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엄마랑 순례길 -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11월 4일
프랑스길 Sarria - Portomarín 22.4
푸른 새벽, 사리아에서의 순례를 시작한다. 마을이 꽤 크기도 하고, 순례자들이 확실히 많은 마을이다 보니 사방에서 길을 나서는 순례자들을 볼 수 있다.
사리아의 첫 시작은 오르막길. 저 멀리 왠지 순례자의 행색으로는 보이지 않는, 얇은 운동화와 옷가지로 가득 찬 에코백을 든 젊은 여성이 보인다. 아마 한국인이라면 타지에서 한국인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치가 생겼으실 게다. 빨간 틴트로 물든 입술, 하얀 얼굴, 꽤 스타일리시하게 꾸민 모습이 누가 봐도 한국인인 것 같았지만 굳이 말을 걸지 않는다. 오늘 순례를 처음 시작하는 한국인이라면 말 거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그녀를 지나쳐 엄마와 나는 성큼성큼 오르막길을 오른다.
순례를 처음 시작할 때, 처음 만났던 성당. 애틋한 마음이 들어 사진을 남겨둔다.
처음 묵었던 알베르게 문 앞 사진. 그리고 오르막길.
어느 유럽 시골 마을이든지, 아침을 여는 것은 빵집의 빵 굽는 냄새일 것이다. 사리아 구시가지에는 향긋한 빵 굽는 내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새벽 냄새, 따끈한 빵 냄새... 1년 전의 시작하던 마음이 살아나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 퐁퐁 솟아난다.
1년 전 이 언덕을 오르면서 느꼈던 벅찬 감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른 새벽, 파랗게 잠긴 마을을 내려다보며 길을 시작하는 기분은 몹시도 상쾌했다.
이 길을 처음 걸을 땐 노란 화살표를 찾지 못해 길을 잃었지만 이번엔 다르다. 길을 잘 찾아 내려가는데 저 멀리 한국인 청년들도 보여 인사를 한다. 레온 이후부터 계속 마주치던 독일 두 친구들은 서로 헤어지기로 했는지 각자 다른 장소에서 만나 인사를 했다. 오늘 길을 시작한 순례자들도 들떠 보인다. 카메라 렌즈 커버가 떨어져 있길래 주워 드린, 대만에서 왔다는 아저씨는 순례에 대한 기대로 몹시 들떠있다.
그나저나 갈리시아 아니랄까 봐 비가 추적추적 끊임없이 내린다. 지금은 11월 초순, 곧 갈리시아의 우기가 시작할 것이다. 줄곧 비가 내리기 전에 얼른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다.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배도 고프고 당도 떨어졌고 해서 바에 들르기로 한다. 마침 순례길 길목에 있는 알베르게 겸 바가 보인다. 앞뒤 마을의 바들이 많이들 문을 닫아서인지 잠깐 쉬고 가려는 순례자들로 북적인다. 독일 금발 친구가 눈인사를 하며, 여기 사람 엄청 많다고 말하며 고개를 내젓더니 바깥으로 나간다. 엄마와 나는 쉬고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로 또르띠야와 음료를 주문한 뒤 바 안쪽으로 들어간다. 마침 빈자리가 있어 앉으려고 하는데 순간 멈추고 말았다. 그 새치기 무리 전체가 있는 것이다. 그 새치기쟁이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슬쩍 모른 척하고 엄마와 나는 자리에 앉는다.
그때부터 내 귀는 최대로 오픈되어 그네들이 무슨 마을로 어떤 알베르게로 갈지 듣고 있었다. 오늘 사리아에서 출발했다면 8할의 사람들은 포르토마린으로 갈 것이 뻔하다. 그들도 그 8할 안에 들기 마련이다. 제발 같은 알베르게만은 아니길...!!
이야기를 듣자 하니 포르토마린의 몇몇 알베르게를 후보로 올려놓더니, 한참 설교(?)를 한다. 그 새치기쟁이는 자신이 거느리고 다니던 무리들에게 알베르게 찾기를 시키기도 하고, 음식 주문을 시키기도 한다. 완벽한 독재자로구나. 다들 이 길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는데 어쩜 저렇게 신기하게도 주종관계(??)가 뚜렷한 그룹을 만들 수 있었을까. 새삼 감탄한다.
