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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May 22. 2024

감꽃에 고이는 햇빛이

앙(仰) 이목구심서Ⅱ-41

감꽃에 고이는 햇빛이


연초록 잎사귀 사이로 허공에 매달려 너울거리는 감꽃. 샛노란 감꽃에 순한 아침햇빛이 고인다.

네모난 꽃관 안에 햇빛은 한 장씩 겹겹이 쌓여간다.

고인 햇빛은 포개어지고 두꺼워져 푸딩처럼 진해져 간다.

여기서 빅뱅이 일어난다.

연한 과육이 이슬처럼 맺힌다.

드디어 어린 감이 탄생한다.


그렇다.

열매란 햇빛을 쌓아 만든 건축물이다.

햇빛으로 빚은 벽돌과 기둥으로 둥글게 지붕을 이어 집을 짓는다.

결국 세상의 모든 열매를 조각내보면 최후의 탁자 위엔 잠자리 날개 같은 햇빛만이 남을 것이다.


햇빛이 내 몸에도 쏟아진다.

이제 막 태어난 태양의 손길은 달콤하다.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금세 온몸이 온기로 충만해진다.


나는 햇빛에 사로잡힌 포로다.

햇볕의 감옥아래 햇살에 묶여 햇빛의 감시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 편안함이란,

부드러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행복이라는 단어가 불현듯 떠도는 건 왜인가.


내가 햇빛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시원을 그리워하는 향수는 본성이다.

뜻하지 않아도 저절로 돌아서게 한다.

빛으로부터 왔고,

밥처럼 때맞춰 빛을 먹고 마시다가

빛을 탕진하고 나면 떠날 것이다.

시작과 끝은 빛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둠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야 할 존재다.


샛노란 감꽃 하나가 땅에 '툭' 떨어졌다.

잠시 그늘이 파문을 일으키며 흔들린다.

나는 시선을 감꽃에 던진다.

금빛 꽃관은 깨지지 않고 그대로다.

햇빛이 고였던 자리는 여전히 환하고 깨끗하다.


감나무는 연초록의 칠판에 전생애를 들여 준비한 강의를 쓰고 있다.

굼뜬 나는 여기에 그 일부만을 받아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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