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ler Park, Milwaukee, WI
위스콘신 주에 자리한 밀워키는 얼핏 보기에 같은 내셔널리그 중부지구에 야구 팀을 가지고 있는 도시 세인트루이스와 닮은 도시이다. 세인트루이스가 버드와이저로 유명한 앤하우저 부시 사가 터를 잡은 맥주의 도시이듯, 밀워키 역시 또 다른 미국의 대표 맥주 브랜드 ‘밀러(Miller)’를 낳은 맥주의 본고장이다. 앤하우저 부시 사와 밀러 사 모두 독일인의 미국 이민이 왕성했던 1850년대에 독일 출신 이민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현재 두 회사는 각각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밀워키 브루어스의 홈구장 네이밍 스폰서 계약을 맺고 있어 야구장의 얼굴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세인트루이스와 밀워키는 도시 규모에 비해 야구 열기가 뜨겁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한 경기에 4만명쯤은 너끈히 동원하는 카디널스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시장 규모가 가장 작은 축에 속하는 밀워키를 연고로 하는 브루어스 역시 열성적이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팬들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대도시가 아닌 밀워키에 다른 놀 거리가 마땅히 없어서 야구장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2007년부터 작년까지 9년 연속 홈경기 평균 3만명 이상의 관중을 끌어모으는 것은 아무 구단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구단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성적도 시원치 않은 브루어스라면 더욱 놀랄 일이다. 실제로 브루어스의 홈구장 밀러 파크에 다녀와 보니 세인트루이스 못지 않은 밀워키 팬들의 야구 사랑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야구 도시들과는 차별되는 밀워키만의, 그리고 밀러 파크만의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다운타운 펍에서의 프리드링킹
2001년 브루어스의 새로운 홈구장으로 건립된 밀러 파크는 도심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웬일인지 구글 지도 검색으로는 밀워키 다운타운에서 밀러 파크까지 가는 대중교통편으로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멀리 돌아가는 경로 밖에 검색되지 않았다. 브루어스 구단 홈페이지에는 밀러 파크까지 바로 가는 버스 노선이 있다고 안내되어 있었지만, 경기가 있는 날에만 한시적으로 운행되는 탓인지 실시간 지도 검색 결과에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돈을 많이 써서 택시 타기가 꺼려지던 차에 구단 홈페이지에서 밀워키 다운타운의 몇몇 펍에서 손님들에게 밀러 파크까지 무료 왕복 셔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정보를 발견했다. 접근성이 다소 떨어지는 야구장까지 와야 하는 팬들의 불편을 구단과 펍 차원에서 나서서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는 모양이었다.
잽싸게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서 셔틀버스를 운영하는 펍 중에서 평점이 가장 높은 곳에 들렀다. 맥주의 도시 밀워키답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본 게임에 앞서 식전 음주를 즐기는 프리드링킹(pre-drinking)을 위해 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과 페이스를 맞추기 위해 나도 자리에 앉자마자 핫도그를 시켜 먹고 맥주 두 잔을 들이켜 몸을 예열했다. 이 날 경기는 마침 세인트루이스와의 경기여서 원정 응원 온 카디널스 팬들이 펍에 많았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브루어스 팬으로부터 웬 카디널스 팬이 이렇게 많냐는 볼멘소리도 들려왔다.
이미 한껏 술이 오른 이들을 보고 있자하니, 무료 셔틀버스는 구실일 뿐이고 팬들이 야구장에 가기 전에 이 펍을 찾은 진짜 이유는 온전히 프리드링킹 때문인 것 같았다. 셔틀버스에 오르고 나서 이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출발하기에 앞서 혹시나 술이 부족한 사람이 있을까봐 버스 기사가 캔맥주와 미니어쳐 위스키를 버스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친절히도 안내해주었다. 흥이 오를대로 오른 사람들은 야구장까지 가는 동안 내내 카오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크게 따라 불러댔다. 자칫 위험해보일 정도로 들뜬 분위기는 흡상 대학생들이 타는 파티버스를 연상시켰다.
