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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Jul 11. 2018

밤 줍는 여인네들

54. 엄마랑 순례길 - 조용한 산골 마을의 개울물을 따라서

11월 1일

프랑스길 Cacabelos - Las Herrerias 27km


만족스러웠던 카카벨로스에서의 체류를 마치고 길을 나선다. 아침부터 꽤나 쌀쌀하고 날씨도 심상치 않다. 오늘부터 사리아에 닿을 때까지 한동안 힘든 산길이 이어질 것이란 것도 알고 있다. 채비를 단단히 한다. 오늘 도착할 라스 헤레리아스는 정말 작은 시골마을. 벌써 11월이 넘은지라 묵으려고 했던 펜션 비슷한 곳도 영업을 하지 않는단다. 대신 알베르게 하나가 영업을 하는 덕택에 그곳에서 묵기로 한다. 이 곳에 묵는 이유는 솔직히 단순하다. 적당한 거리, 그리고 마을 어귀에 제법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다고 들어서.

아침나절에 도착한 마을의 순례자 석상 앞에서 엄마와 나의 사진 놀이.

한동안 시골 국도 바로 옆을 따라 난 길을 이어 걷는다. 계속 걷자니 마치 강원도 엄마 아빠 고향마을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산 능선 모양이 강원도의 그것과 꼭 닮았다. 엄마와 나는 가을이 오면 같은 유행가를 잇달아 부르며 길을 걷는다. 행진에 어울리는 유행가란 모름지기 무의식적으로 가사가 익을 정도로 유명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부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 노래들이 지나간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 애창곡도 흥에 차 불러본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오늘은 마주치는 순례자들이 적다. 대신 자전거를 탄 이들이 종종 옆을 스쳐 지나간다. 아침에는 비도 한두 방울 떨어져서 걱정했는데, 날씨는 다행히 금방 개었다. 구름이 적당히 낀, 걷기에 좋은 날이다.

우리가 걸은 시기가 가을이니만큼, 길바닥에는 수없이 많은 밤들이 떨어져 굴러다니고 있었다. 한국 같으면 추석에 고향에 내려온 이들이 얼른 털어가느라 정신없었을 텐데! 이 동네 사람들은 대체 무얼 하는지 이 실한 밤들을 그냥 두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그 토실하고 탱글탱글하며 반질반질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엄마의 지팡이는 밤송이의 가시를 헤치는 도구가 된다. 그렇게 한참이나 시간 가는 줄을 모른 채 엄마와 나는 정신없이 밤을 주웠다. 두 가방 중 하나를 보내는 바람에 몸이 가벼웠는데, 우리가 주운 밤이 그 자리를 알차게 채워서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어떠랴. 요 밤들을 삶아먹을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것을.

가방도 묵직하게 밤을 주워 담은 뒤 길을 다시 이어간다. 

오늘 길은 마을 간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짧으면 2km, 길면 4~5km를 걸으면 바로 마을이 나온다. 작은 마을들이 옹기종기 이어지는 느낌. 레온 근처에서는 그렇게도 북적이던 순례자들이 왜 오늘은 유난히도 보이지 않는지. 길이 굽이굽이 이어져서일까. 덕분에 엄마와 나의 조용한 산책 같은 순례가 이어질 수 있었다.

작은 마을 물가 쉼터에서 빵 터져서 웃던 시간.


오늘의 길은 짧지도 길지도 않았지만 안정적으로 오후 두세 시쯤 도착한다. 알베르게에는 우리가 첫 번째로 도착한 것 같다. 이 알베르게는 자선단체가 운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벽 이곳저곳에 단체를 소개하는 사진들이 붙어있다. 2인실과 다인실이 있다. 마침 잘 되었다. 우리는 2인실을 요청한다. 내일 묵을 알베르게에도 혹시 연락을 해줄 수 있는지 부탁했는데 흔쾌히 도와준다.


가방을 푼 뒤 샤워를 마친다. 방은 작지만 꽤 아늑하다. 베드버그가 걱정되는 인테리어, 약간 습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어서 침대를 샅샅이 훑어보았는데 다행히 깨끗해 보인다.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아 답답했지만, 머리가 시끄러운 넷망 세상과 잠깐 떨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까 이 마을에 들어오며 보았던, 인터넷에서 추천글을 보았던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마침 어제가 할로윈이었던지라 각종 해골, 호박 등등의 아이템으로 꾸며져 있다. 호탕해 보이는 레스토랑 주인이 환대한다. 벽에 붙어있는 사진들을 보아하니 제법 스포티브 한 취미를 가지신 것 같다. 

나는 뿔뽀 하나, 엄마는 닭요리 하나를 주문한다. 우리에겐 알맞은 저녁시간이지만 스페인인들에겐 아주 이른 저녁 6시. 많은 자리가 비어있는 레스토랑에서 우스꽝스러운 할로윈 영화를 흘끔흘끔 보며 식사를 한다. 맛이 제법 괜찮다. 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알베르게로 돌아간다. 

알베르게 바로 앞을 흐르던 맑은 개울물.


잠자고 있는 듯한 마을. 알베르게 앞 공터에서 풀을 뜯는 말들이 너무나 한가해 보이는, 신기한 곳. 두세명 순례자들이 더 도착했지만 이렇게나 조용할 수가 없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고요한 평화 속에서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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