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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Jul 02. 2018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52. 엄마랑 순례길 - 아스토르가의 악연을 다시 만나다

10월 30일

프랑스길 Rabanal del Camino - Molinaseca, León 25.2km


오늘도 아침부터 길을 나선다. 우리는 계속 그랬던 것처럼 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게 길을 나선다. 아무래도 밤새 캐나다 소방관 청년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하다. 문 바로 앞 침대를 차지한 자의 운명이라고나 할까.

벌써 많이들 출발했다. 오늘 멀리까지 갈 사람들은 벌써 보이지 않는다. 엄마와 나는 어느 정도 짐 정리와 트랜스포트 서비스까지 요청한다. 하늘을 본다. 딱 헤드랜턴을 켜지 않아돌 될 정도로 동이 트면 출발하자. 그렇게 어슴푸레 발치가 보일 때쯤 문을 나선다. 그렇게 언덕길을 오르는 길에 엄마와의 순례길 첫날 만났던 아르투르 아저씨를 또 만난다. 아저씨는 어쩜 너희들은 사라졌다가 잘 나타난다고 신기해하며 인사한다. 우리도 반갑게 인사한 뒤, 잰걸음으로 아저씨를 질러간다.

엄마는 저 일출을 보며 이렇게 맑은 지평선의 일출을 보는 게 거의 처음과 같다 말했다.


오늘은 제법 힘든 길이 이어질 것이다. 내 기준 피레네 산맥 이후로 한동안 평지만 만나왔는데, 앞으로 며칠간은 산악지역을 지날 것 같다. 엄마와 나는 마음을 이미 단단히 먹고 있었다. 오르막, 고지는 싫지만 올라가는 만큼 경치는 아름답겠지.

묵을까 말까 고민했던 폰세바돈에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했다. 카페들이 있나 하고 둘러봤지만 뭔가 상태가 애매하다. 공사 중인 곳도 많고, 열기는 했지만 사람이 없는 곳도 있다. 담벼락 근처 돌 위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간단하게 요구르트와 쿠키로 아침식사를 때웠다. 나 혼자였으면 그냥 걸으면서 아무거나 입에 넣었을 테지만 엄마가 있으니 꼭 끼니를 잘 챙기게 된다. 좋은 파트너임에 틀림없다. 


폰세바돈이라면그 말로만 듣던 철의 십자가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 용서의 언덕에서 이미 느꼈던, '너무 유명한 것은 감흥이 없겠지'라는 마음을 미리 새겨두며 길을 잇는다. 이렇게 좋은 길을 걸으면서 실망하고 싶지는 않아서.


정말 머지않아 급작스레 평탄한 길이 이어지고, 차도 근처로 난 길을 걷게 된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철의 십자가를 만났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 엄마는 엄마의 근심거리 하나를 두고 내려왔다.


엄마도 내게 다녀오라고 말하셨지만 뭔가 선뜻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아니 올라갈 수는 없지. 철의 십자가 언덕으로 올라 수많은 이들의 근심들과 짐들을 본다. 각자의 십자가를 여기에 두고 간 뒤,  다들 지금은 개운할까. 


철의 십자가 근처의 공원에서 물을 마시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계속 걸음을 이어간다. 오늘은 급격한 내리막이 예고되어있는 지라 둘 다 걱정을 한다. 지금부터 내리막 시작일까? 지금부터 시작일까??? 하고 꺄륵 거리면서 걷는다. 걱정은 걱정. 날씨도 좋고, 철의 십자가도 지나왔으니 왠지 마음이 가볍다.

왠지 뿌듯한 엄마.


철의 십자가를 지나 내려오는 길가에는 수많은 돌 십자가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각자의 십자가를 만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뭔가 알아차릴 겨를도 없을 때 엄마가 얼른 돌을 모아 십자가 모양을 만드신다. 카메라로 사진을 연신 찍어대던 나도 얼른 합류한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그곳에 두고 왔다. 

한참 평지 같은 길이 이어진다. 이게 급격한 내리막의 서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한참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이 때는 사진도 없다. 정말 온몸에 긴장이 바짝 든 상태로 한참을 내려간다. 설마 저 지평선에 있는 마을들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아니겠지 했지만, 설마는 사실이 되는 법. 근육이 몹시 놀랐을 때쯤 지붕이 깨끗한 마을 하나가 나온다. 이 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엄마와 내가 자리를 잡고 주문을 마쳤을 때, 나는 한 순례자와 눈이 마주친다. Calzadilla de la Cueza의 싸구려 알베르게에서 함께 묵었던, 미국에서 온 B가 아닌가!