메이저리그 최대 규모의 테일게이트 파티
그렇게 취객들과의 10여분 간의 위태로운 버스 합승이 끝나니 어느새 밀러 파크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밀러 파크 앞에는 또 하나의 대규모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야구장 주차장에서 펼쳐지는 테일게이트 파티였다. 테일게이트 파티란 스포츠 경기가 열리기 전 혹은 가끔씩은 경기가 끝난 후에 경기장 주차장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파티를 마란다. 사람들이 몰고 온 SUV나 웨건형 차량의 뒷문을 열고 테일게이트(tailgate)라 불리는 트렁크 공간을 탁자 삼아 여기를 둘러 앉아 논다고 해서 테일게이트 파티(tailgate party) 또는 테일게이팅(tailgating)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테일게이트 파티의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미국 테일게이터 협회 홈페이지에 소개된 내용에 따르면 무려 186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뉴저지의 프린스턴 대학과 럿거스 대학 간의 미식축구 경기를 찾은 팬들이 짐차에 싸온 음식을 먹으며 선수들을 응원했던 것이 테일게이트 파티의 원형이라고 한다. 이렇게 시작한 테일게이팅은 점점 미국 전역으로 번져 이제는 미국 스포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로 자리잡았고, 특히 주차장이 넓은 미식축구 경기장에서는 미국 어느 도시에 가도 축제 분위기의 테일게이팅 현장을 접할 수 있다.
메이저리그의 경우에는 최근 들어 도심 한복판에 새 구장을 짓는 트렌드가 있다 보니 주차장이 미식축구 경기장의 주차장만큼 광활하지 않은 관계로 테일게이트 파티가 그리 흔하지 않다. 하지만 밀러 파크만큼은 미식 축구 경기장에 버금가는 테일게이팅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밀워키와 같이 위스콘신 주에 위치한 그린베이 패커스의 테일게이팅이 여러 미식축구 팀들의 테일게이팅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힌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미국 테일게이터 협회가 테일게이트 파티가 갖춰야 할 7대 요소로 대형 천막, 바베큐 그릴, 간이 의자, 라디오 음악, 시원한 맥주, 간단한 게임, 그리고 응원하는 팀에 대한 자부심을 꼽았는데, 내가 둘러본 바로는 이 일곱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테일게이트 파티는 밀러 파크가 유일했다.
밀러 파크에 도착했을 때는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이었지만 나보다 두 시간은 더 일찍 온 것 같은 테일게이터들로 주차장은 이미 절반 이상 들어차 있었다. 소시지 굽는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콘홀(cornhole)이라 불리는 테일게이팅 전용 게임이 눈에 띄었다. 콘홀 게임은 옥수수나 콩 알갱이를 넣은 주머니를 멀리서 던져 바닥에 기울여 눕혀 놓은 판자에 주머니를 얹거나 판자에 뚫어 놓은 구멍에 집어 넣는 게임이다.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아주 단순한 게임으로 실제로 봐도 그다지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테일게이트 파티 중인 브루어스 팬들은 한 손에는 맥주병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콩주머니를 던지며 아주 재미있게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느 정도 알콜이 들어가서 맨정신을 살짝 내려놓아야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게임 같았다. 이렇게 밀러 파크 주차장 공간의 대부분은 테일게이팅을 하며 맥주와 소시지를 즐기는 어른들의 놀이터였지만, 한 쪽에는 어린이용 야구장과 미끄럼틀 놀이터도 있어서 가족적인 분위기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남이가? 밀워키 브레이브스
주차장을 나와 밀러 파크 주변을 돌아보니 밀워키 야구를 대표하는 네 명의 인물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가장 먼저 전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로 유명한 버드 셀릭의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커미셔너를 맡기 전까지 브루어스 구단주로 활약한 셀릭의 가장 큰 업적은 브루어스 구단을 창단하여 밀워키 야구의 명맥을 유지한 일이다. 브루어스가 창단하기 전 밀워키에는 현재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전신인 밀워키 브레이브스라는 팀이 있었다. 하지만 브레이브스가 1966년 돌연 애틀란타로 연고지를 이전하자, 셀릭은 밀워키에 메이저리그 팀을 다시 유치하고자 동분서주로 뛰어다녔다. 결국 부도 위기를 맞은 당시 신생 팀이었던 시애틀 파일럿츠를 1970년에 인수하여 밀워키로 연고지를 이전하고 브루어스로 재창단시켰다. 그의 뛰어난 사업 수완은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로서도 빛을 발해, 셀릭의 지휘 아래 메이저리그는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쳐 초대형 흥행 비즈니스로 거듭날 수 있었다.
