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승무원이 되었나
2015년 여름, 영국에서의 교환학생을 끝내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벨기에 브뤼셀의 한 호스텔에서 짐을 풀던 도중, 한국인 여성분과 마주쳤다. 그분은 무척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자신을 ‘승무원 준비생’으로 소개했다. 브뤼셀 근처 소도시에서 열리는 중동 항공사 승무원 면접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그때 내 반응은 ‘에? 승무원 면접 보러 유럽까지 오셨다고요?’ 사실 당시 나의 반응은 놀라움 보다도 ‘경악’에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아니, 승무원이 뭐라고 그 많은 돈을 들여 유럽에 와서 면접을 보나…?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은 가족들과 미국에서 살고 있고, 한동안 몸이 안 좋아 오랫동안 쉬었다고 했다. 체력을 회복하고, 꿈꿔왔던 승무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여기 왔다는 것이다. 그러곤 대뜸 내게 말했다. ‘같이 면접 보러 가요!’
당시 나는 승무원이란 직업에 단 1도 관심이 없었다. 사실 그 직업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던 터였다. 단지 비행기 안에서 음식 제공해주는 서비스업 정도랄까… 나는 그분이 그냥 빈말로 제안하신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해본 소리치곤 몇 번이고 거듭 동행하자고 하셨다. 나는 그때 확고한 다른 진로가 있었기에, 정중히 사양을 했다. 그분은 그렇게 면접을 보러 다른 도시로 이동하셨고, 꼭 꿈을 이루셨으면 하는 마음에 진심으로 행운을 빌어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3년 뒤, 내가 똑같이 유럽에서 면접을 보러 다닐 걸 모르고서 말이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학업을 마무리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뭘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승무원'이란 단어를 꺼내게 되었다. 사실 나는 한때 ‘기자’를 꿈꿨다. 서울에 올라와서 이모 집에서 신세 지며 캐나다 기자님의 인터뷰 보조 역할로 경험을 쌓고 있었다. 취재를 나가거나, 스터디 모임에 나가서 공부하거나 혹은 비는 시간에는 집 근처 도서관에 왔다 갔다 하며 간간이 뜨는 영어 신문 기자 직을 준비했다.
아주 맑게 갠 날이었다. 우리 동네는 비행기가 지나가는 길에 자리 잡고 있어, 그날도 마침 비행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며 유럽에서 짧게 지냈던 시절을 돌이켜 봤다. 그 시절, 나는 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 취업을 준비할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 한편이 답답하고 까마득하게 느껴졌었다. 확실한 목표는 있었지만,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자신감'이 없었다. 그리고 그걸 이루기 위해 몇십 년을 한 공부를 계속해야 하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 하늘 위 비행기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아, 내가 이미 그 현실에 빠져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게 됐다. 유럽에서 짧게나마 이국적인 풍경 속을 누비던 그 순간들이 떠오르며 ‘아, 내가 원했던 게 바로 그건데.’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외국에서 일하고 여행하는걸 꿈꿨었다. 근처 가까운 나라조차 여행 한번 해본 적 없는 부산 토박이 소녀였던 나는, 외국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번듯한 직업을 가지게 되면 그걸 이룰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까지, 심지어 그 순간까지도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에 매진했던 것은, 사회적인 출세로 언젠가는 자유롭게 외국을 오갈 거라 믿었던 그 신기루를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항에만 가도 좋아
그날 후, 나는 모든 진로를 승무원으로 맞춰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고 있던 인턴 일도 그만뒀다. 지인들은 나의 갑작스러운 결단에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일단 나와 승무원의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승무원은 단지 비행기에서 서빙하는 일이다, 외국 가서 여행할 시간 없이 일만 하다 돌아온다 등등… 직업적인 면에서도 나의 이상과 많이 다른 직업이라는 것이다. 그땐 뭣도 모르고 겁도 없이 ‘나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라고 생각했다. (웃음) 그리고 이국적인 도시에서의 긴 레이오버가 없어도 괜찮다 생각했다. 내가 세계 여러 곳에, 공항에서 만이라도 그 땅에 발만 디디는 것 자체로도, 한국 땅을 벗어나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그 기분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인생'을 거부합니다.