마침 토마토와 치즈가 들어간 또르띠야가 나와서 엄마랑 신나게 흡입하다가 그들이 떠드는 것을 놓쳤는데, 갑자기 그 무리가 이 바 위층으로 올라간다. 내가 일본인 친구에게 너희 여기서 묵는 거야?라고 물어보니 수다쟁이 네덜란드 남자애와 일본인 친구는 그룹 중에 몸이 안 좋은 친구가 있어서 여기서 묵기로 했어하고 인사하며 얼른 새치기쟁이를 따라 올라간다. 오..!! 포르토마린으로 가지 않는구나!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순례길 특성상 한번 길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웬만하면 다시 만나기 힘들다. 이제는 다시 보기 어렵겠구나 야호!
발걸음도 가볍게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제 그 기분 나쁜 친구들을 다시 볼 걱정은 덜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밭들을 가로질러 놓여왔던 돌담들.
1년 전 딱 이 자리에서 이렇게 셀카를 찍었었더랬다.
주로 엄마 사진을 찍을 땐 꼭 5번 정도 찍는데, 엄마가 점점 사진 마지막으로 갈수록 그만 찍으라고 화내신다. 오른쪽은 그 화내고 있는 현장 고발.
사리아부터는 드디어 산티아고까지 100km 이하가 된다. 천대에서 시작했던 나로서는 기분이 정말 묘하고도 뿌듯하기가 그지없으면서, 의외로 별 감정이 들지 않기도 한다. 숫자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체감해서일 수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서부터는 숫자 표시가 들쭉날쭉에다 제멋대로이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다. 산티아고까지는 정말 며칠 남지 않았다.
포르토마린까지 몇 km 남겨두지 않은 지점. 마을 할아버지들이 쉬고 있는 벤치에 앉아도 되는지 물으니 흔쾌히 자리를 내어주신다. 그 자리에서 물 마시는 엄마.
지평선에 포르토마린이 보인다. 포르토마린은 강 위의 하얀 마을이라 유난히 빛나 보인다. 마침 하늘도 맑게 개어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정수리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도착하는 것이 좋겠다.
갈리시아는 소들이 많은 곳. 사방에서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포르토마린으로 넘어가는 길은 3갈래가 있다. 엄마와 나는 무릎의 안전을 위해, 가장 돌아가는 1번 길로 가기로 한다. 작년에 2번 길로 갔을 때 내리막길이 제법 가팔랐던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하얗게 빛을 반사하고 있는 포르토마린
다리를 건너야 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엄청 후들거릴 높이. 나는 진짜 벌벌벌 떨며 건넜다.
포르토마린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랜드마크와 같은 계단.
포르토마린 성당 앞.
1년 전 내가 점심을 먹었던 포르토마린 성당 옆의 레스토랑. 특별한 맛집이라거나 하진 않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 곳은 순례 시작의 따뜻한 환대로 기억에 남은 곳이다. 엄마와 나는 갈리시안 수프가 포함된 오늘의 메뉴를 맛있게 먹는다. 다른 곳 갈리시안 수프도 많이 먹어봤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이곳의 수프가 가장 맛이 좋았다. 고기도 무난하고, 감자튀김도 갓 튀겨 나와 그럭저럭 괜찮다. 무엇보다도 과하지도 냉랭하지도 않은 직원의 친절이 가장 만족스럽다.
오늘 묵는 알베르게는 꽤나 깨끗하다. 주방도 잘 갖추어져 있어 맘에 든다. 라바날 델 까미노에서부터 계속 마주치는 젊은 부부도 우리와 같은 방에 묵게 되었다. 오늘 아침에 길에서 보았던, 오늘 순례 첫 시작이라는 젊은 한국인 아가씨도 같은 방이다.
저녁 7시 반,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전 미사가 있다 하여 참석하기로 한다. 성당 근처의 기념품샵을 한참 들여다보기도 하고, 엄마가 깜빡하고 가져오지 않은 충전기도 산다. 미사에는 순례자들 이외에도 동네 할머니들 할아버지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과하게 꾸미지 않는, 소박한 모습의 제단과 가능한 만큼 정성을 다해 바치는 미사였다. 하느님을 위해 마음을 바치는 미사인지, 아니면 앉아있는 이들과 미사를 바치는 신부의 과시욕을 채우는 미사인지 헷갈리는 그 어딘가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참 묘한 기분이 든다.
축복을 가득 받고 내일 길을 위해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간다. 개 짖는 소리가 울리는 강가 마을의 밤이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