분명히 그때는 이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다시 그녀를 보니 너무 반가운 마음이 일렁여 얼른 내달려간다. 그녀에게 나도 모르게 비즈를 진하게 하고 인사를 한다. 그녀는 내 안부가 궁금했단다. 물론이지, 나도 궁금했어!! 이 길을 마치기 전 그녀를 다시 한번 만난 것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녀는 나를 가만히 보더니, 너 다 내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행복해 보여. 이렇게 인사한다. 순간 울컥이는 감정에 그냥 웃고 만다.

나는 지금 엄마와 함께 걷고 있어, 하면서 저 멀리 엄마를 가리키니 정말 부럽다며 세상 부러운 표정을 짓는다. 다시 엄마에게 돌아와 식사를 하는 도중, 자주 마주치는 한국인 청년 순례자와 또 만나 인사를 나눈다. 


식사를 마쳤으니 개운하게 길을 나선다.

아무래도 나에게 있어서 철의 십자가는, 그 언덕 위의 십자가가 아닌 순례자 B가 아니었을까.

잠깐 스치듯 지난 마을. 어떤 순례자가 택시를 부르는 것을 보고 순간 유혹에 빠졌지만 계속 걷기로 한다. 성당에 잠깐 들러 기도도 하고. 마을의 건물들 하나하나가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것이 용해 보였다.

상큼한 엄마.

오늘 엄마와 나는 폰페라다까지 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고 예상은 적중했다. 우리에겐 25km가 딱 적절했다. 몰리나세카에 닿았을 때쯤 우리는 기진맥진해있었다. 미리 가방을 보내 놓은 몰리나세카 알베르게에 들어간다. 몰리나세카의 알베르게들은 마을 약간 외곽에 있었다. 우리가 묵었던 사립 알베르게는 그나마 마을에서 가까웠지만, 공립 알베르게는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만약 공립 알베르게에 묵었더라면 그 5분 거리도 고역처럼 느껴졌으리라. 


따스운 주인의 안내를 따라 방에 올라가는데 

세상에


아스토르가에서 우리 앞에서 새치기를 하느라 나와 한참 신경전을 했던 새치기쟁이 여자와 친구들 무리가 이 방에 모두 모여 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나와 안면이 있었던 몇몇은 나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 새치기쟁이가 눈치를 주니 조용해진다. 맙소사..... 


침대 어디 쓰지. 엄마와 나는 방을 둘러본다. 보아하니 문 근처 침대 세 개가 비어있다. 엄마와 나는 문가 양 옆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예민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아, 이 시끄러운 무리들이 떠드는 것을 견디며 방을 써야 한다니!! 

엄마와 나는 샤워 및 빨래를 마친다. 빨래를 널고 있을 때 그 새치기쟁이가 빨래를 널러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있는 것을 몰랐는지 나를 보며 흠칫 놀란다. 짐짓 모르는 체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넸다. 순간 흐르는 정적. 그녀는 갑자기 휙 하고 올라가 버린다. 왜?!! 인사했으면 좀 받지 그래???


엄마와 나는 마을에 장을 보러 간다. 여러모로 심란한 나 때문에 인지 엄마는 더 신나게 웃으시며 털어버리라고 하신다. 신경 쓰는 순간 지는 거야! 윽

자주 만나던 한국인 청년도 엄마 옆 침대에 자리를 잡았고, 레온 바로 전 마을인 엘 부르고 라네로에서 만났던 두 독일 아가씨도 이 곳에서 다시 만났다. 다들 너무 반가워서 신나게 인사도 나눈다. 저녁식사도 맛있었다. 알베르게의 시설은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묵는 방에 이 새치기쟁이 무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순례자들이라면 슬슬 잘 시간인 10시가 넘어도 시끄럽게 떠든다. 마치 수학여행을 간 중학생 무리처럼. 대체 밤 10시 넘어서 내가 왜 당신의 과거 여행 이야기를 시끄럽게 들어야 할까.... 이 새치기쟁이 아줌마야.. 


무엇보다도 문 앞의 침대를 쓰고 있는 나는, 그들이 문을 열어서 닫으면 자꾸 열고, 또 닫아놓으면 자꾸 열어젖혀서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불을 덮고 어떻게 할까 머리를 굴린다. 한 여섯 번쯤 참았을까. 일곱 번째. 분노 김성질 선생이 드디어 고개를 쳐들었다! 있는 힘껏 문을 쾅 닫고 방 안을 쓱 둘러본 뒤 침대에 다시 눕는다. 솔직히 말하면 그 새치기쟁이가 나에게 응전하길 바라고 일부러 더 응시했는데, 눈을 피한다. 밤 10시 반, 그제야 방 안에 평화가 찾아온다. 그렇게 잠에 든다.


이 소리 없는(?) 전투는 다음날 아침, '늙은 아시안 여자가 코를 골아서 잠을 도저히 못 잤어'하고 낄낄대던 그 새치기쟁이의 남자 친구 덕택에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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