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글은 가인지 캠퍼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부탁은 좀 그렇겠죠? 아무래도 구성원들이 피곤하니까요. 나는 마치 연기대상을 탄 지현우처럼 머쓱하게 회의실을 나왔다. 교육 전에 서베이를 돌리는 건, 그리고 프로젝트 전에 FGI(Focus Group Interview)를 하는 건, 뭐 대단한 걸 해줄 것처럼 FGW(Focus Group Workshop)을 하는 건 아무래도 저 혼자 들떠서 오버하는 거겠죠? 아무래도요. 아무럼요. 물론 그런 말을 하는 상대방도 뒷맛이 씁쓸해 보였다. 우리는 '아무래도요, 아무럼요, 아무라 해도요.'하고 헤어졌다.
종종 어떤 교육과 프로젝트는 사실은 FGI, FGW, 서베이 없이 시작되기도 한다. 내가 많이 듣는 말로는 '저희가 옛날에 조사해 둔 자료가 있는데 그거 보시면 됩니다.' 또는 '비슷한 조사 해둔 게 있으니 안 하셔도 됩니다.'이다. 물론, 어쩔 땐 내 마음이 더 편하기도 하다. 가끔가다 조직이 나에게 뭔가를 해줄 거라는 기대에 들뜬 인터뷰이들을 볼 때마다 현실과 이상의 까마득한 낙차를 나 혼자 생각하곤 눈을 질끈 감기도 하니까 말이다. 서베이든 FGW든 프로젝트 초반의 활동이 거창해질수록 결과에 대한 실망은 더 커지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하철 명언이라는 것이 회자되지 않았는가.
프로젝트 시작에는 직선이라, 구성원들의 요구였다 생각했지만 뒤로 돌아보면 굽어져 있는 경우 말이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이 정말 구성원들의 요구였을까? RFP(Request For Proposal)에 있었던 말은 맞는데 말이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서베이에 피로도가 높은 구성원들의 참을성 문제일까, 아니면 적극성 문제일까. 아니면 교육담당자들의 잦은 서베이 문제일까. 아무것도 바꿔주지 못했던 컨설팅펌의 문제일까?
번아웃을 다룬 책 ⌜잘 나가는 조직은 무엇이 다를까?⌟에서는 생뚱맞게 이러한 내용을 다룬다. 시작은 이러하다. 아무도 쓰지 않는 탁구대, 건물 옥상에 방치된 배구장을 보며 '그돈시(그 돈이면 X-bal..)'를 외치는 구성원이 나온다. '그 돈이면, 그 돈이면 우리 팀에 사람을 한 명 더 뽑을 텐데! 진정 탁구대와 배구장이 구성원의 니즈(Needs)였습니까!!! 대표님!!!!! 혹은 이걸 진행한 HR이여!!!!' 소수만 사용하는 복지나 조형물은 비아냥거림의 표적이 되기 쉽고, 미용실과 같은 과도한 복지는 필요 이상으로 체류 시간을 길게 만들 뿐이다. 머리는 야근 중에 자르지 말고, 퇴근하고 자를 수 있도록 하자.
설문조사와 관련하여 ⌜잘 나가는 조직은 무엇이 다를까?⌟의 주된 주장은 이것이다. 설문 이후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데이터 시각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설문 결과를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막막한 경우가 있다. 또는 조직문화상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내부방침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정말로 '보여줘야 하는지 몰랐어요!'의 경우가 있겠다. 절망스럽게도 마지막 경우가 가장 다수를 차지하지 않을까? 실제로 'FGI를 하면서 각 부서의 고충을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 같았다.'라고 하는 담당자도 만나본 적이 있다.
매슬랙은 조직들이 겪는 큰 문제 중 하나로 압도적인 횟수의 설문 때문에 사람들이 느끼는 피로감을 꼽았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설문을 많이 하는 것만 비난할 일이 아니라 데이터를 얻은 후 딱히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을 비난해야 한다. ⌜잘 나가는 조직은 무엇이 다를까?⌟ 4장. 번아웃 측정 방법
계속해서 이렇게 데이터를 제공하기만 하고, 체감되는 것이 없을 때 구성원은 '학습된 무기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결국 그다음 서베이에서는 솔직하게 자신이 느끼는 것을 가리키기보다는 모두 보통(3)을 찍거나, 매우 좋음(5)을 찍고 구글폼의 제출 버튼을 눌러버리게 된다. 그런 결과를 원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매슬랙은 이러한 데이터를 '쓰레기 데이터'라고 부른다.
매년 같은 문항으로 반복되는 데이터, 매년 발표되지 않는 결과, 매년 바뀌지 않는 조직.. 구성원의 진심은 비싸다. 그런 진심을 무료로 요구해 놓고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은 결과, '아무래도 설문은 좀..'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문항수가 적으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질문, 시의적절한 FGI 시점, 직원의 참여를 주저하게 만들지 않는 프로세스..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고, 이것이 결국 조직의 번아웃을 섬세하게 관리하는 것과 직결된다.
의견을 청해놓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또다시 진심 어린 의견을 나누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가?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아무것도 묻지 않는 편이 낫다.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으려면 더 오랜 시간과 큰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조직은 무엇이 다를까?⌟ 4장. 번아웃 측정 방법
박연준의 ⌜고요한 포옹⌟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손을 다치는 이유는 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치는 이유는 마음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음을 쓰고 싶지 않을 때 숨는다. 정확히는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을 때 숨는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이지 싶다. 진심을 썼던 구성원과 담당자가 만나서 서로 다치지 않게 하고 싶으니 그런 것 아닐까.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싶다.
관련하여 ⌜잘 나가는 조직은 무엇이 다를까?⌟의 4장. 번아웃 측정 방법을 정리해 둔 글은 아래에 있어요.
책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아래의 가인지캠퍼스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