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조카가 태어났을 때, 어쩌다보니 언니의 산후조리를 돕게 됐다.
지인의 아이를 귀여워 하는 것과 막 태어난 신생아를 24시간 보는 것은, 정말이지 다른 문제였다.
막 태어난 아이는 그냥 약한 덩어리 같았다.
자기 의지로 고개를 세우지도, 몸을 뒤집지도 못하는, 손을 잘못 대면 죽어버릴 것 같은 예민하고 약한 생명.
그 다음으로 느꼈던건 신생아에게는 표정이 생각만큼 다양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잠을 자고, 얼굴을 찡그리며 울고 하는 것이 전부인 아이.
그런데 이 아이가 하루가 지나면 어설프게 미소를 짓고, 입을 벌려 웃고, 처음과는 다른 표정으로 찡그리는 것을 시작했다. 백지 상태의 생물이 하나하나 습득해 인간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이런걸까. 그때 처음 새생명에 감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아이는 앞으로 많은 걸 배우겠구나. 희노애락이 어떤 느낌인지, 표정을 짓기 위해서는 근육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목을 세우고, 몸을 뒤집고, 붙잡고 일어서 자기 발을 한발짝 내딛는 그 모든 순간이 아이에겐 모두 새롭게 습득해야 하는 지식이겠구나.
그러던 조카가 점점 자라 새로운 단어를 섞어 말을 할 때면, 언제 이런 단어를 배웠는가 싶어 웃다가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이 아이는 아직 배우고 자랄 것이 많구나. 하지만 나는 알고 있는 것을 점차 잊어버리며 나이가 들겠지.
그 무렵 부쩍 눈에 띄기 시작한 새치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던 차였다.
신체가 최대한의 기능을 발휘한 뒤 서서히 퇴화하는 것은 아무래도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정수리의 새치에 익숙해질 때쯤엔 눈가의 주름이 들어왔고, 서서히 쳐지기 시작한 피부에 익숙해지면 적확한 단어가 갑작스럽게 생각나지 않는 모습이 또 새로웠다. 그 모든 것에 익숙해질 때쯤이 되면 몸은 훅 아프고,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노화가 찾아왔다.
자전거를 타게 된 것은 여러모로 도전이었다.
솔직히 나는 걷는 것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며 주변과 부딪히지 않고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는 있게 되었다며 신문구독으로 받은 자전거를 몰고 집앞 천변에 나갔다가, 교각에 들이받고 무려 7만원의 거금을 들여 고치며 동시에 자전거 금지령을 받았던 것이 약 십년전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자신감에서였는지 '자전거 마스터'를 목표로 외치며 자전거를 시작했다.
특별한 방법은 없었다.
원하는 시간에 자전거를 가르쳐 줄 사람이 없어 무작정 몰고 달렸다. 내 옆으로 자전거나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면 혹시 부딪칠까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안심하곤 했다. 몇 번씩 같은 경험이 계속 되며 이만큼의 거리 정도는 부딪히지 않겠다는 감이 조금씩 생겨났다.
달리기를 시작했던 것처럼 매일 자전거를 타려 노력했다.
그나마 처음 균형을 잡는 단계는 넘은 상태에서 시작한 거여서, 익숙해지는 속도는 생각보다 빠른 편이었다.
자전거로는 내가 걸어 산책할 수 있는 거리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나는 곧 세개의 하천이 모이는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 있게 됐고, 그 다음에는 그곳보다 더 멀리, 버스를 타야만 갈 수 있었던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갈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충고로 안전장구를 하나씩 갖추며 그렇게 자전거는 내가 처음으로 익숙하게 운전할 수 있는 탈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내 신체가 하나하나 천천히 배운 것을 잊어먹고 있을 때 '아, 새롭게 뭔가를 배웠구나' 싶은 것이 되었다.
자전거를 배우면서는 걸으며 느끼는 풍경과 달리 세배쯤 빠른 경치를 만났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새롭게 만난 다른 것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렇다. 잊어버릴 일이 많다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배울 것도 시작할 것도 아직 많다.
하다못해 신조어에서부터 시작해 운전도 새로 나오는 어플 같은 것들도, 새로 접하는 것들도, 새로 익혀야 할 것들도 얼마나 많은가.
신체는 퇴화를 시작했다지만 아직은 30대고, 이렇게 새로 배워가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의 균형을 맞추다보면 배우는 쪽이 아직은 훨씬 더 많지 않을까?
그렇게 자전거에 조금씩 익숙해질때쯤 대마도 여행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