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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May 30. 2018

벌레스크(Burlesque), 나의 성인식

화려하고 관능적인 벌레스크, 스무살 나의 마음을 빼앗다

*오늘의 영화*

<버레스크(Burlesque)> (2010,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셰어 주연)


줄거리 요약: 시골 작은 마을, 작은 무대의 무명 가수인 '앨리(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스타가 되겠다는 야심찬 꿈을 안고 LA로 상경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들어선 벌레스크 클럽. 그 화려하고 섹시한 무대에 마음을 빼앗긴 '앨리'는 클럽 주인인 테스(셰어)의 지도 하에 그 클럽의 댄서가 된다. 벌레스크의 최고의 댄서 겸 가수가 되어 화려하게 이름을 알리기까지, '앨리'의 성공과 사랑 이야기.

 이 새로운 매거진을 오픈할 첫 번째 글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나는 그 글의 주제가 '춤'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왜냐하면, 춤은 곧 내 삶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2012년 9월부터. 


 여느 여자아이가 그렇듯, 나는 무대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우아하고 예쁜 무용수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청소년 시절을 조용히 공부에만 몰두하는 모범생으로 보내고 난 후, 대학에 입학한 후에야 그 로망을 실현할 수 있었다. 캠퍼스에 온갖 동아리 홍보 부스가 가득하던 2012년의 9월. 나는 주저 없이 재즈댄스 동아리에 입단했다. 그 이후로 이어진 약 1년이 조금 넘는 대학 생활을 수차례의 공연과 춤 연습으로 가득 채우면서 나는 춤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고학년이 되어 동아리 활동을 접은 후에도 춤은 계속됐다. 학교 근처 신촌의 모 재즈댄스 학원에서 계속 재즈댄스를 배웠고, 싱가포르로 교환학생을 간 후에는 그 대학의 댄스스포츠 동아리에 가입해서 댄스스포츠를 배웠고 심지어는 싱가포르에서 살사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두 달 반 동안 떠난 남미 여행에서는 또 어땠는지. 무려 열흘을 살사의 도시라 불리는 콜롬비아 칼리에서 머물면서 살사를 배우고 바차타를 배웠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얼반 힙합(Urban Hiphop)을 몇 달 동안 배웠고, 지금은 이미 수 개월째 일주일에 두 번 발레를 배우고 있다.


춤이 내게 미친 영향력이 어떠한 것들이 있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그 대답은 끝이 없다.

체력이나 유연성 등 육체적인 건강, 더 예쁜 몸매, 동료애, 스트레스 해소...

하지만 춤이 내게 준 가장 중요한 자산. 그것은 바로 자신감이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지난 세월 춰왔던 수많은 춤 중에서도, "나는 아름답고, 매력이 넘치고, 당당한 몸을 가진 사람", 이라는 신체 긍정(body positive)을 심어준 최초의 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가 몸담았던 Y대의 재즈댄스동아리에서는 매년 3월마다 정기 대공연을 했다. 내가 공연하게 된 여러 개의 무대들 중 하나의 곡명이 바로 오늘 이야기할 영화 <버레스크(Burlesque)>의 사운드트랙, <Show Me How You Burlesque>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7n5ng6fXabk

섹시함이 넘친다! 화려함이 흘러넘친다아아


 안무의 콘셉트를 이해하기 위해 처음 영화 <버레스크>를 봤을 때, 동경심과 함께 자괴감이 들었다. 

 영화 속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마치 빚어 놓은 도자기 인형처럼 완벽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맡은 주인공 '앨리'는 완벽한 벌레스크 쇼걸의 모든 조건을 갖췄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에게 완전히 반했다. 그녀야말로 이 세상에서 '완벽한 생명체'인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단순히 '뛰어난 가창력의 가수'가 아니었다.

 얼굴이며 몸매도 너무 예뻤고, 춤도 기가 막히게 잘 췄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 가지의 표정으로 보는 이를 홀리는 그녀의 '끼부림'은 정말 어마어마해서 여자인 나도 홀려서 넋을 놓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_3NIBC4vKOQ

영화 속 가장 화려한 무대 중 하나인 <Express>.


 그런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관능미 넘치는 '벌레스크'를 갓 스무살이 된 우리들이 감히 따라잡을 수 있었을까? 천만에. 


*참고로 벌레스크(Burlesque)란,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성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콩트나 누드까지는 이르지 않는 여성의 매력을 강조한 춤을 포함한 쇼"를 의미한다. 여성 혹은 남성 댄서가 꼭 가려야 할 부분만 아슬아슬하게 가린채 자신의 성적 매력을 듬뿍 뽐내는, 매우 희극적이면서도 온갖 화려함(깃털, 큐빅, 진주, 가짜 속눈썹, 진한 화장)으로 무장한 글래머러스한 퍼포먼스라고 보면 된다.)) 

