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훔치다 13.
여린 비가 흩뿌린다. 비에는 이력이 나서 이쯤이야 별스럽지도 않다. 그 이력이 준비성을 키웠다. 비옷 하나 챙겨 길을 시작한다. 저지리. 이름도 거리도 익숙하다. 2년 전 폭우에 걸음을 포기하고 들었던 숙소는 여전히 저지오름 밑에 자리하고 있다. 그다음 날 전날 치까지 두 배로 맑았던 풍경은 지금까지 빛 부신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감자꽃에 취해 멍 때렸던 카페의 전망은 메밀꽃이 자리하고 있다. 감자꽃을 못 잊어 왔다는 내게 메밀꽃도 차마 못 잊을 거라며 여주인장의 미소가 심상치 않다. 한 송이로도 어여쁜 꽃이 있지만 한 다발이었을 때 더 어여쁜 꽃들이 있다. 그리고 들에 무리져 더 어여쁜 꽃들이 있다. 감자꽃이나 메밀꽃이 그렇다. 너른 들에서 소금을 흩뿌린 듯(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에서 인용) 정갈하게 어여쁜 꽃의 제일은 메밀꽃이라는 것을 오늘 안다. 어쩐지 여 주인장의 미소가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무르익어가는 녹음을 곁 하여 걷는 길은 지침도 덜하다. 시간이 생각보다 훌쩍 지나간다. 월령포구에 도착하니 관광객이 많다. 아이들과 올레길을 걸으면서 제주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을 텐데 아쉬움이 든다. 나 역시 그러지 못했다. 유명 관광지가 제주의 모습이라 생각했고 차로 몇 군데 돌고 나면 제주를 다 본 듯 생각했었다. 밤호박도, 수박도, 수경딸기도 어엿하게 자라고 있는 고즈넉한 들녘을 지나고 노랗게 익어가는 보리밭도 스친다. 보리를 구워 손으로 비벼먹던 맛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의 추억에는 무엇이 깃들어 있을까.
“나도 어릴 때 한시도 가만있지 않았어?” 장난스레 지나치는 어린아이들을 보더니 문득 딸아이가 묻는다. “너는 메밀꽃 같았어. 항상 잔잔해서 말썽쟁이 니 오빠 꽃받침 같았지.” 그러고는 뱉지 못한 말이 있었다 ‘너는 너로서도 엄마 기쁨이었지만 엄마 삶에 큰 보탬이 되었단다.’ 꼭 해야 할 말인데 모녀지간에도 쑥스러운 말이었다.
두 달간의 출산휴가가 끝나고 딸아이를 친정에 맡겼었다. 주말에 내려가 아이를 보고 일요일 막차로 올라오고 나면 아이가 부엌 쪽으로, 마루 쪽으로 보행기를 밀고 다니더라고, 꼭 에미를 찾는 것만 같더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지금도 마음이 아리는 일이다. 가끔 그때로 되돌아가 생각해 본다. 내 커리어보다는 경제적 여건 때문에 일을 놓지 못했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요즘이야 경제적 여건보다는 커리어를 더 중요시 생각하지만 여성이 갖는 이중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무게로 따라온다. 청년들이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은 사회적으로 표현되는 이유들도 있지만 특히, 여성들의 결혼기피 사유는 육아나 가사, 시댁 문화 등에서 여전히 가부장적인 현상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가는 여성들의 의식변화 속도와 결혼문화의 속도가 반비례하다는 것이다.
금세 금능포구에 든다. 월령과 협재 사이에 있는 작은 포구. 굳이 찾지 않으면 지나치고 말 것 같은 조용한 바다. 공부 잘 한 첫째와 말썽쟁이 셋째 사이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자기 할 일 하는 둘째 같다. 네이버에도 나오지 않는 둘째네 식당으로 들었다. 웬걸 사람들이 제법 많다.
해안을 걷다 보면 군데군데 풍력발전기를 만난다. 저 멀리 바다 위에서도 여러 기가 돌아간다. 해안으로 바짝 붙어 돌아가는 거대한 발전기의 모습은 자못 두렵다. 혹 저 날개가 떨어지면 어쩌나... 물론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불안한 생각이 드는 건 과연 나만 그럴까. 예기치 않았던 이런저런 사고들은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은 부디 쓸데없는 생각으로 남길 바라며 발걸음을 뗀다.
그래서인지 앞서간 다 큰 아이가 보이지 않아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혼자 걸으면 내 몸 하나 챙기면 되는 것을 둘이 걸으면 걱정이 배가 된다. 딸아이도 매한가지여서 모퉁이를 돌 때마다 이쪽이다, 저쪽이다 손짓을 해주고 내가 안 보이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두 배로 커진 서로의 걱정을 사이좋게 나눠 갖는 길이 된다.
야생화들의 뿌리는 어디일까. 굳이 바위틈을 타고 잎을 펼치고 꽃을 피운다. 배경인 현무암은 그저 검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