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일의 나홀로 남미여행, 드디어 끝을 맺다
언젠가 마지막 여행기를 쓸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다.
처음 여행기를 쓰기 시작할 때에는, 너무나 긴 여행 기간과 방대한 사진의 양 때문에 "이걸 언제 다 정리하나, 얼른 끝내버리고 싶다"고 막막해했었는데.
내 여행기가 아르헨티나를 거쳐 마지막 나라인 브라질에 다다르자 나는 마지막 여행기를 미루고 또 미루고 있었다. 오늘은 차마 못 쓰겠어, 다음에 써야지, 내일은 써야지, 그래도 언젠간 끝을 내야겠지, 하고.
아무튼 드디어.
오늘 쓰는 이 여행기가 나의 첫 혼자 떠나는 장기 배낭여행의 마지막 기록이다.
리우에서 상파울루로 떠나는 날.
아직 오전이라 다른 식구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무거운 백팩을 짊어지고 집을 나서려는 나를 카우치서핑 호스트 라이스가 붙잡더니 손에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를 쥐어준다. 오렌지와 손수 만든 초콜릿 트러플 등 간식이 담겼다. 긴 버스 여행 동안 먹으란다. 눈물이 핑 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저만큼 좋은 사람이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베푸는 것보다 과하게 사랑받으며 산다.
이건 복일까, 독일까.
돈을 아끼려고 이파네마에서부터 어느 지점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내려서는 Rodoviaria Novo Rio 버스 터미널까지는 택시를 탔다.
리우에서 상파울루까지는 버스로 6시간이 걸린다.
한국에서 살면 6시간이나 버스를 탄다는 건 아주 어마어마한 대사건(?)이지만, 남미 여행 중에 최장 38시간, 그리고 20시간이 훌쩍 넘는 버스를 밥먹듯 탔던 사람으로서는 6시간은 매우 가벼운 시간처럼 느껴진다.
처음 장거리 버스를 탔던 때가 생각난다.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비야데레이바로 가는 버스였는데, "4시간이나 버스를 타야 한다니", 하고 멀미약을 샀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전체 일정 중 가장 짧은 버스 이동 시간이었다.
귀엽지 않아? 고작 4시간의 라이딩이 무서워 멀미약을 샀다니. 멀미약을 산 것도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40시간을 달리든, 24시간을 달리든. 그 이후부터는 넓다락한 버스 까마 좌석에 앉아 멍을 때리거나 잠에 빠지는 여유를 부릴 줄 알게 됐기에.
상파울루 Terminal Tiete (찌에떼 터미널)에 도착하자 어둑한 저녁이었다. 터미널을 나오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Airport Bus Service라고 적힌 창구에 가서, 바로 내일 상파울루 과룰류스 공항으로 가는 공항 버스 표를 사는 것. 나중에 보니 현장 구매를 해도 충분하고도 남았지만 여행이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도 나는 걱정근심 많은 새가슴 여행자였기 때문에 전날 미리 사뒀다.
상파울루에서 나는 단 하룻밤밖에 묵지 않는다. 그것도, 밤에 도착해서 다음 날 아침 오전이면 공항으로 떠날 처지였다. 말 그대로 상파울루에서는 관광은 커녕 딱 잠만 자고 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여행의 마지막 밤만큼은 꽤 근사한 호텔에서 묵고 싶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동안 남의 집, 혹은 8베드 도미토리에서, 혹은 장거리 버스 안에서 잠을 잤던 모든 여독을 풀려고.
그렇지만 여행의 끝에 나는 거지가 되어 있었고, 그럭저럭 호텔에서 묵을 수는 있었지만 3성급 정도였다.
상파울루에서의 밤. 나는 저녁거리를 사러 간 마트 이외에는 어느 곳도 나가지 않았다. 조용히 나 혼자만의 호텔 방에서 브라질 TV를 보며 여기저기 뭉친 근육들을 끌어안아주고 있었다.
만약 내 여행이 아직 더 많이 남아있었더라면. 만약 72일짜리 여행이 아니라 1년간의 세계일주였다면. 그랬더라면 지금 나의 마음가짐이 조금 더 달랐을까? 이렇게 호텔 방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지 않고 오늘 밤에는 뭘 보러 갈지, 일분 일초를 아까워하며 상파울루의 밤을 활보하고 다녔을까?
체크인을 마치고 받아든 보딩 패스. 왼쪽은 상파울루에서 미국 달라스 포츠워스 공항까지, 그리고 오른쪽은 달라스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티켓이다.
상냥한 공항 언니가 "집에 돌아가는 길인가요? 여행은 어땠어요?" 하고 묻는다. 웃으면서 묻는 체크인 직원을 보니 나도 모르게 커다랗게 미소를 지었다. 브라질만 여행한 것이 아니라 두 달 반 동안 남미 전체를 돌았고, 브라질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니 직원 언니가 깜짝 놀란다.
"드디어 집에 돌아가게 되어 너무 기뻐요. 정말 멋진 여행이었어요."