전형적인 벌레스크 쇼의 이미지들.


https://www.youtube.com/watch?v=hsso6fyvxcE

영화 속 퍼포먼스 중 가장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벌레스크'의 예시라 할 만한,  <Guy What Takes His Time>



 당시 우리 댄스동아리 친구들은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이 풋풋하다못해 풀내음이 날 정도의 '새내기 아가들'이었다. 열심히 공부만 하다가 명문대에 진학한 순수 200%의 범생이들이니까. 여자들끼리 수다를 떨면서 알게 된 건데, 나를 포함해 아직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대다수였으며 누군가 남자친구와 '뽀뽀'를 했다는 얘기만 꺼내도 "꺄아--"하고 비명을 지르며 다들 얼굴이 벌개졌었다. 그런 우리에게, 대놓고 관객들에게 자신의 섹시함을 뽐내며 철철 넘치는 섹시함을 발산하는 '벌레스크'를 추는 미션이 주어지다니.


 그 전까지만 해도 내게 '섹시함'이란 단어는 금기였다.

 이전까지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섹시'해서는 안 됐다. 본인이 '섹시'해질수도 있는 가능성조차 인지해서는 안 됐다. 몸이 드러나는 옷을 입어도 안 됐고, 남자친구를 사귀어서도 안 됐다. 엄마의 신신당부이기도 했고, 일반적으로 모든 국가에서 청소년에게 당부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고삐가 스무 살이 되자 갑자기 사라졌다.

 안무가 선배도, 춤 연습을 구경온 선배도, "더 섹시해지라"고 닥달했다. 잡아먹을 듯 관객들을 눈빛으로 바라보며 네가 가진 모든 매력을 발산하라고 주문했다. "유혹해! 유혹하란 말야!"



 그리하여 갑작스럽고 어리둥절했지만, '섹시'해지기 위한 나의 속성 고군분투가 시작됐다. 영화 속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처럼, 혼자서 거울을 보며 섹시한 표정을 연구해보기도 하고, 팔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움직여보고, 긴 생머리를 뒤로 휙 젖히며 입술도 살짝 헤 벌려본다. 화장품과 귀걸이를 가장 열심히 사 모았던 시기도 바로 이 때였다.


매일매일이 반짝반짝 빛나는 무대 위 주인공이었던 그 시절의 나와 동기들.


 두 달의 긴 겨울방학 내내 '섹시함'을 '연습'한 보람이 있었던 걸까?

 모쏠 탈출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동아리의 남자 선배들이 나에게 관심을 보여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십 년을 살다보니 "오늘 예쁘네", "점심 사줄게. 시간 돼?"하는 말을 남자로부터 듣는 날도 생기다니. (이 중 한 명은 얼마 후 내 첫 남자친구가 됐다.) 낯설었지만 우쭐했다. '오오, 나도 매력이 있긴 한가보다!' 하고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공부만 할 줄 아는가 싶었는데, 매일 거울을 보며 이 옷을 입었다가 저렇게 머리를 했다가 난리를 피웠다. "나도 예쁘구나!" 하는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겨울방학이었다.


 그래서, 각고의 노력 끝에, 공연 날의 나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만큼 섹시했냐고?

"훗, 네가 감히? 날 따라해?"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진짜로? 그 몸매로 감히?"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그랬길 바랐지만, 아니었다. 유전자부터 다른데 어떻게 내가 영화 속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처럼 섹시해졌겠나. 다만 최선을 다했다. 커다란 무대 위, 핀 조명이 내 정수리 위로 화려하게 쏟아졌던 2013년 3월의 어느 날. 그게 나의 요란한 성인식이었다. 스스로의 섹시함을 뽐내도 되는 나이가 됐음을, 무려 '무대 위에서' 공표한 날.


2013년 3월의 정기대공연. 벌레스크를 추는 내 모습.
'쇼걸'로 빙의중인 단원들.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 나다.


 사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외적인 매력을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 1때의 일이다. 특목고였던 우리 학교는 모든 학급이 남녀 합반이었고, 나는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음악시간의 '개인 장기자랑 타임'에 당시 히트했던 원더걸스의 <So Hot> 춤을 췄다. 호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이후로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와 마주해야 했다.


 한 여자 친구는 "OO이(내 이름) 이제 시집 다 갔네~" 하고 반은 놀리고 반은 걱정하듯 말했다. 얼마 후 떠난 수학여행에서 나는 내 호텔방으로 끊임없이 걸려오는 남학우들의 "우리 방 와서 춤 한번 춰봐" 하는 성희롱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춤이 너무 좋아서, 그게 내 유일한 장기라서 췄을 뿐인데, 몇몇 사람들은 이를 두고 나를 "마음껏 성적 대상화해도 좋은 쉬운 여자"로 본 것이다.


