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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May 20. 2018

산 할아버지 구름 모자 썼네
예수상이 보이질 않네

리우의 예수상을 보러 올라왔지만, 구름에 뒤덮였을 줄이야.

현대 사회의 여행에서 신용카드가 없다는 건, 여행자의 발목을 꽤나 잡는 일이다.


어떻게든 문을 여는 환전소를 찾아서,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통화를 취급하는지 확인해서(그렇지 않다면 헛걸음. 다시 돌아나와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 내가 가진 돈의 가치를 잘 쳐주지 않는 것에 쓰디쓴 눈물을 흘리며 현지 통화를 확보해야 한다.


그렇게 황금 같은 오전 시간을 대부분 날려버렸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리우의 하늘은 오늘도 맑음이었고, 햇볕도 언제나 따가웠으니까.



해변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예수상으로 가달라고 했다. 

트램 매표소에서 줄을 서려고 하는데, 직원 왈 "이제는 현금으로 트램 티켓을 살 수가 없다"고 한다. 올림픽에 맞춰서 리우의 많은 관광 상품들이 점점 현대화/자동화 되는 모양이다. 가진 건 현금 뿐인데, 현금 결제 불가라니.


어쩌나, 하고 서성거리고 있으니 곧바로 흰 셔츠를 입은 아저씨가 다가온다. 트램 대신 승합차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면서. 트램은 탈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무엇보다도 1~2시간의 긴긴 줄을 설 인내심이 없다면, 예수상까지 가는 데에 승합차를 이용하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승합차는 예수상까지 도달하기 전, 중간에 한 전망대에서 우리를 내려준다. 리우데자네이루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이었다.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라는 리우데자네이루. 이 곳에 올라오자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겠다. 

고소득층이 사는 해변가의 고급 아파트부터, 산 바로 밑의 파벨라까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지 않아도, 리우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귓가에 조용한 보사노바 음악이 흐르는 것 같다. 



높은 곳에 올라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새 날씨가 변한 건지 시야가 뿌옇다.


아직 집에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까지는 하루가 더 남았지만, 이 날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나 다름없었다.

여행의 끄트머리에 서서 바라보는 여행의 마지막 도시. 

기분이 달콤씁쓸했다.

여행은, 생각보다 근사한 일이지만 또한 동시에 생각보다 별 거 없다.

삼바 레슨도 꼭 듣고 싶었고, 공연도 보고 싶었는데.

파벨라 워킹 투어도 해보고 싶었는데.

설탕빵 산에도 올라가 보고 싶었는데.

바에 앉아서 (술을 전혀 못하지만) 보사노바 연주도 듣고 싶었는데.

모든 것이 진한 후회로 남지만 여행 말기, 나는 더 큰 의욕을 내기에는 이미 많이 지쳐있었다. 

아니면 이제 어차피 집에 갈 거라는 생각에 약간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승합차를 타고 예수상 입구까지 올라간다. 

산을 타고 높이 올라갈수록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한다. 


입장권을 살 차례가 되자, 잘생긴 직원 오빠가 묻는다.

"구름이 너무 많아서 예수상의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그럼요.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만 해도, 나는 구름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지.


두둥.

38미터나 되는 이 거대한 예수상은 거의 허리 아래부분까지만 보였다.

"너무 대단했고 감동받았다"고 여행기에 쓰고 싶었는데, 이렇게 구름에 가려지면 "거대한 돌기둥을 보았다"라고 써야 하나.

이 예수상은 세워진 연도, 사람, 동기와 방법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한다.

보통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하면 사람이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거나, 아니면 그에 대한 기록이 없거나 하는 경우인데.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건, 마치 "내가 이걸 해냈다니 믿을 수가 없어!"와 같은 의미인 걸까?


예수상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구름이 자욱하게 꼈지만 어떻게든 예수상의 모습을 담으려는 이들의 열정은 식지 않는다.


