헬기도 뒤따라 왔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버스정류장은 동성로 대로를 지나야만 갈 수 있었다. 도로가 통제되었으니 다른 버스 정류장을 이용하라는 경찰의 지시가 있었다. 꽤 돌아서 가야하는 길이었다. 당시 나는 휴대폰이 없었고, 집에 늦게 왔다고 엄마가 혼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나가다 보이는 공중전화에서 집으로 전화를 했다. 


"엄마, 동성로에서 불이 났나 봐. 버스를 다른 곳에서 타야 해서 좀 늦어요." 


엄마 역시 대수롭잖게 듣고 그저 빨리 오라는 말만 했다. 평소라면 20분 정도 걸릴 거리였는데, 그날따라 모든 버스가 경로를 변경했는지, 집에 도착하고 보니 2시간이 지나있었다. 


텔레비전 뉴스를 틀었더니 온통 동성로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내가 중앙로 지하상가 입구에서 봤던 검은 연기가 텔레비전 화면을 뒤덮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불이 났다고 했고, 사상자가 좀 있어 보인다고만 했다. 저녁 시간이 되자 전국 각지에서 친척들이 전화를 거는 통에 엄마아빠는 꽤 분주해졌다. 내가 중앙로 지하상가에 가려고 했었다는 말을 듣은 아빠는 처음엔 대수롭잖게 들었다가, 뉴스를 보면서 표정이 점점 굳었다. 


저녁이 되자 집계된 사망자만 100명이 넘었다. 어떤 남자가 지하철 내에서 방화를 저질렀다고 했다. 처음엔 방화가 일어난 열차만 불에 탔다고 했다. 그러다가 반대편에서 방화 사실을 모르고 들어온 열차도 같이 불에 휩싸였다고 했다. 두 열차의 기관사는 모두 빠르게 탈출했다고도 하고, 누구는 문을 잠궜다고도 했다. 무엇이 사실인지 알지 못할, 그리고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계속 뉴스를 통해 흘러나왔다. 동성로는 대구의 명동 같은 곳이다. 먹고 마시고 놀고 사람을 만나러 모이는 곳이다. 아직 봄방학인데, 친구들이 놀러 나갔을 것만 같다. 연락이 되는 몇몇에게 전화를 돌렸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무사했고, 건너 건너의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그 동성로 대로 아래에서 하루아침에 200명 가까운 사람이 화마에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사고가 난 다음날도 학원 수업이 있었던가. 혹은 그 이튿날이던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하룻밤 사이 불에 타 죽고 질식해서 죽어버린 200명의 사람들이 땅 밑에 갇혀있는 동성로 대로를 다시 가게 되었다. 딱히 학원에서 휴강한다는 소식이 없었기에 그냥 기계적으로 나갔다. 


막혀 있던 대로는 통제가 풀렸지만, 도로는 어수선했다. 초반에 구조된 사람들의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구조에 필요한 장비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어 차가 지나다니기 힘들었다. 아빠는 '이게 맞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학원 앞에 내려다 주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밟은 동성로 대로변의 땅에서 어떤 울음소리가 울려 올라오는 듯 했다. 날이 흐렸던가 맑았던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저, 생전 처음 듣는 스산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억만 선명하다. 그 울음소리는 두 땅을 딛고 있는 내 발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었는지, 혹은 공기 중에 감도는 이리떼의 울음소리에 가까운 것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동성로는 철저하게 잿빛이었다는 시각적 기억, 섬유와 플라스틱 등이 불에 탈 때 나는 냄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오묘하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냄새로 도시가 가득했다는 후각적 기억, 등이 파편적으로 자리할 뿐. 