셀릭 옆에 ‘진정한’ 홈런왕 행크 아론의 동상도 보였다. 아론은 커리어 대부분을 브레이브스 선수로 뛰었지만 그 중 절반은 애틀란타가 아닌 밀워키에서 활약했다. 더욱이 선수 생활 마지막 2년은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뛴 후 은퇴했기 때문에 밀워키 야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가 때려낸 755개의 홈런볼 중, 브루어스 유니폼을 입고 밀워키 홈구장에서 날린 마지막 홈런볼이 떨어진 자리는 과거 구장이 허물어지고 지금은 밀러 파크의 주차장이 된 자리 한 쪽에 동판으로 기념되어 있다. 테일게이팅 하는 사람들 사이로 홈런왕의 마지막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아론 외에도 브루어스를 대표하는 간판타자 로빈 욘트와 지역 라디오 캐스터로 수십년 간 활약한 밥 유커의 모습도 동상으로 남겨져 있었다.
야구장 외벽에는 그 밖에도 브루어스를 대표하는 선수들의 얼굴을 새긴 동판이 내걸려 있었다. ‘명예의 벽(Brewers Wall of Honor)’라고 불리는 이 곳에는 박찬호, 김병현 선수가 활약하던 시절 중계방송으로 자주 봤던 선수들의 얼굴이 보였다. 제로미 버니츠, 리치 섹슨, 제프 젠킨스, 크렉 카운셀 등 낯익은 얼굴이 많아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이 정도로까지 기념할 만큼 대단한 업적을 세운 선수들은 아닌 것 같아 고개가 갸우뚱하기도 했다. 브루어스 구단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다 보니 명예의 벽 입성 기준도 다른 구단들보다는 조금 관대한 것 같았다.
여러 동상과 동판들이 있었지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세 명의 건설 근로자가 밀러 파크를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의 ‘팀웍(Teamwork)’이라는 이름의 동상이었다. 밀러 파크 신축 공사가 한창이던 1999년 여름, 무게 450톤의 구장 지붕을 실어나르고 있던 초대형 크레인이 붕괴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인해 현장에서 작업 중이던 근로자 세 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브루어스 구단은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고자 그들의 모습을 동상으로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팀웍’ 동상이다. 절묘하게도 동상이 완공된 밀러 파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구도로 배치되어 있어서 그런지 안타까움과 뭉클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절대 일어나선 안될 비극적 사고 때문에 제작되었지만, 구단에게 훌륭한 유산을 남기고 떠난 이들에게 일종의 영구적인 헌사로 바쳐진 이 작품은 다른 메이저리그 구정의 그 어떤 동상보다도 내게 진한 여운을 남겼다.
