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빵씨 Mar 08. 2017

#79터키-Cakes for birthday girl

-이스탄불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며칠 전부터 떠나지 않는 생각이었다. 이미 계획만큼 통장잔고는 착실히 줄었고 예정된 편도티켓의 날짜는 천천히 다가왔지만 말이었다.

방법을 만들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비상용으로 마련해 둔 통장의 돈을 쓰면 되고, 티켓은 이럴 때를 대비해 변경수수료가 싼 것으로 구해둔 참이었다.

하지만 집에 가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은 복잡했다. 내가 집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이 왜인지, 답이 그저 무작정 여행을 연장하는 것인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지 않았다.



평소처럼 맑은 이스탄불의 아침이 찾아왔다.

눈뜨자마자 부엌으로 올라가 조식을 받아들고 앉았다.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그리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추억의 한자리로 자리잡고 있는 까미노때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한창 A와 함께 걷던 그 때를.

아침에 걷다 잠시 쉬며 전날 사뒀던 4개 들이 빵을 먹으려는 내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개별포장된 빵봉지에 박힌 날짜였다.

‘어?’하자 A는 궁금한 눈빛으로 바라봤고, 나는 말했다.

아니, 별 건 아니고, 이거 유통기한이 내 생일이라.

A는 무심히 ‘재미있네, 하나 남겨둬’라고 말했고, 얘가 말하기 전부터 이미 그럴 생각이 있었던 나는 가방안에 빵 한 개를 잘 챙겨뒀다(고 생각했지만 배낭속에서 이 녀석은 여기 저기 쏠리며 찌그러져 쳐박혀 있었다)

그렇게 잠깐 쉬다 출발했을 때, 나는 유통기한이 생일이라면 생각나는 영화 ‘중경삼림’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나, A는 왕가위도 중경삼림도 몰랐다. 왕가위 감독이 미국에서도 뭔가 영화를 찍었으며, 분명 알려진 감독이라는건 확신하지만 왕가위와 중경삼림을 중국어로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영어로는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를 몰랐던 나는 ‘그게 말이야. 음, 음,’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용이라도 설명해 맞춰보게 하려고 했지만 조각조각은 기억나지만 영화 전체의 줄거리가 기억나지 않았다. 유명한 대사 ‘사랑에 유통기한을 정한다면 내 유통기한은 백만년으로 하고 싶다’라든지 비누에 말을 거는 장면, 파인애플 통조림을 꾸역꾸역 퍼먹는 장면같은 건 기억이 나는데 말이다.

그때의 아침 공기와 펼쳐져있던 길, 그날의 대화가 고스란히 기억나는 그 빵의 유통기한은 이 날이었다.



그래서 전날  탁심광장이 있는 신시가지 근처에 나갔을 때 주의깊게 봤던 것은 맛있는 케이크와 커피를 팔 것 같은 카페, 혹은 케이크를 파는 경치가 좋은 카페의 후보였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땐 서른번째 생일을 낯선 곳에서 맞는다는 것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여행을 통틀어 가장 멋진 곳에서 멋진 일을 하며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쯤 오자 특별히 뭔가의 이벤트를 찾기도 귀찮아졌다. 원래부터가 그런걸 챙기는 타입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저 이 날은, 이스탄불을 돌아다니며 마음 속에 넣어두었던 제일 좋아하는 길을 걷고, 맛있는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시는 거다.

그 정도면 꽤 괜찮은 일 아닐까.

이 날도 여유롭게 길을 나섰다. 내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는지 하늘은 맑고 기온은 봄처럼 따뜻했다. 삼십년간 몸으로 익혀온 내 생일즈음의 기온이 아니라는 사실이 갑자기 생경스러웠다. 눈을 돌리면 낯선 풍경이 펼쳐지고 근처에 바닷가가 있는 동네에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다가왔다. 익숙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지금껏 낯선 곳에 있었구나, 새삼스럽게 느꼈다.


제일 처음 블루모스크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분수 앞에는 평소처럼 관광객들이 잔뜩 했다. 평소처럼 지나칠 수 있었지만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블루모스크를 배경으로 내 사진을 부탁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그동안 사진 찍는 것을 아껴두고 있었다는 듯이.

스마일~

하는 목소리를 따라 미소지었다. 감사하다며 카메라를 다시 받아들고는 그 옆 골목길로 들어서 바닷가가 보이는 큰길로 들어섰다.

중얼중얼 콧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바닷가를 걸었다.


여행을 준비하던 때는 이때쯤 되면 지금까지의 인생을 정리하고 새롭고 멋진 미래를 기획하고 있을 줄 알았지만, 여전히 과거는 헝클어진 상태 그대로 놓여 있었고 나는 여전히 순간의 희노애락에 지배받고 있었다. 삼개월의 여행에 인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바뀔거라 상상하다니 이런 순진한 생각이라니.

하지만 그러면 어쩌랴, 오늘은 생일이고 나는 오늘은 무조건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기분이 좋아 오늘은 세상 끝까지도 걸어갈 수 있는 상태로 갈라타다리를 건넜다. 전날 점찍어 뒀던 카페에 들어가 케이크와 커피를 주문했다. 가방속에서 잔뜩 찌그러진 유통기한 오늘까지의 빵을 꺼내 한구석에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먹고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나는 나이를 먹어가고 삼개월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이 되었고, 나는 네다섯번쯤 길어진 손톱을 잘랐다. 14kg 배낭을 짊어지고 가방끈을 고쳐메다 생긴 엄지손가락의 굳은살은 이제 조금씩 없어지려 하고 있었고, 얼굴은 좀 더 까매지고 살도 약간 빠졌다. 내가 기대했던만큼 멋진 사람이 되어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삼십대라면 괜찮겠다 싶었다.


케이크와 커피를 먹고 마시며 여행의 모든 순간을 떠올리려 했지만, 생각만큼 여행의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진 않았다. 유통기한이 이날까지인 빵을 떼어들었다. 까미노에서의 우리의 대화가 다시 기억났다. 중경삼림의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 사이에 혀가 녹아내릴 정도로 단 초콜릿 케이크와 씁쓸한 커피, 초콜릿칩이 박힌 찌그러진 빵은 아주 천천히 사라져 버렸다.

여전히 영화 속에서 통조림 유통기한이 주인공의 생일이었는지 주인공을 떠난 여자의 생일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머릿속에 한 장면으로 남은 그림. 생일날 혼자 통조림을 먹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처음 통조림을 살 때 누구와 함께 먹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리고 나는 지금 누구와 함께 있고 싶은 걸까.   

나는 그릇을 비우고 다시 길로 나섰다.


그렇게 나는 서른살이 되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다.

매거진의 이전글 #78터키-다시 이스탄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