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다혜ㅣ Grey Mar 23. 2024

머리를 감으면서 하는 생각


최근 MBTI와 관련하여, SNS에서 화제가 된 글이 있다. 직관형(N)인 사람들은 머리를 감을 때 흑역사부터 시작하여 기후변화까지 걱정하는 반면, 감각형(S)인 사람들은 그저 머리만 감을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나 또한 만만치 않은 N으로서, 머리를 감을 때면 내 인생의 모든 흑역사를 계속해서 끄집어낸다. 노력해서 떠올리는 것도 아닌데, 샤워기의 미지근한 물을 머리에 대는 순간 파블로프의 개처럼 온갖 흑역사가 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 중의 80% 정도는 사회생활 초년생일때의 일화이다. 


모 대기업 재직 시절, 퇴사할 때까지 대리님을 ‘ㅇㅇ이 언니'라고 불렀던 일. 자리에 앉아서 팀장님께 내 자리까지 ‘오라고' 호출했던 일. 사수, 대리님, 과장님이 미처 짚지 못했던 점을 정리해서 바로 팀장님께 보고했던 일. 고등학생도 아니면서 사무실에서 구내식당까지 뛰어다녔던 것 등.. 수많은 지각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수많은 흑역사 중, 그나마 지면에 실을 수 있는 것만 간추려서 썼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져 자세를 고쳐앉게 된다. 


선배가 된 후에 나같은 후배를 만나지 않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런 나를 계속해서 용납해준 선배들을 향해 매일 머리를 감으며 고개를 숙인다. 한동안은 계속해서 살다보면 나의 흑역사는 계속해서 우상향하는 것이 아닌가, 흑역사의 총량은 계속 증가되는 게 아닐까 생각되어 아찔했던 적이 있다. 일본 드라마 <오키테가미 쿄코의 비망록>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산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우왕좌왕하고 아둥바둥하고 꼴사납고 한심하고 자신을 싫어하게 될 것같은 매일이다. 그래도 여기에 있어. 살아있어. 그러니 너도 살아남아 수치를 당하고 계속해서 살아가자. 한심하고 창피해서 도망치고 싶어지는 기억과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자.” 


한편,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거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 미성숙한게 아닐까? 종종 작년, 제작년에 썼던 글이나 만들었던 자료를 찾아본다. 그 때마다 용케 이런 글을 써서 지면에 실었구나, 어떻게 이런 제안서가 통과됐을까 싶을 때가 있다. 그것 또한 나의 흑역사이다. 즉, 당시에는 잘못된 행동인 줄도 모르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동도 반복하다보면 성장이 되는 것 같다. 2차원의 세계에서 제자리를 돌고 있는 것 같지만, 나선형을 그리면서 3차원의 세계로 입체적으로 성장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성공가도를 달릴 수도 없고, 아무런 시행착오 없이 성장할 수도 없다. 아무리 있는 힘껏 달려왔다고 하더라도 언제든 되돌아보면 ‘한심하고 창피해서 도망치고 싶어지는 기억'이 생긴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에서 아쉽거나 부족한 점을 찾지 못하는 것 또한 성장하지 못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과거의 단계에 머물러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지금 쓰는 이 글도 나의 새로운 흑역사가 될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성장이란, 나의 모순, 미완, 한계를 수용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부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벽을 밀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우왕좌왕하고 아둥바둥하면서 꼴사납고 한심한 이 과정을 덜어내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고 온 몸으로 겪어보려 한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나의 결과물과 함께 계속 살아가자.  


** 글로벌 이코노믹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g-enews.com/article/Opinion/2024/03/202403201425119644e8b8a793f7_1

매거진의 이전글 [가인지캠퍼스] 아무래도 그런 부탁은 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