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읽던 소설 ‘해리포터’에서는 ‘버터 맥주’라는 술이 꽤 자주 나왔다. 소설 속 가상의 마을 ‘호그스미드’에 있는 ‘스리 브룸스틱스’라는 가게에서 파는 메뉴인데, 해리포터와 친구들은 그곳을 가면 항상 버터 맥주를 시켜 먹고는 했다. 12살이던 당시의 내게 있어서는 미성년자인 주인공이 술을 마신다는 것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저 맥주라는 것이 무슨 맛이기에 그들이 그토록 즐겨 찾는지가 궁금했다.
이후로도 성인이 될 때까지 맥주를 비롯한 술에 대한 환상은 점점 커져만 갔다. 해리포터뿐만 아니라 내가 본 거의 모든 소설에서 술맛에 대한 묘사는 빠지지 않고 나왔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음료수는 그저 물보다 맛있어서 마시는 것에 불과한데, 소설 속 술은 그 이상의 것들이 담겨있는 것처럼 묘사되곤 했다. 술의 맛에는 깊이가 있고 다채로운 향이 있다는 둥 찬양 일색이었고, 소설 속 인물들이 취기가 오른 상황에서 인생을 논하는 장면이 나오면, 어린 내 시점에서는 ‘저것이 어른의 맛이고, 어른의 기분인 걸까’하는 호기심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능시험을 친 이듬해, 처음으로 마셔 본 소주와 맥주는 정말 최악이었다. 소주에서는 그야말로 소독약 맛이 났다. 상처를 닦아내는 알콜 솜을 혀로 핥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맥주라고 나을 건 없었다. 맥주에서는 보리차에다가 실수로 에스프레소를 끼얹은 듯한 쓴맛이 났다. 나는 보리차 자체는 고소한 맛 덕분에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거기에 불필요한 쓴 맛을 왜 추가한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릴 적 내 비루한 상상력으로는 맥주에선 보리의 고소한 향과 더불어 묵직하고 담백한 맛이 날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보리차 맛을 토대로 떠올려 봤던 맥주 맛에 대한 기대감은 보기 좋게 배신당하고야 말았다.
나는 술을 못 마신다. 그것도 진짜 엄청나게 못 마신다. 얼마 전에 건강검진을 받느라 작성해야 했던 문진표에서 ‘지난 1년간 술을 마시는 횟수는 어느 정도입니까?’라는 질문이 나오자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항목에 체크를 할 정도니까 말이다. 태어나서 가장 많이 마셔본 건, 다 합쳐봐야 병 하나를 못 채우는 소주 5잔이었다. 그것도 5잔째에 잠이 와서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보통 사람들은 술을 마신 다음 날에 숙취가 온다고 하던데, 난 너무 적게 마셔서 숙취가 오는 일도 없다. 그야말로 요즘 표현으로 ‘알쓰(알콜 쓰레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체질은 유전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께서는 부부 동반 모임에 가시면 어쩔 수 없이 술을 드시기는 하시지만, 맥주 한 캔을 드시면 바로 주무신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돌이켜 보면 난 아빠가 술에 취해서 퇴근하는 모습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유전자의 한계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다.
이런 체질이다 보니 20대 초반에는 곤혹스러운 일을 많이 겪었었다. 수능 공부 때문에 강제로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학생들에게 합법적으로 음주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게 되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마련이다. 내 친구들은 상당수가 술을 좋아했다. 아니 표현을 조금 정정해야겠다. 나 빼고 술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러다 보니 나는 친구들과 술자리를 갈 때마다 술 권유를 받게 되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 이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남들도 좋아할 거라는 오만에 빠지기 딱 좋은 나이다. 당연히 내 친구들도 그랬고. 소주 한 잔에 힘겨워하는 내게, 친구들은 ‘술은 마시면 늘어’라면서 무작정 먹이려 들었다. 덕분에 그때는 술자리 스트레스 때문에 친구들과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애주가들은 ‘술이 주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알콜이 주는 취기와 그로 인해서 업되는 기분, 알콜 특유의 휘발성 강한 향과 쓴맛까지.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걸 싫어했다. 쓴 맛 때문에 아메리카노도 안 마시는 사람이니 술의 쓴맛이 좋을 리 없다. 게다가 취기가 오르면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두통이 먼저 찾아와서 내 머리를 두들겨 대기 시작한다. 속은 안 좋지, 머리도 아파오지, 그러면 기껏 술자리에 떠들러 왔는데 고통을 참느라 정신이 없어져 말수까지 줄어든다.
그보다 더 싫은 것은 ‘부어라 마셔라.’를 외쳐대는 강압적인 분위기였다. 한껏 취기가 오른 친구들은 술을 마셨는데 혼자 떠들지 않고 조용해진 나를 보며 비난하기 바빴다.
‘술 들어갔으면 속 얘기도 좀 하고 해라. 분위기 빠지게 왜 혼자 꽁해있어?’
내게 억지로 술을 주량 이상으로 먹여놓고 그런 얘기를 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술자리를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원래 말이 많지만, 술을 마실수록 머리가 아파서 말수가 줄어든다’고 설명했었기 때문이다. 솔직한 얘기야 술 없이도 분위기 타서 얼마든지 할 수 있건만, 마치 속마음을 열어젖히는 비밀 암호가 알코올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이 주당들은 꼭 술을 먹인 채로 대답을 들어야만 진심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는 술자리를 되도록 피해 다녀야만 했다.
친구들이 철이 들고 내 입장을 존중해 줄 때까지는 꽤나 많은 세월과 사건들이 필요했다. 어떤 친구는 술자리에서 사람을 때려 1000만 원이라는 합의금을 내야 했고, 어떤 친구는 회사 회식에서 내가 당했던 것 같은 술 강요를 당하며 역지사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때가 되어서야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을 멈추었다.
