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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원 Jun 02. 2020

페스티벌의 맛, 맛의 페스티벌 김치말이국수

김말국의 맛을 아는 자, 누군가의 덕후일지니

아직 90%의 김치말이국수. 김 좀 올려주실래요..?


덕질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돈’이다. 어떤 존재의 빅팬(big fan)을 자처할 경우. 그 성립 조건은 대상을 소비하는 방법에 달려있다. 예컨대 “난 마블의 엄청난 팬이야”라고 말하던 예전 직장 상사는 마블시리즈를 어둠의 경로로 소비했다. 난 그를 마블의 팬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마블시리즈를 만드는 사람에게 단 한 푼도 지원하지 않는 소비자는 빅팬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덕질 지론’이다. 그래서 난 돈을 쓴다. 1년 평균 6번, 좋아하는 밴드의 투어와 페스티벌에 간다. 특히 페스티벌은 난지한강공원과 올림픽공원의 너른 잔디밭에 앉아 맥주를 깔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다.


페스티벌을 가는 날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공연 스케줄과 함께 짜인 내 먹케줄을 철저히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아침부터 엄마한테 알랑방귀를 뀌며 집 김밥을 준비한다. 물론 요즘 프리미엄 김밥 브랜드도 많지만, 밖에서 먹는 집 김밥의 맛이 있다. 그리고 전날부터 얼려 놓은 생수병을 아이스팩으로 준비하고, 텀블러에 와인을 옮겨 담는다. 와인에 곁들일 치즈와 과자까지 더하면 이미 한 짐이다. 이걸 다 먹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다 먹는다. 뿐만 아니라 페스티벌에서 준비한 각종 음식부스에 가서 마치 만수르가 된 기분을 느낀다. 햇빛은 내리쬐고 바람은 솔솔 불어오니, 운동회에 참여한 초딩처럼 음식을 먹는다. 달고 짠 양념을 입어 윤기가 촤르르 흐르는 닭강정과, 치즈와 베이컨이 올라앉은 감자튀김에 추가로 맥주도 산다. 역시 밖에서 먹는 나트륨의 맛이 있다.


나트륨은 모두 김말국으로 가는 과정일 뿐


야외에서 땀을 흘리며 공연을 관람하니 나트륨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이렇게 짜고 단 것들을 팔겠지. 하지만 나트륨을 먹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는 모두 맛의 절정으로 치닫는 과정일 뿐이다. 담백한 집 김밥으로 속을 든든히 하고, 자극적인 감자튀김과 닭강정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그럼 이제 슬슬 갈증이 난다. 속도 좀 더부룩하고.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김치말이국수’다. “응? 김치말이국수를 굳이 여기서?”라고 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단언컨대 이들은 페스티벌 초보다. 잘 삶아진 소면에 짜릿한 신김치 한 국자, 살얼음이 낀 육수를 부으면 약 90% 완료다. 여기에 고소한 참기름(의 탈을 쓴 향미유)을 한 바퀴 두르고, 한국산 파슬리인 김을 올리면 비로소 완성된다. 내 돗자리에 채 오기도 전에 후루룩 국물을 들이켜게 하는 맛. 바로 맛의 절정 김치말이국수다.


이 조악한 음식의 맛이 페스티벌의 맛이다. 분명 위생은 취약할 거고 MSG도 잔뜩 들어있을 것이다. 야외 페스티벌의 특성상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자연스레 과식도 한다. 페스티벌의 맛은 이렇게 거칠고 부대낀다. 또 티켓값에 먹케줄을 지키려고 지출하는 음식 값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가야 하는 페스티벌, 매서운 중독성을 보이는 페스티벌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좋아하는 가수가 바람결에 노래를 흥얼거리면 돗자리에 누워서 그 음악을 듣는다. 흥얼거리는 노랫말에 잠깐 잠에 들기도 한다. 아, 정말 돈 쓰고 싶다. 2020년 초 예매해 둔 올해의 공연들은 애저녁에 취소되었고 모두 환불되었다. 뜻밖의 공돈인가 싶지만 덕후의 기본 조건인 ‘소비’를 지킬 수 없어 슬프다. 코로나 시대의 덕후는 돈 쓸 준비를 하고 있다. 덕후는 배고프다. 덕후는 먹고 싶다. 페스티벌의 맛, 맛의 페스티벌 김치말이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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