경기장 내부로 들어서자 한 구석에 밀워키 브레이브스의 역사와 선수들을 소개하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브루어스 이전의 밀워키 야구 팀은 브레이브스였다. 하지만 브레이브스도 원래는 보스턴을 연고로 했다가 1953년에 이전해 온 것이라 밀워키 브레이브스의 역사는 고작 13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 우수한 성적을 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월드시리즈 무대에 두 번 올라 우승 트로피도 한 번 거머쥐었다. 무엇보다 밀워키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연고지 이전 후 둘째 해였던 1954년에는 내셔널리그 처음으로 홈 관중 2백만명을 달성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구장을 돌아다니다 보면서 발견한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애틀란타와 밀워키에서 모두 영웅으로 대접받는 행크 아론의 경우처럼 복수의 팀에서 각각 저마다의 프랜차이즈 선수로 여겨지는 선수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뉴욕 양키증 레전드 베이브 루스나 조 디마지오의 영웅적 업적이 그들과 아무 상관없는 워싱턴 내셔널스 구장에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본 적도 있다. 바꿔 말하면 레전드 선수 한 명을 두고 너희 선수가 아니고 우리 선수라며 싸우는 일이 좀처럼 없는 것 같았다. 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브레이브스는 버젓이 애틀란타에 현재 존재하는 구단이자 같은 내셔널리그에 있는 경쟁 팀임에도 밀워키 야구의 명맥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밀워키 구단이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었고, 애틀란타 구단 역시 이를 기꺼이 허용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내가 봐온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라 놀랐다. 몇 년 전 삼미, 청보, 태평양, 현대로 이어지는 인천 야구의 유산을 동일 지역을 연고지로 한 SK 와이번스가 이어받는 것이 맞느냐 아니면 현대 유니콘스의 실질적 후속 구단인 넥센 히어로즈가 계승하는 것이 맞느냐를 놓고 한 때 논쟁이 벌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 프로야구의 경우 대부분 구단주가 서로 경쟁관계에 놓일 수 있는 대기업이고, 선수단 인수 또는 해체 후 재창단과 같은 복잡한 역사로 인해 족보가 꼬이는 경우가 있는지라 메이저리그와 동일한 상황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야구 유산이라는 문화 콘텐츠가 공유된다고 해서 그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 아닌 이상, 메이저리그처럼 좋은 콘텐츠는 가급적 많이 공유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야구와 관련된 좋은 콘텐츠가 이 곳 저 곳에서 노출되어 그 가치가 높아진다면 결국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쁨도 나누면 두 배가 되는데 야구 콘텐츠도 나누면 두 배 그 이상이 될지 모를 일이다.
경기보다 더 박진감 넘치는 소시지 레이스
방문 당시 밀워키는 세인트루이스와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선두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날 경기 전까지 선두 세인트루이스에 네 게임 차로 뒤져 있었지만 시즌이 끝나기 전까지 격차를 좁힐 수 있는 기회가 충분했고,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 진출도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게임에 대한 관중들의 몰입도가 다른 어느 경기보다 높았다. 경기 초반 밀워키가 선취 득점에 성공하자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고 양 팀이 홈런포를 주고 받으면서 긴장감이 점차 고조되었다.
경기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을 즈음 6회초 카디널스 공격이 끝난 후 공수교대 시간에 모든 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벤트가 있었으니, 그 유명한 ‘소시지 레이스(The Famous Racing Sausages)’였다. 스포츠 뉴스의 해외 단신 영상으로 소개될 때 종종 봤던 바로 그 소시지 레이스였다. 워싱턴의 ‘대통령 레이스(Racing Presidents)’나 피츠버그의 ‘피로기 레이스(The Pirates Pierogies)’처럼 다른 메이저리그 구장에도 경기 중간에 가분수 인형 옷을 입은 캐릭터들이 운동장에서 달리기 경주를 하는 이벤트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캐릭터 레이스들의 원조는 1993년부터 20년 넘게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밀워키의 소시지 레이스이다. 밀러 파크의 소시지 레이스만큼 전국적, 세계적 명성을 가진 레이스도 없다.
