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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May 13. 2024

나를 텃밭에 심다

앙(仰) 이목구심서Ⅱ-40

나를 텃밭에 심다


산청 5일장에 다녀왔다.

마당 앞 빈텃밭을 채우기 위해서다.

이미 이웃 밭들은 파종을 모두 끝낸 상태여서 내 게으름의 흔적을 서둘러 지우고 싶기도 했다.


시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좌판대가 지나는 행인보다 많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의 호객을 뒤로할 때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자뭇 죄지은 사람처럼 발걸음이 빨라진다.

"ㅇㅇㅇ 사이소"

하는 소리들이 재빨리 따라와 뒤통수를 따갑게 때리곤 한다.

눈앞에 고구마순이 보여 가격을 물었다.

"한 묶음에 만 원인데 구천 원만 줘요"

작년에 비해 모종값이 비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구입을 해야만 했다.

고구마 예닐곱 개에 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는 걸 기 때문이다.


많은 종류의 모종이 있는 판매장에 들렀다.

여기선 고추 10, 오이 2, 큰 토마토 3, 가지 2, 쑥갓 5, 셀러리 5 모종 등.

이렇게 모두 2만여 원어치를 구매하였다.


때마침 밤중에 비가 예고되었다.

구입한 모종을 내려놓고 빈밭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에 설계도를 그려보려는 것이다.

가상의 선을 그어가며 채소들을 장기판의 말처럼 이리저리 놓아본다.


'작년에 고추를 심었던 자리에 올해는 토마토, 오이, 고구마를 심어볼까.

집 앞에는 자주 찾는 상추와 쑥갓을 심어야겠지.

밭가에는 이미 옥수수가 올라오고 있으니 거름을 좀 더 주어야지.

지난가을에 떨어진 씨앗이 싹튼 들깨 잎도 따 먹어야 하니 군데군데 옮겨 심자.

초봄에 심은 애호박과 단호박은 거름 많은 대추나무 발치로 이사를 시켜야지.'

텃밭의 전체적인 조감도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우선 삽으로 땅을 뒤집었다.

몇 해 전에 농협에서 산 닭똥 거름을 뿌리고 다시 흙을 뒤엎었다.

까만 비닐로 멀칭을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밭이 작으니 잡초는 손이나 호미로 캐내도 되겠다 싶었다.

오후 내내 흙과 씨름을 했다.

이기자고 덤벼든 게 아니다.

오히려 순응하고자 무릎 꺾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채소 모종들 하나하나를 아기 다루듯 땅의 품속에 맡겼다.

밤에 비가 올 예정이므로 따로 물을 주지 않았다.


반나절 동안의 노동으로 텃밭의 일 년이 결정되었다.

올해 식탁의 풍경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이들은 땅의 기운을 받고 자라나 나와 가족들을 먹여 살리라라.

나의 살이 되고 생각이 될 것이다.

 삶의 일부가 되어 동무처럼 함께 살아가리라.


매일매일 고구마에게 발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매일아침 다정한 눈길로 상추를 어루만져 주겠다.

때때로 노랫소리가 너희의 귀를 쫑긋하게 할 수도 있겠지.

무더위에 엿가락처럼 늘어진 해 질 녘이면 사이다처럼 시원한 물을 뿌려 심장을 놀래킬 거다.


너희는 소확행을 체험하는 일상의 이벤트, 사건들이다.

너희를 통해 위로받거나 망각하고 재충전을 할 거다.

너희를 어루만지는 거친 손길이 섬세해지고 마음은 푸르게 물들어 순해질 거야.


이 조그만 텃밭은 곧 나 자신이다.

다듬고 보살피고 지켜야 할 최소한의 나다.

사랑이라는 거름을 주어야 성장하는 존재.

둥글거나 길쭉하거나, 검거나 빨갛거나, 얇거나 두껍거나, 크거나 작거나 모두가 나다.


오늘 텃밭에 심은 건 바로 나였다.

올가을 에서 캐낸 내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으아리와 붓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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