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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진 Oct 04. 2016

"여기선 이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9. 어떤 방법론도 항상 정답을 주진 않는다

"이 다음엔 키워드를 놓고 그룹핑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 경우엔 그럴 필요가 없죠. 이미 답이 나왔는 걸요."

"그래도 이 기법은 원래 그런게 아니에요. 여기 보세요."

"음..."


위의 사례는 직접 경험한 것을 각색한 것으로, 다른 디자이너와 일하는 과정에서 생겼던 의사소통 사례이다. '디자인 씽킹'이나 '사용자 경험 디자인'이 강조되는 과정에서 기존과는 다른, '생각하는 디자인'이 주목받았고, 그 과정에서 '디자인 기법'이라는 것이 트렌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디자인 기법을 통해서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있을까?


이번 편은 적다보니 조금 오타쿠스러운 내용이 되었습니다. 표현력의 한계에 의한 것으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떤 디자인 기법도 담겨진 의미와 가치가 있다.


디자인 기법들은 다양한 케이스의 디자인 사례들이 모이면서 쌓인 경험적 지식이다. 즉, 디자인 기법이란 어떤 다른 이들이 이미 먼저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어떤 특정한 과정을 통해 디자인을 전개하면 도움이 된다는 일련의 공정을 정의해둔 것으로, 당연히 익혀두면 도움이 된다.


아래의 디자인방법론 페이지(http://designmethod.korea.ac.kr)는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정리해둔 내용인데, 미국 IDEO 사의 디자인 씽킹 방법론을 중심으로 몇가지 사례가 더해져 정리되어 있다. 이러한 기법들은 특히 어떻게 대상을 조사하고 연구하여 디자인을 기획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믿고 따를 수 있는 생각의 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 각각의 기법들은 조사하고자 하는 관점이 있으며, 찾고자 하는 가치를 지닌다. 방법론을 따라하면서 디자인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고 어떤 가치를 찾아야 하는지 익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단계에 이르지도 못하고 겉핥기 식으로 보고 직관이나 영감에만 매달리는 것은 천부적인 재능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으로 한계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물론 연역적으로 어떤 규칙을 통해 정수를 깨닫는 경우가 있는 동시에, 귀납적으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정수를 깨닫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순간이 오기도 전에 포기하게 될 수도 있는 만큼, 안정적인 방법을 택한다면 전자가 더 좋을 것이다.



불법(佛法)도 익히면 버려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방법론이라도, 그 정수를 익히고 내재화시키고 난 다음에는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은 옳지 않다. 디자이너의 목표는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것이지, 방법론에 충실한 좋은 사례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방법론도 그 자체가 가진 한계가 있다. 그 이유는 디자인 사례는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며, 시대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빗댈만한 가장 좋은 사례가 개인적으로 무협지라고 생각하는데, 고수가 되기 이해서는 처음에 다양한 검법 등을 익히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 법에 매달려서는 최고수의 반열에 들 수는 없다. 내공을 단단히 하면서 깨달음을 얻고 검법을 버리는 과정에서 비로소 최고수가 된다. 조금 대중적인 비유는 아니지만, 가장 적합한 대응관계라고 생각한다.


만류귀종, 좋은 디자인은 법을 버렸을 때 나온다.


어떤 상대와 결투를 벌인다고 할 때, 변화무쌍한 상대의 모든 검로(劍路)를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단순히 방향을 알아 그 움직임의 원천을 봉쇄하는 일일 것이다. 디자인은 보이지 않는 '어떤 이상적인 디자인 방향'과 검투를 벌이는 것과 같다. 수많은 변수는 변칙적으로 발생하는데, 이 모든 것은 어떤 정해진 틀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다. 가장 단순한 원리가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중요하다. 


즉, 어떤 디자인 기법도 그 자체로 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지난 글 '제가 디자인 툴을 좀 배웠는데요.'(https://brunch.co.kr/@yjjang/13)에서 언급한 내용과도 일정부분 통하는 내용으로, 디자이너의 역할은 '기술자'가 아닌 '상상가'라는 점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어떤 방법론을 완벽히 수행하는 것은 그 방법론의 기술자가 되는 것일 뿐이다. 디자이너의 목표는 효율적으로 대상이 목표로 하는 어떤 가치를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 단 하나이며, 그 외에 어떤 것도 이 목표에 이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기법이 가진 묘용에 빠져 지나치게 몰입하다보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디자인에서의 주화입마란 무엇일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과정은 풍성하고 많은 데 비해 결과물이 평이하고 빈약한 경우가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구성원들은 굉장히 많은 노력을 들이고 뭔가 대단한 것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막상 다 쳐내고 나니 오랜 시간 동안 진행했던 디자인 방법론이 무용지물이 되는 느낌이 든다. 처음 프로젝트를 받았을 때 가졌던 영감보다도 못한 결과물이 나온 듯한 그 느낌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허탈함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잘' 버리는 것이다.


