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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yaya Feb 05. 2020

달과 6펜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리뷰

최근 등록한 독서모임에서 <달과 6펜스>를 곧 진행하기에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이 책은 고갱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것으로 꽤 유명했나 보다. 이전에는 전시회를 즐겨 갔었고, 고갱의 작품도 드문드문 대형 전시에서 보였던 터라 고갱을 어떻게 소설로 표현했는지 궁금했다. 두 개의 출판사로 읽었는데, 모두 고갱의 <노란 예수의 자화상,1890-1891>을 표지로 선택했다. 대놓고 이 책은 고갱의 삶을 그렸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뒷배경으로 그려진 예수는 고갱의 이전작인 <황색의 그리스도>와 동일하다.

(좌)펭귄 클래식의 표지, (우)민음사의 표지 / 두 출판사 모두 <노란 예수의 자화상>을 선택했다.

하지만 소설을 덮고 나니 <달과 6펜스>는 고갱의 일대기를 그렸다기보단, 고갱의 삶에서 재미있는 부분만을 취사선택하고, 예술가의 기벽에 착안해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낸 것에 더 가깝단 느낌이다. 작가 서머싯 몸은 고갱의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가상의 캐릭터인 찰스 스트릭랜드를 창조하고, 소위 '예술가의 일대기'를 <달과 6펜스>에서 그려낸다. 그리고 서머싯 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진다.


예술가에겐 다른 도덕적 기준이 적용될 수 있는가?

찰스 스트릭랜드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는 직장인이며 부인, 자식이 있고 이들을 부양할 의무가 있다. 우리네의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다. 다소 비사교적인 성격까지 말이다. 그러나 한 순간에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파리로 떠난다. 심지어 파리에서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주고 챙겨주는 한 남자(스트로브)의 아내마저 (의도하진 않았지만) 취하게 된다.


우리는 예술가의 이러한 반사회적 기질들에 익숙한 듯싶다. 예술가들의 바람기는 애교 수준이다. 그리고 은연중 위대한 예술가로 추앙받는 사람들의 성격과 그들의 작품을 분리시킨다. 디에고 리베라의 거대한 벽화 전시 작품을 보며, 그의 미친듯한 바람기를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스트릭랜드는 관찰자인 화자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비친다. 그러나 화자는 스트릭랜드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사후에 모두에게 추앙받는 그의 모습을 목격한다. 우리는 거기에 동조할 수 있는가? 사실 우리는 이미 그렇다. 사회가 예술가를 윤리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고전'이라 불리는 몇몇 저작들과 그림들은 이미 분서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이러한 이중잣대를 지속해야 하는가는 나로서는 의문이다. 사실 난 이전에 열렸던 디에고 리베라의 전시회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고통받은 프리다 칼로가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깥으로부터의 자유, 안으로부터의 자유

펭귄에서 출판된 책의 앞부분에 한 비평가는 이 책에 등장하는 스트릭랜드의 자유분방함을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었다. '바깥으로부터의 자유'와 '안으로부터의 자유'가 그것이다. '자유'를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자유란 달성하기 매우 어려운 주제가 될 수도 있다.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사회적 감시의 눈길을 무시하고 가족과 직장을 버리고 하고 싶은 것을 향해 직진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해서 자유가 쉽게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자아실현'과 '꿈', 그리고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은 매우 드물게 성취되는 행운에 가깝다. 우리는 주저한다. 발 앞에 놓인 6펜스를 포기하고, 달을 향해 뛰면 말 그대로 굶어 죽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달과 6펜스>는 이러한 지점들을 공략하여, 독자에게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트로브 대 스트릭랜드

어릴 적엔 누구나 자신이 빠른 시일 내에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좌절을 겪기 전까진 말이다. 어쩌다 보니 난 달을 쫓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나태해졌고, 겨우 6펜스를 벌며 연명하고 있다.


스트로브도 그런 사람이다. 작가는 스트릭랜드의 예술가적 기질과 대비해 스트로브를 희화화했다. 스트로브는 화가이지만 변변치 않은 작품만을 그리며 살아간다. 뱃살도 나오고 얼굴도 그저 그렇다. 아내에게 헌신하지만, 아내는 그가 사랑하는 만큼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 가난한 화가들에게 돈을 잘 빌려주고, 그 답례로 비웃음을 산다. 심지어 스트릭랜드를 보살펴준 대가로 아내마저 그에게 빼앗긴다.


난 이렇게 희화화된 스트로브를 보며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스트로브는 나의 모습이다. 꿈을 어느 정도는 접은 채 그저 그렇게 연명하고 있는 삶 말이다. 하지만 스트로브와 스트릭랜드의 삶 중에서, 단 한 가지만을 택하라고 한다면 난 여전히 스트로브에게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많은 부침을 겪고, 멍청한 실수도 저지른다. 배신도 당한다. 하지만 돌아온다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하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도 한다. 이 또한 삶의 한 가지 양태이며, 영원회귀해도 언제나 다이내믹한 인간의 굴레가 아닌가.

like so many young men he was so busy yearning for the moon that he never saw the sixpence at his feet.
-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를 보고 익명의 독자가 남긴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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