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엄마랑 순례길 - 완벽한 또르띠야를 만나다
11월 3일
프랑스길 Triacastela - Sarria 25km
트리아카스텔라에서 사리아에 가는 길은 국도를 따라 직진하면 18km 내외로 길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 근방에서 유명한 사모스 베네딕토 수도원을 둘러보기 위해 약간 돌아가기로 한다.
아주 이른 아침, 동이 트기 전에 길을 나선다. 평소와 같은 시간인데도 날씨가 꾸물거리는 탓에 하늘이 더욱 어둡다. 마을에서 한번 길을 잃을 뻔했지만 몹시도 크게 표기된 화살표 덕택에 사모스 방향으로 길을 잘 잡을 수 있었다.
또 밤을 주우려고 길바닥을 보는 엄마.
2017년 가을에서 겨울, 갈리시아 지역에 몹시 큰 화재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내가 프랑스에서부터 걸으면서 뉴스를 통해 꾸준히 들어오고 있던 이야기였다. 레온 근처에서는 산티아고까지 도착해서 다시 집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던 순례자에게, 갈리시아 지방 화재가 너무 심해서 길 걸으면서 계속 탄내가 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풍경은 속이 상할 지경이었다. 마을을 빠져나와 산길로 접어드니 심한 탄내가 훅 풍겨왔고, 숲은 온통 까맣게 타 버려 안타까운 형태만 남겨두고 있었다.
온통 타 버린 숲.
너무 다 타버려서 생생한 색 자체가 남아있지 않다.
화살표가 그려졌을 나무. 두 갈래로 쩍 갈라져있다.
그을음이 잔뜩 묻은 화살표 비석.
온통 새까맣게 탄 숲이라 해도 결국 살아남는 숲은 다시 푸르게 잎을 틔웠다.
너무 웃겨서 깔깔대며 찍었던 패널.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건 많이 보았지만 큰 일을 보지 말라는 패널은 정말 맹세코 처음 보는 지라 몹시도 웃겼다. 심지어 그린 사람이 정성스레 잔여물(?)도 잊지 않고 그렸다. 이걸 설치한 분은 분명히 화도 나고 해서 그렸겠지만 나름의 유머가 묻어난다.
여기가 사모스일까, 여기가 사모스일까 하면서 몇 개의 마을을 지나친다. 어떤 마을에서는 하얀 건물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이길래 여기가 사모스인가!! 하고 신나서 달려가 보니 납골당이기도 했다. 여긴 아닐 거야.. 하고 실망할 때쯤 엄마가 날 부른다. 저게 사모스 아닐까?
그렇게 숲 사이에 사모스 수도원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산길을 내려와 사모스 수도원 근처 마을에서 간단히 몸을 녹일 곳을 찾는다. 아직 입장시간이 되지 않았던 것. 주위를 둘러보니 동네 할아버지 한두 명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작은 바가 보이길래 들어간다. 그곳에서 빵 하나와 카페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다. 벽에는 사모스 수도원을 비롯한 각종 수도원 위치가 표기된 지도,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 위치들이 표기된 지도도 있다. 내 친구가 걸었던 아라곤 길, 내가 걸었던 르퓌 길, 우리가 걷고 있는 프랑스길과 여기 사모스 수도원, 이외의 다른 길들도 마치 심장을 향해 모여가는 혈관처럼 곳곳으로부터 시작되어 산티아고를 향하고 있었다. 꽤나 성격 좋은 사장님의 서비스로 기분 좋게 휴식을 마치고 수도원으로 향한다.
수도원에 도착하니 아직 표를 파시는 분이 문을 열고 있지 않았다. 비도 중간에 추적추적 내려서 엄마와 나는 오들오들 떨며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몸이 아플 지경. 후에 엄마가 돌아보시길, 둘 다 추워갖고 덜덜 떨고 있는데 너무 어두침침한 그곳에서 직원만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가 진짜 애처롭고 웃겼다신다. 여기까지 왔는데 안 볼 수 없어! 하는 마음. 직원이 나와 문을 연다. 뛸 듯이 기쁘다. 표를 산 뒤 입장한다. 우리 이외에도 사투리 억양이 진한 미국 할머니 할아버지 무리도 합류한다.
무표정의, 약간은 기계적인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수도원 내를 둘러본다.
사모스 수도원의 가장 큰 특징은 벽화들이 아닐 수 없다. 화재 이후 재건하면서 많은 작가들이 벽화를 담당했다고 한다. 구약, 신약 등 다양하고도 굵직한 사건과 이야기들을 각자의 화풍으로 옮겨 벽에 새겨둔 모습들이 몹시도 다채로웠다. 수도원을 보는 느낌보다는 수도원에서 펼쳐진 미술 전시를 보는 느낌이었을 정도.