디자인에 대한 제반적인 이해 없이 단순히 영감이나 직관만을 믿고 달려드는 것은 기법에 매달리는 것만 못하다. 반대로, 기법이 가진 모든 내용을 알면서도 그 정수에 대한 연구와 이해 없이 단순히 어떤 방법론만을 반복하는 것은 스스로의 상상력에 감옥을 만드는 것과도 같다. 즉, 모든 일이 그렇듯이 '중용'이 중요하다.


디자인 기법들은 처음 배울 때에 아주 충실히 익혀두어야 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그 관점을 읽는 것이다. 어떤 방법론이 어떤 것을 보게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왜 보게하는지를 깊이 고민해 자신만의 용어로 풀이할 수 있다면 그 방법론을 충실히 내재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내재화시킨 뒤에는, 가장 중요한 원리만 남기고 형식 자체는 서서히 없앰으로써 다양한 사례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정리하면, 어떤 기법도 그 자체로 좋은 디자인을 보장할 수는 없다. 미국의 'Frog'이라는 유명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일하셨던 어느 교수님으로부터 대표였던 할무트 에슬링거(Hartmut Esslinger)에게 '우리도 프로젝트 프레임워크를 만들어 반복되는 디자인 프로젝트마다 일정한 방식으로 대응하면 훨씬 효율이 올라갈 것'을 이야기했다가 하마터면 당일 퇴사할 뻔했다는 일화를 농담처럼 들은 기억이 있다. 모든 프로젝트는 각각의 케이스가 가진 성향과 특징에 따라 매번 다르게 해석되고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Peeler, OXO


디자인은 언제나 목표 지향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지향할 수 있는 영감과 직관을 훈련시키는 것이 디자이너의 전문성이고 사명이다. 우리는 어떤 학습을 통해서도, 이 관점 자체를 키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똑같은 대상을 보고도 다른 것을 발견하고 상상할 수 있는 것, 디자이너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는 이런 것이다. 감자를 깎는 아내를 보고 기존의 감자깎이가 가진 문제점을 발견하여 단순하고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잇는 것은 관점이 잘 훈련된 디자이너의 관찰과 배려의 결과이다. 


가장 단순한 원리가 정답이다.


수많은 방법론이 넘치는 세상이다. 헤겔의 변증론을 빌려 생각해보자면, 어제의 '합'이 오늘의 '정'이 되고 내일의 '반'이 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수없이 반복되면서 더 진리에 가까운 것을 찾아갈 뿐, 어떤 답도 진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부분은 수많은 방법론들이 가진 공통적인 시각, 사용자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배려하고 사랑하는 그 마음, 그리고 이를 걸러내어 형상으로 연결시키는 그 논리적 해석과정, 사용자 테스트를 통해 검증하고 이를 다시 결과물에 반영하는 완성의 자세 등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가치들은 평소에 훈련되어 내재화되어 있어야지, 프로젝트 자체를 기법의 연속으로 채워가려 해서는 안 된다. 방법론을 따라가기에 바쁜 프로젝트는 구성원들이 영감과 직관을 얻을 틈이 없으며, 결과물 자체가 이미 한계가 명확해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중요한 프로젝트일수록, 가장 단순한 원리가 정답이다. 영국의 디자인협회에서는 2005년 더블 다이아몬드(Double Diamond)개념으로 서비스디자인을 설명한 바 있는데, 발견 - 정리 - 발전 - 배포로 이어지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구조이다. 정보의 양을 세로축으로 두어 어떤 부분에서 아이디어가 발산해야 하는지도 잘 표현하고 있다.



Double Diamond, 영국 디자인 협회



이 정도면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거의 대다수의 경우에 맞는 일반적인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의 모든 세부적인 사항들은 재량에 달려있다. 디자이너가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인 것이다. 뛰어난 기법이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관점이 좋은 디자인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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