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숑알숑알 Nov 18. 2024

눈 감고도 섬에 다녀오는 방법

한 여행지에 열 다섯 번 넘게 다녀왔다는 얘기를 하면 다들 놀란다. 그 지역에 연고도 없고, 기차역이 없어 매번 네 시간이 넘는 버스 여정에 굽이굽이 몸을 싣는다는 말을 덧붙이면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다. 몇몇은 본격적인 호기심을 비추며 드디어 묻는다. "그곳에 자꾸 가게 되는 매력이 뭔데?"


그럼 나는 질문자가 으레 던지는 말인지, 진심으로 궁금해 하는 것일지 낯빛에 떠오른 의중을 재빨리 살피고는 답변의 양을 조절한다. 간략한 a안은 "바다가 예뻐서요~ 해산물도 맛있고 하하" 정도로 가볍게 맛집 얘기를 떠들다 끝나는 버전. 비교적 심도 있는 b안은 "일단 그곳은 다도해라서 갈 때마다 다른 섬을 찾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여행을 하는 기분이고, 그 섬의 맨 꼭대기에 올라보면은 360도로 수평선이 쫙... (하략)"


그토록 통영의 매력을 설파하기 바빴던 세월이 어언 7년. 이번엔 좋은 기회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화예술 콘텐츠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회사가 출자해서 만든 사단법인 '오늘은'에서는 청년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문화예술 콘텐츠를 만든다. 에디터 봉사자가 여행, 미술작품 등을 오롯이 소리로 감상할 수 있게끔 오디오 가이드를 작성하면 목소리 봉사자가 이를 낭독해 하나의 콘텐츠가 완성된다.


https://youtu.be/NJJm9iGzokI?si=XMUb0lz8LjJpCxlr


기존 '소리 여행' 카테고리에는 서울 근방 여행지가 주로 발행되어 있었다. 목소리 외에도 여행지의 실제 소리를 따야 했기 때문에 제작 상 접근성을 고려한 것이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야심차게 통영의 섬 여행을 주제로 제안했고 감사하게도 운영사무국에서 손이 훨씬 많이 가는 작업임에도 통영을 소리로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을 백방으로 고민해주셨다. 그렇게 모두의 노력이 차곡차곡 보태진 결과물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시각장애인에게 통영과 섬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서는 어떤 단어를 골라야 할까? 대본을 쓰기 시작할 때 가장 고심한 부분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자 이 부분은 의외로 금세 해소됐다. 강구안을 채우는 짭조름한 생선 냄새, 다섯 명쯤 탈 수 있을 듯한 어선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닷물 위에서 흔들거리고, 새벽부터 어업을 다녀온 이들의 기운찬 에너지가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모습... 여객선 위에서 들리는 물결치는 파도 소리, 섬에 닿기 무섭게 도시의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 새들이 맑게 지저귀는 소리까지.


내가 보고 느낀 통영의 소리, 고유한 냄새, 볼을 스치던 바람의 촉감을 일일이 묘사하면 될 일이었다. 되려 장대한 시각 자료를 펼쳐 보이며 섬의 매력을 설파하지 않아도 그보다 섬세한 그곳의 온도를 실컷 늘어놓으면 되는 작업. 그것은 내가 무엇보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본을 쓰는 동안 나만 아는 통영의 멋을 멍석 깔고 자랑하듯 즐겁고 신났다.


열렬히 좋아하는 대상은 존재 자체로 일상에 든든함을 준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좋아하는 대상을 다채롭게 표현할 방법을 알고 있다는 건 더 확장된 느낌의 든든함이었다. 또렷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유들 속에서 좋아하는 대상이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어쩌면 표현의 집 안에서 애정은 더 크고 분명해지나 보다.


2022. 10. 23


매거진의 이전글 홀로 또 함께, 연대도-만지도 여행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