창 너머로 본 사모스 수도원 정원.
그동안 어떻게 재건되어왔는지 보여준 사진전.
대성당에는 성인들의 입상이 정말 많았다. 물론 그곳에는 우리 순례자들의 수호성인이신 야고보 성인 또한 계셨다.
악마가 너무 귀여워서 찍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서니 그 새치기쟁이의 무리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새치기쟁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 무리 중 나를 꽤 편하게 대하던 네덜란드 남자애, 그리고 안면이 있는 일본 청년이 나에게 인사를 한다. 내가 너희 친구들 전부 온건 아니네? 하고 묻자 사모스 오기 싫어하던 몇몇은 바로 사리아로 갔단다. 잘 둘러보라며 인사하고 엄마와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배고프다. 배고픈데 마땅한 레스토랑이 보이지 않는다. 마을 외곽의 레스토랑에 가 보니 하나는 닫았고 하나는 공사 중이다. 그냥 길 가다가 마땅한 공터가 나오면 그곳에서 갖고 있던 빵들과 포도를 먹기로 한다.
다행히 공원 같은 곳이 나와서 끼니를 때우는데, 둘 다 추워서 오들오들 떨면서 먹었다.
춥고 만사가 귀찮아도 길은 가야 한다. 마을 사이의 길을 지나기도 하고, 사람들이 밭 가꾸는 걸 구경하며 걷기도 한다. 소가 풀 뜯는 곳을 지나기도 한다.
잘 안 보이는 것 같지만 저 위에 소들이 널리 퍼져 풀을 뜯고 있었다. 이때 우리는 너무 지쳐서 길바닥에 우비를 펼쳐 그 위에 앉아 한동안 쉬었다.
한참 가다가 마을 하나에 다다른다. 사리아 전의 마을, 사모스로 우회하는 길과 사리아로 직진하던 길이 만나는 곳이다. 이 곳에 오니 안보이던 순례자들이 갑자기 많이 보인다. 덜덜 떨면서 제대로 된 점심을 챙겨 먹지 못했던 엄마와 나는 한 바에 들어가 묵직한 간식을 먹기로 한다.
할머니 한 분이서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 티브이에서는 오래된 영화가 나오고 있었고, 파리도 제법 날아다닌다. 엄마와 나는 음료와 또르띠야 하나를 주문해서 나누어 먹는다. 어, 그런데 이 곳 또르띠야, 심상치가 않다. 그동안 걸어오면서 제법 많은 또르띠야를 먹었다고 할 수 있는데, 갓 해서 따끈따끈한 데다 적당한 두께에 딱 좋은 간! 겉은 살짝 바삭한데 안에는 촉촉한, 입에 들어오니 환상의 조화를 보여주는 그 맛!! 엄마와 나는 순식간에 하나를 해치우고 아쉬워했다. 실로 완벽한 또르띠야였다.
마침 이 바에 엄마와 내가 자주 마주쳐온 독일 두 아가씨가 온다. 내가 또르띠야 먹는 걸 보고 또르띠야와 감자튀김을 주문한다. 우리는 먼저 출발하며 인사를 한다. 그녀들도 곧 따라오겠다며 손을 흔든다.
그렇게 사리아에 도착했다.
1년 전, 사리아에서부터 나는 짧은 순례를 했더란다. 성당 근처의 구 시가지 알베르게가 내 첫 숙소였다. 오늘은 신시가지 쪽의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한다. 30인 정도 묵는 꽤 큰 알베르게였지만 묵는 이는 엄마와 나 포함 6명 내외였다. 엄마가 자주 궁금해하는 캐나다 소방관 청년도 우리 옆 침대다.
일과를 처리하고 장을 보러 가니, 자주 보이던 젊은 한국 친구 하나가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다.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서로 기회가 닿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저런 안부를 나누고 헤어진다.
오늘 저녁은 멀리 나가지 않고 이 알베르게에 붙어있는 바 겸 카페테리아에서 먹기로 한다. 날씨도 우중충한 데다, 워낙 둘 다 추위에 떨다 몸을 녹이니 컨디션이 썩 좋지 않다. 그래도 뜨겁게 데워져서 나온 피자는 만족스러운 저녁식사 거리. 빵을 배달하는 빵집 아저씨, 바에서 일하는 엄마를 보러 온 귀여운 아들내미, 피자 한판을 혼자 해치우고 있는 소방관 청년. 시끌시끌해 보이지만 평화로운 풍경과 함께 하루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