자리에 서서는 카메라 속에 예수상의 모습이 다 담기지 않기 때문에 누워서 찍는 사람이 워낙 많다.

이들을 위해서 바닥에 깔개가 깔려있기까지 하다.


여기 오니까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우리 엄마는 '거산 공포증' 혹은 '거석 공포증'이 있다. 

실제로 존재하는 병명인지, 아니면 우리 엄마가 스스로 만들어낸 병명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거석 공포증이란, 말 그대로 커다란 바위나 조각상을 보면 공포심을 느끼는 것이다. 가령 아무 무늬가 없는 커다란 바위나 비석을 봐도, 아니면 지방에 세워진 커다란 지역 특산물을 의인화해서 만든 조잡한 동상을 봐도, 또는 대관령에 세워진 거대한 풍력발전기를 봐도 엄마는 "어머, 무서워!"하면서 내 뒤에 숨으신다. 


아무리 기회가 생겨도 우리 엄마라면 절대 여기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엄마가 믿는 예수님을 조각한 것이라고 해도.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어서 찍은 '허공'의 모습.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까 여기 올라오기 전에 보았던 리우의 덥고 청명한 날씨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수상이 있는 곳에는 구름이 자욱하게 꼈다.

다른 블로거들은 다들 화창한 날씨에 선명한 예수상을 잘도 봤던데. 

그 사진들은 정말 멋지던데-


하고. 또 다시 배부른 여행자의 불평불만이 나오려고 했지만

여행이라는 것이 늘 이렇다. 뜻하는 대로 다 되지 않고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가 없다.

청명한 날에 선명한 예수상의 모습을 본 다른 여행자들은, 아마도 내가 지난 여정에서 보았던 다른 아름답고 근사한 것들을 보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엇?


안 그래도 높은 고도에 차가운 구름이 잔뜩 껴서 추운 이 곳에, 휘이이잉- 하고 바람이 분다.

그러자 예수님을 가린 구름 옷들이 한 겹씩 벗겨진다. 관광객들이 탄성을 지른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의 얼굴이 드러났다. 

잠시나마 보였던 예수님의 이목구비.

이 이후로 곧바로 다시 구름이 끼는 바람에 더는 보지 못했지만.


리우의 날씨는 워낙 덥고 쨍쨍하기에, 리우에서의 내 옷은 언제나 시원시원하게 살을 드러내놓은 차림이었다. 이 날 입은 원피스도 어깨끈조차 없는(아니, 내가 의도적으로 어깨끈을 없애버린) 튜브탑 원피스였다. 쌀쌀해져봤자, 밤에 걸칠 남방 하나면 되겠거니 했는데, 내가 뭘 몰라도 한참 잘못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구름 안에 서 있는 건 너무 춥다. 매우 매우 춥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얼마나 추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손이 너무 시렵고 으슬으슬해서 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다. 

그러니 예수상에 갈 생각이 있는 사람들 중에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든든한 겉옷을 챙겨가시길.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뒤로 하고, 어느 새 또 저녁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밑으로 내려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 보는 리우의 시내 버스.

역시 남미에서 타 본 버스 중에 가장 세련된 느낌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파네마-코파카바나 해변으로부터 예수상의 거리가 꽤 됐던 만큼, 버스의 탑승 시간도 꽤 길었다. 여기 머무는 동안 볼 기회가 전혀 없었던 도시 사람들의 바쁜 면면을, 도시 사람들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모습을 창 밖으로 구경하며 이파네마 시내에 도착했다. 


여행의 마지막 호화 식사라고 생각하면서 식당에 들어가 스테이크를 썰었다.(기대만큼 맛은 호화롭지 못했지만.) 식당에 걸린 TV에서는 하파엘라 실바(Rafaela Silva)가 리우 올림픽에서 브라질의 첫 번째 금메달을 따냈다는 기쁨에 가득찬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여행의 진짜 진짜 진짜 마지막 도시, 상파울루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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