원조답게 레이스의 박진감 또한 차원이 달랐다. 툭하면 넘어지고 어이없는 반칙이 난무하는 다른 레이스와는 달리 소시지 레이스에 참가한 캐릭터 선수들은 모두 전력 질주로 운동장 반 바퀴를 내달렸다. 쉬는 시간만 되면 맥주와 먹을거리를 사러 자리를 뜨던 관중들도 이 순간만은 놓치지 않기 위해 어른, 아이 할 것 같이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집중해서 이 20초 짜리 레이스를 지켜봤다. 어떤 연유로 소시지를 응원하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모두 나름 응원하는 소시지 캐릭터들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브루어스 선수들과 카디널스 선수까지도 덕아웃 앞까지 올라와서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소시지들을 독려했다. 치열한 자리 싸움 끝에 5번 ‘쵸리조(Chorizo)’가 2번 ‘폴리시(Polish)’의 추격을 따돌리고 간발의 차이로 1등으로 골인했다. 아무리 야구 경기가 긴장감 넘쳤을지라도 경기 시간 세 시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눈동자가 경기장에 쏠린 시간은 아마도 이 때였을 것이다.
소시지 레이스에 참가하는 소시지 캐릭터는 1번 ‘브랏(Brat)’부터, 2번 ‘폴리시’, 3번 ‘이탈리안(Italian)’, 4번 ‘핫도그(Hot dog)’와 5번 ‘쵸리조’까지 총 다섯 명으로 저마다 다른 종류의 소시지를 대표한다. 소시지가 다 거기서 거기지, 이렇게 제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다양한 소시지가 있는지 몰랐다. 기본적으로 다진 고기에 양념으로 간을 해서 길쭉한 외피에 싼 음식이면 모두 소시지에 포함된다. 미국 야구장에서 파는 대표적인 소시지에는 핫도그와 이탈리안 소시지가 있다. 사실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이들을 구분하는지 여전히 헷갈린다. 그래도 굳이 나눠보자면, 핫도그는 입자가 고운 가느다란 소시지를 삶거나 구워 부드러운 빵에 끼워서 기호에 따라 케첩이나 머스터드와 다진 무와 피클을 얹어 먹는 가장 대표적인 야구장 먹거리이다. 반면, 이탈리안 소시지는 입자가 굵어 씹히는 맛이 좋은 큼직한 소시지를 구워서 볶은 양파, 피망 등과 함께 빵에 끼워 먹는 음식을 말한다. 핫도그가 간식에 가깝다면 이탈리안 소시지는 그 양이 좀 더 푸짐해서 끼니 대용으로도 별로 부족함이 없다. 물론 훨씬 더 정교한 분류 체계가 있겠지만 메이저리그 구장에서 음식 주문할 때 알고 있으면 좋을 정보로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면, 굵직하게 다진 고기에 마늘이 함께 들어가는 폴리시 소시지와 스페인이나 멕시코 사람들이 즐겨먹는 고추가 들어간 매콤한 맛의 쵸리조까지 구별하는 데 도전해 볼 수도 있겠다.
밀러 파크에는 그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소시지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새 시즌이 시작할 때마다 야구장 메뉴 일부를 교체하기 때문에 지금도 판매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방문했을 2014년에는 ‘비스트(The Beast)’라는 충격적인 소시지를 팔고 있었다. 그릴에 구운 소시지를 베이컨으로 둘둘 말아 통째로 프레즐 빵에 끼워서 먹는 음식이었다. 미국 야구장의 인기 음식들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한 발상은 이해가 되었지만, 하나만 먹어도 살찔 음식 세 가지를 모아놨다니 이건 좀 심했다 싶었다. 먹으면서 혈관에 콜레스테롤이 축적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질 것만 같아 도무지 사먹을 엄두가 안 나는 이 음식에 ‘비스트’라는 이름이 괜히 붙여진 게 아니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빵 사이에 절인 양배추와 구운 양파를 적게나마 얹어줬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샜지만, 어쨌거나 이 다섯 소시지 캐릭터들은 밀러 파크에서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팀 스토어에도 선수들 등번호가 새겨진 티셔츠처럼 소시지 캐릭터의 등번호와 이름이 적힌 티셔츠를 팔고 있었고 인형과 다양한 기념품이 진열된 별도의 섹션도 마련되어 있었다. 누가 소시지 캐릭터 아니랄까봐 테일게이팅에 필요한 조리도구와 밀러 파크만의 특제 핫도그 소스까지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구장 곳곳에 어린이들이 즐길 만한 놀이기구 중에도 소시지 레이스를 소재로 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밀워키의 간판타자 라이언 브론이 약물 복용 적발로 그 입지가 흔들리는 현 시점에서 아마도 소시지 캐릭터들이 브루어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타가 아닐까 싶다. 