경유지인 댈러스 공항에서는 '미국 냄새'가 물씬 났다. 아직 미국 땅도 밟아보지 않은 주제에 내가 '미국스러움'을 논할 수는 없겠지만, 상점이나 물건이나 분위기나 사람들로부터 미국스러움이 풍겼다. 미국이나 유럽에 가 보기도 전에 그 와일드하기 짝이 없는 남미 대륙을 먼저 갔다 오다니. 남들이 보면 특이하다고 할 일이지만 사실 내게는 남미여행보다도 미국여행이 더 크고 무서운 도전처럼 느껴진다. 영어를 못하냐고? 아니다. 영어 엄청 잘한다. 그냥, 이유가 없다. 나에게는 남미가 더 쉽고 매력적이고 꼭 가장 먼저 가봐야하는 곳이었을 뿐.
그래서 아마 내가 다음에 또 나홀로 여행을 간다면, 그 목적지는 미국일 것 같다.
대낮에 미국에서 출발한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10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 내내 환한 대낮이었다. 우리 비행기는 미국과 한국의 시차만큼 태양을 부지런히 따라다닌 셈이다. 그래서인지 좁디좁고 승객들이 가득찬 이코노미석에서 나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여행의 마지막 날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에, 애초에 바라고 기대하고 계획했던 것만큼 '배우지' 못했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흔히 '배움'은 청춘의 특권처럼 여겨졌다.
젊으니까 많이 경험해야지, 젊으니까 이것저것 많이 해 보고 부지런히 배워야지. 다 젊으니까 할 수 있는 거야.
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20년이 넘도록 열심히 경쟁하고 노력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아왔던 나 역시 '배우는 젊음' 이데올로기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은연중에 내 머릿속에 심어진 '배우는 젊음' 이데올로기는 내가 남미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반드시 여행에서 뭔가를 얻어와야 한다"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가하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나의 여행에는 목적이 있어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청춘은 목적 없이는 여행을 떠나서는 안 되는가? 만약 내가 만 23세의 대학생이 아니라 40대, 50대였다면. 아니 심지어 30대이기만 했어도 사람들은 내가 여행 결심을 말했을 때 "재미있게 놀다 와"라고만 말했겠지, "많이 배우고 오렴" 하고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경험,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경험은 여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부수적인 산물일 뿐 반드시 여행의 목적 그 자체가 될 필요는 없다. 애초에 한 번의 여행을 통해서 한 사람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거나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장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진심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인터넷 블로그에 숙박비 정보나 맛집 정보가 가득한 여행기를 올리면서 "배낭여행을 통해 저는 엄청난 성장을 했어요-"하고 들뜬 말투로 말하는 대부분의 20대 청춘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당신이 여행 중일 때에는 통했을 '정글의 법칙'은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일상에서 통하는 '도시의 법칙'과 일맥상통하지 않는다.
-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또 한편으로는 반대의 생각이 솟아난다.
아무래도 내 여행에서 스스로 아쉬운 점이 많아서일 것이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일정이 빠듯해서 보고자 했던 것들을 전부 보지 못한 것. 여행 일정은 짧은데 남미 대륙은 너무나 넓었던 것. 날씨가 흐려서 해당 장소에서의 감흥을 마음껏 만끽할 수 없었던 것. 도둑을 맞아서 일정이 꼬이고 돈이 부족했던 것. 혼자라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서 여럿이서 먹는 레스토랑이나 바에 들어가지 못한 것. 일정이 제대로 꼬여버려서 볼 것도 없는 마을에서 며칠을 허비한 것. 사람들과 더 어울리지 못한 것.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체질 때문에 밤문화를 거의 즐기지도 못했던 것. 다음에는, 다음 여행지에서는, 기필코 더 제대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오리라 하고 다짐하면서 쫓기듯이 이동했지만 아무리 애써도 여행이란 현지인들의 생활의 겉핥기였던 것.
분명 아쉬운 점만큼이나 근사한 순간과 새로이 배운 것들이 더 많겠지만, 희한하게도 그런 것들은 나열하려면 귀찮아진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마지막 남은 돈으로 집에 가는 공항버스 표를 샀다. 신기하게도 딱 만원 정도가 남아있더라. 정류장에 마중나온 엄마를 보는데, 너무 현실 같지가 않아서 그저 반가운 웃음만 나왔다. 엄마를 보면 울게될 줄 알았는데, 울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후 일주일 동안, 시차 때문에 저녁 6-7시면 나도 모르는 새에 거실 소파에 누워 잠이 들어버리는 jet lag에 시달렸다.
아무튼 이제 이 여행기를 끝내야 하는데, 뭐라고 끝을 낼까.
초등학생 때 일기처럼 "참 재미있었다." 라고 끝을 내야 할까? 뭘 얻었다고, 얼마나 보람찬 여행이었다고 말을 해야 할까?
그냥 만 나이 23세, 어여쁘고 꽃다운 여대생의 인생샷이나 올리면서 마무리를 하는 게 좋겠다. 72일의 남미 여행 동안, 기가 막힌 인생샷들을 얻은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고.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