학원 수업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봄방학이 끝났고,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가장 많은 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교가 동성로와 가까웠기 때문일까. 새 학기가 되면 같은 반 친구가 될 학생이 현장에서 생사를 달리하고 말았다고 했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의 친구였다. 현장에서는 운동화만 한 짝 발견되었다고 했던가. 그 학생이 달리기를 잘하던 학생이었다는 이야기가 바람결에 들렸다. 개학식 날, 그 친구의 책상 위에 국화꽃이 놓여 있었다. 참사를 당한 학생들을 학교장으로 진행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운구차가 학교 운동장을 돌 때, 교사, 학생, 학부모 할 것 없이 모두 잿빛 눈물을 흘렸던 장면이 기억난다. 사고가 난 다음날 내가 동성로 대로를 밟으면서 들었던 이리떼의 울음소리 같은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중앙로역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일반 시민들이 추모를 할 수 있도록 사건 현장을 개방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같은 반 친구들이 삼삼오오 추모를 하러 간다고 했다. 내가 직접 아는 친구가 유명을 달리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중앙로역으로 갔다. 


온 벽에 내가 봤던 그 검댕이 박혀 있었다. 원래 벽의 색이나 질감이 어땠을지 전혀 가늠할 수도 없게끔 검댕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저 검댕이 지워지기는 할까. 

그 검댕 때문일까. 다시 그 냄새가 났다. 합성섬유와 플라스틱, 각종 물건과 사람의 살과 근육이 뒤섞여서 타는 냄새. 사고가 일어나던 날, 중앙로 역에서 올라오던 검은 연기는 이미 사람들의 절규와 원혼을 담아서 올라오던 검은색이었다. 사고 이후 수많은 희생자들의 마지막 문자 메시지가 공개되었다.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는 문자,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다는 문자, 마지막임을 체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는 문자, 극한의 공포를 전하는 문자. 그리고 휴대폰이 없거나 전파가 터지지 않아 그 마지막 말도 전하지 못한 수많은 영혼들의 목소리가 글자 너머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내가 들은 이리떼 같은 울음소리는 죽은 자와 그 죽은 자를 허망하게 보내야 했던 산 자들의 울음소리가 파동이 되어 부딪히는 소리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저, 단순한 환청이었을까.  


내가 중앙로역 입구에서 보았던 소방관과 패딩이 검게 그을린 남성은 아마도 최초 생존자 혹은 최초 구조자였을 테다. 내가 중앙로 지하상가로 들어가려고 할 때만 해도 현장에서 나를 통제하던 인원은 없었다. 그 말인즉슨, 사건이 터진 직후 지하에서는 아비규환이 되어 사람들이 검은색으로 변해가고 있는 바로 그 시점,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의 지상에 내가 서 있었다는 뜻이다. 평행우주도 이것보다는 덜 잔인하지 않을까. 내 발 밑에서 2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갈 때 나는 어느 버스를 타고 집에 가야 시간이 덜 걸릴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무사하다고, 내가 아는 사람이 무사하다고, '다행이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도시에서도, 정부에서도, 대구 지하철 사고는 금방 잊힌 듯했다. 다들 일상생활로 빠르게 돌아갔고, 같은 반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국화꽃을 책상에 놓아야 했던 그 친구도 모두의 기억에서 빠르게 잊혀 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었다. 친구들과 탄 그 지하철이 내 첫 지하철이었던 것 같다. 또 그 냄새가 났다. 검은 냄새. 내 코에 박혀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열차 내 소화전의 위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열차가 중앙로역을 통과할 때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온통 검은 차창 밖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갔고, 지하철을 뻔질나게 이용하며 통학을 했다. 서울-대구 거리를 생각하면 절대 올라올 수 없는 냄새라는 걸 알면서도, 서울 지하철에서 가끔 그 검은 냄새가 내 콧등으로 날아와 앉았다. 그럴 때마다 반사적으로 소화전의 위치에 눈동자를 붙박았다. 





그 이후로도, 잊을만하면 대규모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배가 가라앉기도 하고, 서울 번화가의 좁은 골목에서 사람 위에 사람이 쌓였다고도 했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라면 덜 죄스러울까. 


내가 다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아는 사람이 무사하다고 해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함부로 올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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