 비슷한 고민은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계속됐다. 가령, 공대 전기전자공학과 행사 공연에 가서 무대의 센터를 차지하고 춤을 추자 공대 남학생들이 "센터!!! 이쁘다!!" 하고 울부짖음에 가까운 환호성을 질렀을 때. 나는 방금 '성적 대상화'를 당한 것인가? 혹은 내가 스스로 노리개가 되길 자초한 것인가? 나는 지금 기분 나빠해야 하는가? 아니면 뿌듯해해도 괜찮은가?


바로 그 공대 남학생들이 "센터!!!" 하고 울부짖던 공연 날의 사진. 센터에서 팔을 치켜든 사람이 나다.


 다들 나와 같은 의문을 가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몇몇 한국 걸그룹들의 노출이 심한 의상과 안무를 보면서 "싼티난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다"고 말한다. 또 동시에 사람들은 더 심하게 헐벗은 비욘세의 무대를 보면서는 반대로 "파워풀하다" "멋지다" "당당하다"고 말한다. 무슨 차이일까?


 몇 년을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해 고민했지만, 결국 답은 '아티스트 본인의 의도'와 '관객들이 받는 느낌'의 줄다리기로 정해지는 것 같다. 참 애매하다. 내가 보기에도 몇몇 걸그룹들의 뮤직비디오는 '남성적인 시선'에서 수동적이고 보여지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강조하며 '외설적'인 느낌을 풍긴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른 몇몇 뮤직비디오나 퍼포먼스에서는 자신의 몸이 가진 아름다움을 긍정하며 자신있게 스스로의 성적 매력을 드러내는 일이, 보는 내게 엄청난 쾌감과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일종의 'empowerment'로 작용하는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치마를 들추는 천박한 창녀의 춤'으로 알고 있는 프랑스의 캉캉은, 사실 프랑스에서는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여성이 발목을 드러내도 호들갑을 떨던 시절, 몇몇 용기 있는 여성들이 제 손으로 직접 치마를 들추고 더 대담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냈다는 데에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위 스피크 댄스>에서 갈무리. 



 결국 춤을 추는 당신 스스로 정해야 한다.

 당신이 무대 위에서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는 일들. 살갗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관능적인 표정과 몸짓을 보이는 일 등등. 그것들은 당신이 원해서, 당신 본인의 의지로 하는 일들인가?



 그러면 됐다. 이제 당신은 왜 무대 위에서 벗었는지, 무슨 의도인지, 평소에는 당신이 얼마나 정숙한 여자인지 구구절절 변명할 필요도 없다. 이제 관객이 성숙해져야 한다. 무대 위의 여자를 보면서 저 여자가 천박하고 발정난 여자라 생각하지 않을 정도의 성숙함 말이다.

 

넷플릭스 <벌레스크, 관능의 무대> 중 벌레스크 댄서의 말. "섹시하게 살기 힘들다!"



세상의 더 많은 여자아이들이 춤을 배웠으면 좋겠다. (남자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춤을 시작하면서 나는 내 몸을 더 사랑하게 됐다. 내 몸이 스스로 아름답고, 존중받고 칭찬받아야 마땅한 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뱃살이 좀 쪘다는 이유로, 팔뚝살이 좀 붙었다는 이유로, 나를 보는 누군가의 눈이 '썩는다'는 이유로 꽁꽁 싸매고 다니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리고 이런 생각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더 많은 소녀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자. 여자들이 '내 몸은 수치스럽고 못났다' 라는 생각에 갇힘으로써 발생하는 모든 억압과, '정숙한 여인'이라는 프레임에 갇힘으로써 발생하는 온갖 사회적인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 모두는 자기 내면에 숨겨진 '섹시함의 포텐'을 조금 더 너그럽게 포용할 필요가 있다. 여자도, 남자도, 모두 다. 우리는 우리 모두의 몸뚱아리를 조금 더 사랑하고 존경할 필요가 있다.


*함께 보면 더 좋을 영화 및 영상: 넷플릭스 오리지널 <벌레스크, 관능의 무대>, 그리고 유튜브의 수많은 영상들. 벌레스크의 세계가 생각보다 깊고 진지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버레스크> 영화 자체가 뛰어난 영화는 아니다. 그렇지만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뛰어난 가창력, 뛰어난 미모, 그리고 이 정도였나 싶을 정도로 뛰어난 춤 실력이 주는 즐거움이 혼자 보기 아깝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정말 완벽한 영화 속 주인공 '앨리(Ali)'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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