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아침 챙겨 먹고 본격적인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시집을 펼치려 한다. 근래 들어 시작한 습관이다. 일상에 시를 초대하려는 노력이다. 아무리 쉽게 쓰였다는 시집을 펼쳐도 도무지 시는 모르겠다, 하다가도 일평생 시가 쉬웠던 적 한번 없으니 어렵더라도 '시가 그렇지 뭐' 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졌다.
논리적으로 쓰인 글을 보면 한 페이지에 담긴 단어들이 서로 친해 보인다. 앞에서 이걸 설명했으니까 뒤에 마땅히 이 단어가 나왔고, 이 주제를 얘기하고 있으니까 이런 표현이 타당하다는 식이다. 그런데 시는 그렇지가 않다. 당장 띄어쓰기 하나 사이에 두었을 뿐인 두 개의 단어가 너무나 멀어 보인다. 이 시인은 왜 이 명사에 이 형용사를 붙인 거지? 이 단락은 갑자기 무슨 의미지? 시를 읽는 시간이란 그런 의아함의 연속이다.
마치 스포티파이로 랜덤 음악을 재생할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했다. 늘 읽던 글, 전개가 친밀한 글, 들숨처럼 익숙하게 흡수되는 글은 마땅하지만 나를 현 상태에 붙박이게 한다. 여전히 내게서 머나먼 시, 전개가 불친절한 시, 물 속에서 쉬는 숨처럼 적응에 시간이 걸리는 시의 단어들은 나를 새로운 사전 앞에 서게 한다. 맨날 하던 그것 말고 이런 것도 해봐, 들어봐, 써봐, 그렇게 북돋워주는 것만 같다.
요즘 머리맡에 두는 시집의 맨 끝 부록에 그가 시를 사랑하게 된 과정에 대한 짧은 산문이 실려 있었다. 슥 읽는 자체로 나마저 시와 사랑에 빠지게 하는 멋진 글이었다. 일상의 땅에 빈틈없이 붙어있던 내 발바닥을 떼내려 종종거리게 하는, 이른 아침에 시집을 펼친다든가 멍하니 시를 떠올리는 등 기꺼이 비일상적인 시도를 하게 하는 글.
바라건대 머리맡에 시를 둔 일상이 오래 지속되면 좋겠다. 낯선 단어 속에서 길을 잃고 '뭔 소리야'라고 아리송해 하는 순간이 익숙한 풍경이 되면 좋겠다. 똑같은 귀갓길이어도 매번 낯선 산책로를 선택하는 사람처럼, 몰랐던 가능성의 숲으로 스스로의 어깨를 떠미는 사람처럼 자꾸자꾸 새로운 단어의 더미 앞에 날 세워두고 싶다.
2024.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