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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Jul 11. 2018

닫힌 알베르게

55. 엄마랑 순례길 - 꽁치김치찌개의 마법

11월 2일

프랑스길 Las Herrerias - Triacastela 29.5


오늘은 아침부터 심상치 않다. 하늘도 꾸물거리고, 비도 한두 방울씩 머리를 때린다. 어플을 보아하니 오늘 넘을 산길에 제법 험하다. 드디어 갈리시아로 넘어가는 날이자, 산 하나를 넘는 날이다.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면, 오늘 묵으려고 하는 피요발 Fillobal 알베르게가 계속 전화를 받지 않는다. 어플 상으로는 아직 여는 기간인데, 찜찜하다. 일단 가방은 그곳으로 보낸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마을을 벗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험한 산길이 나온다. 몸이 날랜 엄마는 저만치 올라가 있다. 나는 낑낑대며 돌 하나씩 밟으며 따라 올라간다. 비는 자꾸 내리고, 길은 미끄럽다. 오늘 산길은 제대로다. 산길을 올라가는 와중에 열심히 밤을 줍고 계시던 동네 아저씨도 만난다. 부엔 까미노, 익숙한 인사를 하면서도 너무 힘들어서 웃음이 실실 나온다. 올라가는 산길 귀퉁이에 몹시 예쁜 산새 하나가 앉아있었는데 시선 둘 여유도 없다.


으아 더 못하겠어! 할 때쯤 마을이 하나 나온다. 빗방울은 더 굵어진다. 엄마와 나는 바로 들어가 여느 때와 같이카페콘레체 한잔을 한다. 

그렇게 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라바날 델 까미노에서 만났던 청년 셋이 이곳으로 들어온다. 엄마는 막내동생 또래인 그들이 참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내가 화장실에 있을 때 엄마가 그네들에게 어디서 왔는지 몇 살인지 묻는 게 들린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질문을 '길가다' 받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엄마를 제지했지만 실패. 나와 달리 사근사근한 이 청년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어쩌다 이곳에 온 건지 친절하게 이야기해준다. 막 제대하고 여기에 왔다는 그들 때문에 진심으로 막내 생각이 난 엄마. 아련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우리는 길을 다시 떠났다. 

고도가 높은 마을을 지날 땐 춥다. 특히 비바람이 몰아치면 손 끝에 감각이 없어진다. 꼬물꼬물 장갑 끼는 엄마.

조용한 마을 하나를 지나기도 하고, 국도 옆으로 난 길을 계속 이어 걷는다. 산 능선을 타면서 넘는 길인지라 제법 오르락내리락한다. 


요 며칠 엄마와 자주 이야기한 것. 이 동네 사람들은 고사리를 안 먹나 봐. 그 전에는 사방에 널린 고사리들을 보며 종종 이야기했는데, 오늘은 대화 주제 절반이 갈리시아와 고사리다. 산 능선 빈 곳마다 고사리가 빽빽하게 널려있다. 엄마는 이 동네에다 알베르게 차려서 고사리 비빔밥 하면 좋겠다며 아주 신나셨다. 다들 밤도 안 줍고, 고사리도 안 딴다며 신기한 사람들이라고 혀를 내두르는 엄마. 한참 수다를 떨고, 순례자들 서너 명도 지나치며 길을 이어간다. 비는 끊임없이 내린다. 바람도 질세라 열심히 불어댄다. 미끌 거리는 능선 길을 따라 걷다 갈리시아를 마주한다. 

순례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있는 갈리시아 지방. 내가 1년 전 처음 짧은 순례를 시작했던 곳이기도 하다. 한참 동안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을 걷다 드디어 갈리시아에 당도하니, 왠지 마지막이 보이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아쉽기도 하다. 


배가 너무 고프다. 레스토랑 하나 보이질 않다 드디어 바 하나를 발견한다. 들어가 보니 보까디요와 몇 가지 빵밖에 없다. 배고픈 데에는 장사 없다. 보까디요는 싫다던 엄마도 보까디요를 드신다. 나는 초리소, 엄마는 하몽을 골랐는데 초리소가 더 나으셨는지 결국 바꾸어 먹는다.

다 먹지 못하고 은박지로 싼 뒤 가게를 둘러본다. 엄마는 몇 개 빵을 먹어보고 싶다 하신다. 요청해서 먹어보니 매콤한 것이 꽤 맛이 좋다. 배도 적절히 채웠다. 다시 길을 떠난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언덕의 순례자상. 오른쪽 사진 저 뒤편에 캐나다 소방관 친구가 찍혀있다.

계속 능선을 따라가다 내리막으로 접어든 길. 내가 가방을 보내 놓은 피요발로 가는 길은 꽤 급격한 내리막이다. 구름은 시시각각 그 모양을 바꾼다. 우리는 차박차박 속도의 변화 없이 길을 잇는다.


가파른 내리막을 조심조심 걸어간다. 구글맵상으로는 피요발이 코앞이다. 저 멀리 알베르게로 추정되는 건물과 잘 배달된 내 가방이 보여서 신나게 내려간다. 하지만 왠지 묘한 예감이 스친다. 문을 두드려도 누군가 나오지 않고, 건물 주위를 둘러봐도 인기척이 없다. 엄마는 사람 없는 거 맞아, 닫은 거야 하고 이미 납득하셨지만 나는 납득이 되질 않는다. 몇 번 더 건물을 빙빙 둘러보고 다시 문을 두드리다 포기한다. 내 가방을 뒤로 메고 엄마의 가방을 앞으로 멘다. 별다른 수가 없다. 트리아카스텔라까지 간다.


예상된 거리보다 4km, 한 시간 정도 더 걷는 것은 몹시도 괴로운 노릇이다. 오늘 비도 오고 산길도 걸은 터라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는데, 얼른 도착하지 않으면 완전히 어두컴컴해질 것 같다. 길을 걸으면서 트리아카스텔라 추천 알베르게를 검색해본다. 마침 호텔 겸 알베르게를 하는 곳을 발견한다. 좋다. 걷자.


마지막 한 시간은 어떻게 걸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호텔에 도착해 방키를 받아 짐을 푼다. 방은 너무나 깨끗하고, 히터도 따뜻하게 돌아가고 있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잘 마련된 공간도 있다. 요리도 가능하다! 됐다 오늘은 무조건 남은 김치를 맛나게 해 먹을 테다. 뜨거운 물로 샤워도 마치고, 빨래도 돌린다.


자주 마주치는 젊은 부부도 또 이 알베르게에서 만나서 반갑다. 나와 그 부부는 장을 보러 근처 마트로 간다. 빙 둘러보다 올리브 오일에 절인 꽁치를 발견한다. 그래 오늘은 꽁치김치찌개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저녁 준비를 한다. 스페인 시골에서 먹는 꽁치김치찌개, 흰쌀밥, 그리고 삶은 밤은 그 무엇보다도 멋진 만찬이다. 꽁치김치찌개의 마법 덕분에 하루 피곤이 다 가신다. 기진맥진한 하루 끝의 멋진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라디에이터의 열기에 따뜻해진 방 안에서 몸을 녹이며 잠자리에 든다.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 없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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