일련의 사건들과 함께 세월이 흐르면서 내 주변 분위기는 많이 바뀌게 되었다. 정말 술에 미쳐 사는 알콜중독자 같은 녀석들과는 멀어지게 되었고, 당시의 철없음을 반성한 몇몇 친구들은 이제는 술을 못 마시는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들 본인의 기분에 좋은 것이 남에게도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나이가 된 거다. 덕분에 나는 이제 굳이 술잔을 꺾지 않고도 술자리를 함께할 수 있다. 내 글라스에 콜라 혹은 사이다를 채워주는 친구들과 함께 말이다.
게다가 나는 술을 못할 뿐이지, 술자리 자체는 제법 좋아한다. 원래부터 관심사가 많고,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한 번 만나면 목이 쉴 때까지 수다를 떨 때도 있다.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술자리에서는 이야기가 이리 튀고 저리 튄다. 최근에 나온 영화 ‘오펜하이머’ 얘기를 하다가, 영화 속에서 다뤄진 원자폭탄 이야기로 넘어가서 핵융합과 핵분열 등 과학적인 주제로 열정적인 토론을 하더니, 폭탄이 터졌던 일본으로 이야기의 무대를 옮겨가서 역사와 전쟁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일본에 다녀온 친구가 일본에서는 어떤 여행지가 재밌더라 얘기를 하면, 다른 친구가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면 또 OTT 서비스에서 요즘은 어떤 드라마랑 영화가 핫하더라 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에 따라 쉴 새 없이 주제가 바뀌는 거다. 여기서 나는 굳이 알콜의 도움 없이도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입을 쉬지 않는다. 그저 주제의 제약 없이 마음껏 얘기하는 이 자리가 너무 좋고, 술자리 특유의 정신줄 놓고 얘기하는 분위기를 사랑한다.
그러다 보니 요즘 들어서는 아쉬운 것도 하나 생겼다. 20대 초반에 쌓인 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줄어든 후에 돌아보니, 내가 술을 마실 수 있었다면, 아니 정확히는 즐길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가끔가다가 술을 예찬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일상의 지루한 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데 있어서 술만 한 것이 없어 보인다. 애주가였던 내 전 직장동료는 항상 퇴근할 때마다 냉장고에 있는 술을 꺼내서 마시는 게 하루의 완벽한 마무리라고 했었고, 와인을 좋아하는 내 친구는 내가 요리한 음식 사진을 볼 때마다 ‘와, 그거 와인이랑 페어링 해서 먹으면 진짜 끝내주겠다’며 칭찬한다. 게다가 내가 캠핑을 나가서 환상적인 야경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고 있으면, 도대체 왜 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제로콜라가 있냐며 혀를 차는 친구들도 있다. ‘내 비록 네가 술 못 마시는 건 알지만, 본인 가치관에서는 풍류를 즐겨야 할 곳에 술이 빠지는 것은 너무 아쉽다’ 라나?
나는 호기심이 많고 세상 모든 걸 경험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격투기를 좋아하다 보니 선수에게 정말 힘이 실린 풀파워 펀치를 맞아보기도 했고(방구석에서 만화나 영상으로만 격투기를 접하던 오타쿠에서, 진정한 스포츠인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놀이기구를 타거나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스릴을 즐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음식도 가리는 게 없어서, 해외의 온갖 해괴한 내장 요리도 다 먹어봤고, 태국의 벌레요리도 먹어봤으며, 일본의 한 이자카야에서는 듣도 보도 못했던 악어고기를 먹어본 적도 있다(예상외로 악어는 너무 맛있었다. 닭고기와 돼지고기의 중간 느낌인데, 담백하고 식감이 좋았다). 그리고 보통은 이런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감각을 깨닫고, 그전까지 미지의 영역이었던 것들에 대해 공감할 수가 있게 돼서 내가 성장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술맛만큼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다른 경험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직접 몸으로 겪어 봐도 공감하기가 힘들다. 술과 곁들여 먹기에 ‘술안주’라는 이름이 붙은 음식들도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술과 함께 먹어서 더 맛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곱창이랑 막창은 없어서 못 먹고, 닭똥집과 알탕, 아롱사태 수육, 참치 회 등도 내가 사랑하는 음식인데, 항상 단독으로 먹는 게 더 맛있었다. 아무리 친구들이 권하는 소주와 맥주, 막걸리와 청주, 와인과 위스키 등을 곁들여 먹어봐도 그냥 먹는 것보다 더 맛있어지질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억울하다. 누군가가 내게서 감각 하나를 빼앗아 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나도 더 맛있게 먹고 싶고, 분위기에 취하고, 풍류를 즐기고 싶은데 도저히 알콜의 향과 술의 맛에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류의 문명보다 역사가 긴 것이 술이라고 하던데, 호기심 많고 경험주의자인 내가 이 분야를 공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프다. 세상에서 나 혼자만 그 감각을 느낄 수가 없는 그런 기분이 든다.
달달한 걸 좋아하고, 쓴맛을 싫어하는 것을 어린애 입맛이라고들 하던데, 솔직히 나는 이 말에 반박할 수가 없다. 어릴 때부터 기대해 왔던 술맛은 내 예상과는 너무 달랐고 내 취향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 체질은 술을 받아들이질 못하니 맛과 분위기를 음미하기도 전에 취해버린다. 심지어 취했을 때의 기분도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으로 가다 보니, 결국 어른의 맛은 앞으로도 영영 알 수가 없는 것은 아닐까 무섭기도 하다.
그래도 가끔 날이 선선하고 별빛이 좋고, 고독한 기분이 드는 밤이 되면 여기다가 와인 한 잔만 곁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맛인지도 모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