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엄마랑 순례길 - 할로윈데이의 카카벨로스
10월 31일
프랑스길 Molinaseca - Cacabelos 24.4km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어젯밤의 신경전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빨리 이 알베르게를 뜨고 싶었다. 마침 엄마와 나는 이 알베르게에서 거의 제일 먼저 일어났다. 엄마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그 새치기쟁이 여자 곁에 남자 친구처럼 붙어 다니던 남자, 그 남자가 실실 거리며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말았다.
그 나이 든 아시안 여자가 코를 엄청 골아서 잠을 하나도 못 잤어. 순간 고개를 들어보니 그 남자, 키득대며 나를 본다. 어떤 얼굴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까 하다 티벳여우의 표정으로 침구 정리를 마친다
엄마 짐과 내 짐을 모두 들고 나와버린다. 좋은 길에서 더 이상의 에너지 소비는 하고 싶지 않다. 이미 충분히 했다. 길을 떠난다. 오늘 우리가 갈 마을은 카카벨로스, 와인이 유명하다 들었다. 오늘은 어떻게든 2인실을 잡아서 푹 자야겠어하고 엄마와 다짐한다.
몰리나세카를 나서자마자 꽤 오르막길이 우리를 반긴다. 나쁘지 않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폰페라다에 도착한다. 폰페라다로 가는 길은 등교하는 아이들과 분주히 오가는 스쿨버스로 꽤 소란하다. 꽤 부유한 개인주택이 이어지는 곳을 지나, 폰페라다로 들어가니 예의 유명한 성이 우리를 반긴다. 12세기에 건설되었다는, 폰페라다 성이다.
엄마와 나는 폰페라다 성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일러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오늘 걸음의 흐름이 꽤 나쁘지 않아서 엄마와 나는 커피 한잔 하고 길을 계속 걷기로 한다. 폰페라다 바로 근처의, 캐주얼한 카페로 들어가 카페콘레체와 빵으로 아침식사를 한다. 커피맛도 괜찮고, 화장실도 깨끗해서 좋다. 점점 만족의 기준이 아주 가벼워진다.
커피도 다 마셨겠다, 꽤 가벼워졌을 때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아... 세상에... 그 새치기쟁이 무리이다. 항상 8명 정도가 몰려다니기 때문에 더더욱 알아차리기 쉽다. 새치기쟁이, 그녀의 에스빠뇰 억양이 아주 생생히 살아있는 영어는 아주 멀리에 있어도 잘 들린다.
엄마와 나는 다시 짐을 들쳐 메고 길을 나선다. 폰페라다는 꽤 큰 도시라 빠져나가는데 좀 걸린다. 도시 외곽의 큰 쇼핑몰 몇 개를 지난 뒤, 작은 마을들이 보이고 그제야 익숙한 마을길에 접어든다.
이제야 익숙한 길들이 보인다.
우연히 지나가게 된 바. 누가 봐도 순례자의 가방으로 보이는 것이 매달려 있다.
마음이 더욱 편안해지는 밭고랑 길을 걸어간다. 파란 하늘과 팔랑이는 노란 잎들.
새 둥지가 참 너무 하다.
마을 하나를 지나다 약간의 기부를 받는 성당을 지난다. 나는 이런 곳을 부지기수로 많이 보았지만 엄마는 거의 처음과 다름이 없다. 엄마는 기부를 하고 성당에 들어가 보고 싶다 하셨다. 기부하면 주는 도장, 이 도장까지 찍으면 내 크레덴시알은 꽉 차서 넘치니 안된다. 엄마만 도장을 받고 안으로 들어가니,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제단과 벽화가 우리를 반긴다. 도네이션 한 돈들은 성당을 복구하는 데 사용된다며, 봉사자 아주머니는 감사를 표한다.
성당은 기도를 하고 미사를 드리는 곳이지만, 종종 순례자들에게는 잠깐의 쉼터가 되기도 한다. 엄마와 나 또한 잠깐 머무르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뒤, 다시 길을 나선다.
검은 고양이.
슬슬 카카벨로스가 가까워지는 것을, 우리는 너른 포도밭을 보며 느꼈다. 혹시나 해서 지도를 보니 진짜 곧 카카벨로스였다.
왜 이렇게 밝게 웃었던 걸까 엄마는. 사진을 찍을 때가 기억이 안 나네.
수많은 포도밭은 프랑스에서도 보았고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도 많이 보았지만, 유난히 카카벨로스의 포도밭 풍경은 더욱 리드미컬하다. 언덕 하나하나마다 펼쳐진 포도나무의 향연은 왠지 모르게 나를 들뜨게 했다. 엄마한테 오늘은 꼭 포도주를 마시고 말 거라고 선언(?)한다.
카카벨로스 모델, 젬마 여사님!
한참 동안 포도밭을 지난 뒤, 숲길을 조금 지나자 와인 공장도 하나 나오고 카카벨로스 시내의 느낌이 조금씩 풍긴다.
오늘 정말 준수한 시간에 도착했다. 길도 험하지 않았고, 엄마와 나 컨디션도 좋았다. 1시 언저리에 가방을 보내 놓은 알베르게 겸 호텔로 들어간다. 오늘은 둘이 편하게 자자, 2인실을 요청해 들어간다.
이름은 호텔이지만 평범한 시골 여관. 하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욕실도 깨끗하고, 침구도 낡았지만 제법 괜찮다. 엄마와 나는 맛집을 찾기도 귀찮고 해서, 이 곳 주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먹물 빠에야와 해물 빠에야 둘을 시킨다. 물론 소금은 넣지 말아주세요 하고 부탁한다. 평범하지만 괜찮은 맛. 신경 쓰였던 것은 레스토랑, 알베르게, 호텔을 주인아주머니가 혼자 다 관리하시고 아저씨는 멋진 오토바이 타고 놀러 다니느라 바쁘신 것 같았다. 엄마가 수군수군 이야기한다. 주인아저씨 완전 놈팡이 같지. 웃음이 터진다.
그나저나 오늘 둘 다 상태가 좀 이상하다. 어제 먹은 것 중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화장실에 들락날락거리다 반나절이 간다. 둘 다 기진맥진.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엄마, 나는 마을을 둘러보러 나간다.
늦은 저녁, 워낙 점심 양이 많았어서 엄마와 나는 간단히 때우기로 하고 장을 보러 간다. 엄마와 나는 하몽, 각종 과일, 먹거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와인을 산다. 솔직히 나는 와인만 있으면 어딜 가나 신이 난다. 계산을 하고 돌아가는 길, 그러고 보니 마을이 꽤 시끌벅적하다. 아이들이 호박이나 귀신 아이템을 잔뜩 장착하고 신나서 뛰어다닌다. 아, 오늘 할로윈데이로구나.
우리가 묵었던 곳에서는 주방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엄마와 나는 하몽을 적절하게 익히고, 과일을 씻어 안주 겸 상차림을 한다. 그 하몽들, 나중에 돌이켜보면 완전히 익히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또 배탈은 안 났다. 신기한 노릇이다.
엄마와 나는 와인 한잔씩 따라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한다. 술을 잘 하지 않는 엄마인데도 오늘은 꽤 몇 잔 하신다. 가감 없는 이야기들, 술을 빙자해서 해 보는 이야기들...
기분 나쁜 녀석들 때문에 조용한 마을에 둘만 묵을 수 있는 호텔로 온 거였는데.
기분 나쁜 녀석들 덕분에 행복한 밤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