쉬울 줄만 알았던 승무원 준비를 2년간 하며 두 번의 회사를 다녔다. 첫 번째 직장은 소위 말하는 악덕 직장이었고, 두 번째 직장은 타이틀이 번드르르 하지만 사실 외주 업체 소속으로 어느 정도 정직원과 차별 대우가 있는 곳이었다. 짧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건 '아 이러다 진짜 일만 하다 죽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밤낮으로 일하니 자기 계발을 할 시간이 없고 연애할 시간이 없었다. 내 월급은 쥐꼬리 만한데, 이미 나의 사회적인 지위가 이 '월급'으로 결정 나 있었고 발전 가능성 또한 미미했다. 그리고 그 현실을 다른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있었다. 나의 인간관계, 미래의 발전 가능성, 행복 지수까지 이미 결정된 것 같았다. 이러다 언젠가는 나처럼 그저 그런 사람이랑 만나서 결혼하겠지. 쥐꼬리 만한 월급에 허덕이며 먹고사는 일에만 고민하겠지. 나보다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며 자존감이 끊임없이 낮아지겠지… 이런 생각을 했다. 한번 사는 인생, 내가 진짜 원하는 걸 하면서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야근 밥먹듯이 하고 청춘을 바쳐 일한 결과가 '그저 그런 인생'으로 마무리하고 싶진 않았다.
특별한 인생
그래서 나는 승무원이란 직업을 택했다. 세계 곳곳을 다니고,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것 자체가 값진 경험인데, 그걸 일로 할 수 있다니. 나는 지금 그걸 체감하고 있다. 세상이 정말 넓고, 몇천 년간 그곳에 나랑 같지만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단 걸 느끼고 있다. 그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고, 일을 하고, 또 승객으로 만나 대화를 하면 나도 그저 수많은 지구인들 중 한 명이구나 느낀다. 한국인의 정체성에 자긍심을 가지는가 하면, 다른 문화에 대한 겸손함도 가지게 된다. 먼 곳으로 비행을 하면 더 느끼는 것 같다. 지구 반대편 리우 데 자네이루와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갔을 때 만났던 한국인 2·3세들, 중국인처럼 생겼는데 포르투갈어만 하는 아시아인들, 브라질인의 정체성을 가진 일본인 2·3세들. 사람들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책상 앞에서는 절대로 느끼지 못할 것들을 말이다. 나는 승무원으로 '일을 한다'기 보다, 한 사람으로서 매일매일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내가 특별하다 느껴진다.
만약, 그때 내가 그분을 따라갔더라면
승무원 준비생으로 2년간 힘든 시간을 보내며 진심 반 농담 반으로 후회했던 것 같다. ‘아, 만약 내가 그때 그 승무원 준비생을 따라갔더라면!’ 외항사 승무원은 시기를 잘 타야 하는데, 외국 항공사들이 채용 문을 잠갔다 여는 기간이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이 되기 때문이다. 하필 내가 준비를 시작하던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승무원 준비생 사이에는 ‘공채 가뭄’으로, 특히 중동 항공사들이 한국인 채용을 멈춘 상태였다.
사실, 유럽 여행 도중 또 한 번의 ‘신호’가 더 있었다. 여행의 막바지 즈음, 나는 스위스 베른의 호스텔에서 중동 항공사 승무원을 만났다. 한국인인지 모를 정도로 정말 이국적인 외모를 가지신 아름다운 분이셨다. 우연히 서로 한국사람이란 것을 알고 반가워, 그분을 배웅한 기차역에서 커피 한잔을 했다. 두바이 베이스인 LCC 항공사에서 근무하고 계셨고, 비교적 휴가 쓰는 것이 자유로워 약 한 달간 유럽 여행을 오셨다고 했다. 한국의 꽉 막힌 사회에서 벋어나 자유롭게 일하고, 시간을 내 여행을 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멋있게 기억에 남아 있다.
‘관심 있으면, 외항사 승무원 도전해 보는 게 어때요? 외국 생활을 좋아하고, 영어 사용하는 거 좋아하면 딱일 거 같은데.’ 이야기 도중 그분이 내게 건넨 말이다. 나는 손사래 치며 내게는 다른 꿈이 있다, 나는 한국에서 취업할 거다 말씀드렸다. 그분의 조언은 당시 내가 그저 흘러 보낸 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큰 의미로 와 닿는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는 영국에서 살며 자유를 느꼈다는 점,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유럽에 나와있는 지금이라는 점, 다시 한국에 돌아가기 무섭다는 점 등…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분은 내가 진짜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 발견하셨고, 이에 맞춰 방향을 제시해주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
늦게 깨닫긴 했지만, 그분들을 만났던 게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다. '놓친 터닝포인트'말이다. 당시 나는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엔, 사회적인 성공과 다른 사람의 시선을 먼저 생각하는 '한국식 사고관'에 길들여져 있었다. 돌고 돌아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을 찾았구나, 생각이 든다.
다시 기회가 닿아, 두 분을 만나게 되면 살짝 부끄럽지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비록, 그땐 지나쳤지만 뒤늦게 깨닫고, 그분들과 똑같은 꿈을 꾸고 이루게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