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나온 곳들은 다 가봐야 직성이 풀리냐는 그의 싫은 소리에도 어쩔 수 없더라. 가서 보고 공감하면서 내용들을 다시 복기해야만 책 한 권을 다 읽은 것 같은 그 느낌적인 느낌(사실 난 이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느낌적인 느낌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니? 그러면서도 쓸 수밖에 없는 나는 또 뭐고.)말이야.
금둔사를 알게 된 건 공지영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수필에서였어. 납월매화를 보러 금둔사에 들렀다고 하더라. 우리나라에 몇 그루 안 되는 납월매화가 그곳에서 핀다면서. 납월은 음력 섣달을 이르는 말인데 그즈음 피는 매화를 납월매화라고 한대. 곧 설중매를 일컫는 말이지.
이름마저 낯선 금둔사가, 납월매화가 그렇게 내 삶으로 들어왔어. 어느 날 아침 주암호 길을 따라 구절구절 차를 몰았단다. 유명사찰에 비해 작고 생소해서인지 사람들도 거의 없이 무념이 고요하더라. 덩달아 발걸음도 조심스러워졌지만 건물들의 나열이 소박하고 푸근해서 금세 편안해졌어. 인간미가 느껴지는 사람들의 흐트러짐처럼 말이야. 때마침 만개한 선홍빛 납월매화 한 그루에 살며시 기대 보았지. 등에 스며드는 차갑고 낯선 기운이 싫지 않았던 이유는 바야흐로 나무와 내가 서로 물들기 시작했던 때문일 거야.
흐드러진 매화들을 화관처럼 머리에 이고 앉아 저 멀리 들어오는 풍경에 취해서 너에게 사진 한 컷을 보냈지 아마. 그렇게라고 도시에 있는 너에게 남쪽의 이른 봄을 알리고 싶었어. 너는 내 마음의 봄이 따듯이 읽힌다며 아침나절 서설이었다고 눈 풍경을 보내왔었지. 그렇게 너와 내가, 꽃과 눈이 만나다 헤어지다 세월이 흐른다고, 몇 번 더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어느 왕 때 창건했고 어떤 전쟁 때 소실돼서 어느 왕 때 재건했다는 등의 사찰을 알리는 입간판 텍스트들은 왜 하나같이 재미가 없을까. 달뜬 분위기에 돌멩이 하나 툭 던지는 듯한 텍스트가 조금 거슬렸지만 꽃잎들이, 향기가, 풍경이 이미 들어선 내 마음을 어쩌진 못했단다.
첫사랑처럼 가장 먼저 핀다는 납월매화
제이야, 그런 날이면 열아홉 살 첫사랑이 잠깐 떠오르는 일은 자연스러운 마음의 소요겠지. 마치 그런 내 마음이라도 눈치챈 듯 공지영 소설에서 다시 금둔사를 만나게 돼.
‘먼바다’는 여주인공이 페이스북을 통해 40년 만에 닿은 첫사랑을 만나는 여정을 그리고 있어. 주인공이 마이애미에서 심포지엄을 마치고 뉴욕으로 향하는데 비행기에서 딸로부터 도착한 문자를 열자 금둔사가 불쑥 나타나.
‘엄마, 금둔사에 홍매화가 피었어..... 온 땅이 두근두근거리며 새싹! 새싹! 하기에 하도 시끄러워서 잠을 설치고 말았어.’ 그 소리에 맞춰 뱃속의 아기가 배를 찼다고 생명 속에 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여자라는 사실이, 자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는 내용이었지.
주인공은 할머니가 되는 일이 딸이 미혼모라는 것을 망각하게 할 정도로 멋진 일이라는 걸 알아. 딸아이에게 릴케의 시를 보내고는 그때부터 아이의 태명을 릴케가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 ‘루’라고 부르지. 근사하지 않니? 자칫 남루해질 법한 삶을 섬세하고 뽀송뽀송하게 그려내는 공작가가 더 좋아졌지. 그녀의 필력, 감성 그리고 따듯한 시선, 그래서 금둔사도 단번에 끌렸던 걸 거야.
주인공은 고백해. 만남은 잔잔한 바다 같았다고. 40년이나 늙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고. 마치 쑥쑥 자라나는 흰머리를 일 삼아 염색하면서, 그러면서도 건강을 염려하면서 언제쯤에나 흰머리를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을까, 생각 많은 내게 하는 말 같더라. 조금 위로가 되기도 했지.
깊은 밤 뉴욕의 폭풍 속에서 주인공과 첫사랑은 다시 만나. 소설은 거기서 끝나지만 누가 봐도 스치는 만남이 아닌 시작되는 만남이라는 걸 눈치채고야 말지. 그 여운이 하도 생생해서 되레 슬프더라. 쓸데없는 상상으로 소설을 조금 더 써내려 갔단다.
삶이 촉촉해지는 이유는 그런 상상 때문일 거야. 스치는 재회라도 첫사랑을 마주하는 상상. 그 정도의 딴마음은 한 번쯤 품어도 되는 거. 그 소설이 내 마음으로 쑥 들어온 것은 비슷한 첫사랑의 기억 때문이었어. 신학생이었다가, 수도자였다가, 봉사자였다가 어떤 여인의 사랑에 이끌려 결국 수도생활을 마쳤던 그. 그의 결혼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전화를 했던 내 친구는 차마 그 말은 뱉지 못하고 안부만 물었는데... 위로 같기도, 체념 같기도 했던 그때 친구의 목소리가 그의 결혼소식을 안 뒤에야 이해됐었지.
납월매 꽃잎들 사이로 해가 진다. 차갑고 맑은 빛을 받아 더욱 선명해지는 꽃잎들에 눈이 시려서 흘러간 것들 보다야 지금 이 순간이 훨씬 더 찬란해야 한다고 담담하게 마음을 다져본다. 그러니 오늘도 잠깐, 스스로 빛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