이들의 인기는 밀러 파크 울타리를 뛰어 넘어, 밀워키나 인근 지역의 학교, 기업, 지역사회 행사에 초청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브루어스의 또다른 인기 캐릭터로는 노란 콧수염을 자랑하는 팀의 마스코트 ‘버니 브루어(Bernie Brewer)’가 있다. 오래전 브루어스의 팬이었던 분의 모습을 본따 탄생된 버니는 딱 봐도 맥주와 소시지를 좋아할 것 같은 모습이다. 브루어스가 공격을 하고 있을 때면 좌측 외야 관중석 꼭대기에 마련된 ‘버니의 덕아웃(Bernie’s Dugout)’이라는 자리에서 응원을 하다가 홈런이 터지면 덕아웃에서 연결된 노란 미끄럼틀을 타고 밑으로 내려오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그런데 그의 자리가 말이 덕아웃이지, 멀리서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외진 곳에 있어서 감금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래도 버니는 누가 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일관 자리에서 일어나서 열정적으로 브루어스를 응원하는 진정한 프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브루어스의 홈런이 터지자 시원하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면서 관중들의 흥을 돋우는 데 일조했다.
부채꼴로 접혔다 펴지는 개폐식 돔구장
처음부터 시종일관 맥주와 소시지 이야기만 했지만 밀러 파크는 지붕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개폐식 돔구장이라는 또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재 메이저리그에는 밀러 파크를 포함하여 여섯 개의 개폐식 돔구장이 있다. 대부분의 구장들이 너무 덥거나 비가 자주 오늘 날씨 탓에 지붕을 설치했다면, 밀러 파크의 지붕은 추운 날씨와 언제 내릴지 모를 눈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특히 아직 날이 덜 풀린 4월의 밀워키 날씨는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쳐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에 시즌 개막 주의 경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듀 지붕이 꼭 필요하다. 밀러 파크 덕분에 중부지구에 속한 다른 팀들이 날씨 때문에 홈구장에서 경기를 못 치를 경우 밀워키에서 홈경기를 진행하는 경우도 가끔씩 있다. 또한 밀러 파크는 높은 천장으로도 유명하다. 지붕 가장 높은 곳까지의 높이 그라운드에서 100미터에 달해 지붕을 닫은 채로도 안심하고 폭죽을 쏘아올릴 수 있다. 내가 관람한 경기에서도 브루어스의 홈런이 터져 실내에서 폭죽이 터지는 진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맥주의 고장 밀워키답게 밀러 파크만큼 야구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먹고 마시는 재미가 인상적인 야구장도 없었다. 다운타운의 펍에서부터 셔틀버스 그리고 테일게이트 파티까지 이어진 맥주와 소시지의 향연은 경기장 내에서도 계속되었다. 다른 구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생맥주 셀프 디스펜서도 구장 내에 설치되어 있었다. 미리 선불카드를 구입하면 긴 줄을 서는 불편함이나 종업원에게 팁을 줘야 하는 부담 없이 맥주를 직접 따라 마실 수 있도록 하여 팬들의 알콜 소비 상의 편의를 도모해주고 있었다. 그 외에도 팬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이 구장 곳곳에 묻어났다. 구단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브루어스가 많은 관중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취한 전략적 선택으로 생각되었고, 그 전략은 충분히 주효한 것 같았다.
밀워키는 한국인들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도시이기 때문에 야구장 여행을 하면서 빼놓기 쉬운 도시이다. 하지만 테일게이팅부터 소시지 레이스까지 미국 스포츠 관람문화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들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밀워키가 시카고에서 차로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만큼, 중부를 여행하는 한국팬이라면 밀러 파크에 꼭 한 번 들러 씹고 뜯고 맛보고 취하는 즐거움을 만끽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