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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서울, 서브스턴스 더블리뷰 1부

상실과 회복에 대하여.

by 진하린

-- 해당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상실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컵 가장자리에 생긴 얇은 금 같다.


대충 보면 멀쩡해 보이는데, 입술이 닿을 때마다 혀끝에 걸린다. 그 불편감은 서서히 나를 잠식해 가고, 어느새 피를 본다. 그렇게 조금씩, 물에 잠겨 침몰해 가는 배처럼 상실의 틈새로 우울함이 스며들어 온다.


나는 활동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스포츠를 즐긴다. 말이 안 맞아 보이겠지만,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고 소심한 내게 있어 운동처럼 담백하게 사람을 사귈 수 있는 활동은 많이 없다. 건강도 겸사겸사 챙기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마치 신화 속 아킬레우스처럼 발목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 인대가 너덜너덜하고 관절염이 있어 발목수술을 이미 한 번 했건만, 2년 만에 다시 고장 났다. 결국 올해 4월에 2번째 수술까지 마쳐야만 했다.


당연히 수술을 하게 되면 운동은 사치다. 재활기간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6개월간은 정든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던 운동을 멈추는 순간, 같이 숨 맞추던 사람들은 내 인생에서 희미하게 멀어진다. 단체 카톡방에서 내가 쳤던 채팅은 저 위로 밀렸고, 새로 올라온 모임 사진 속 내 자리에는 다른 얼굴이 앉아 있다.


나는 내 삶에서 운동이라는 한 부분만 못하게 되었지만, 인간관계부터 자존감까지 많은 것들이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를 지탱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운동이 얼마나 큰 요소였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아, 내가 약해졌구나.

내가 늙고 병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몇 달이 걸렸다. 어떤 날은 멀쩡한 척하다가 집에 들어와서야 무너졌고, 어떤 날은 아침부터 일어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연초에 개봉했던《The Substance》는 내가 '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후로 본 첫 번째 영화였다.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50대 피트니스 쇼 진행자로, 방송국에서 젊은 진행자로 교체당한다.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서브스턴스라는 시술로 척추에서 추출한 세포를 활용해 젊은 자아 '수'를 만들어낸다. 둘은 일주일씩 번갈아 몸을 쓰기로 약속했으나 수는 점점 더 오래 몸을 독점하고, 엘리자베스는 추하게 변형되어 간다.


엘리자베스가 망가지는 모습을, 나는 관객입장에서 남의 일인것마냥 비웃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스크린 속 엘리자베스인 것처럼 괴로워했다.

특히 그녀가 동창을 우연히 만나 저녁 약속을 잡은 장면에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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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는 젊은 시절 그 동창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자신보다 급이 낮은 평범한 남자. 하지만 지금의 엘리자베스는 젊고 아름답던 전성기의 모습이 아니다. 물론 동창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모습이 여전히 아름답게 보였겠지만, 과거의 아름다움을 잃은 엘리자베스 입장에서는 자신의 모습이 견딜 수 없이 추하게 느껴질 뿐이다. 함께 식사하기로 한 시각이 다가오지만, 엘리자베스는 화장을 고치고 또 고친다. 그러나 이미 잃어버린 젊음을 덧칠할 수도, 얼굴의 주름을 지워낼 수도 없다.

결국 그녀는 외출하지 않는다.


마치 영화를 보기 전까지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자존감이 무너지자 약속이 잡혔을 때의 준비시간이 속절없이 늘어났다.

나는 더 이상 젊고 아름답지 않으니, 옷이라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으면 너무 초라하게 보일 것만 같았다. 바지와 신발의 색깔을 매칭시키느라 20분, 왁스를 발랐음에도 이상하게 뻗치는 머리카락을 제어하기 위해, 다시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하느라 또 30분을 소비하곤 했다.

특히나 '영포티' 밈이 슬슬 발현하던 시기라, 나는 아직 30대 중반임에도 혹여나 그 꾸밈조차도 나이에 안 맞게 과하고 시대착오적일까 봐 어지간히도 신경 썼다.


고작 발목 하나 때문에 노화까지 생각하냐는 질문을 할 사람도 있었겠지만, 나는 두 번째 수술을 준비하면서 너무나도 많은 말을 들으며 탈진해 있었다. 내 발목은 이미 관절염이 심하게 진행되어 이제는 아무리 재활을 하고 관리해도 영원히 젊은 발목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얘기도 들었고, 어떤 의사는 손흥민처럼 경기당 몇억씩 받을 것 아니면 평생 스포츠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얘기도 했었다.

젊은 시절에는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나'를 꿈꿀 수 있었지만, 이제는 현상유지를 하는 것조차도 힘들다는 얘기들을 들으며 사형선고를 받는 기분이었다.

특히나 20대 때 우울증을 운동을 통해 극복했던 나였기에, '이제는 마음이 힘들 때 무슨 방법을 써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성장과 회복이 일상이었던 내 일상은, 이제 현상유지와 퇴행이라는 문법으로 바뀌었고, 자존감이 무너진 나는 무력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서 기어 다닐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된 7월달에는《미지의 서울》을 봤다. 이 드라마는 같은 상실을 서브스턴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상실을 인정하지 못해서 추하게 무너지는 모습 대신, 상실을 인정하고 유지보수하는 삶의 모습들로써 말이다.


미지의 서울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장애가 있다.

미지는 육상선수를 하던 고3 때 왼쪽 발목을 다친다. 호수는 사고 이후 몸의 절반이 무너졌고, 호수가 일하는 변호사 사무실 대표는 휠체어를 민다. 미래는 어릴 적부터 병을 앓았다. 이들은 모두 제각각의 방식으로 무너졌고, 제각각의 방식으로 버티며 살아간다.

미지의 세계에서의 상실을 겪은 이 주인공들의 목표는 "예전처럼 돌아가기"가 아니다. 아무리 재활을 열심히 해도 멀어버린 호수의 귀는 회복되지 않을 것이고, 미지는 육상 선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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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모두 제각각의 방식으로 무너졌고, 제각각의 방식으로 버티며 살아간다.


그들은 건강했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저 부서진 채로 살아가고, 현 상황에 적응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적응을 위한 위태로운 의태는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든다.

미지는 수년간의 칩거생활에서 나온 뒤로는 애써 밝은 척을 하며 자신의 무력감을 숨기고, 몸이 약했던 미래는 고통을 숨기기 위해 표정을 숨기는 것이 익숙해져, 회사에서 겪는 지금의 지옥 같은 상황도 무표정으로 견뎌내고 있다. 호수 회사의 대표인 이충구 변호사는 휠체어를 탈 정도로 약한 육체 대신에 심성이 표독하고 냉철해졌다.

이들이 보이는 각자의 생존방식은 저마다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 약점을 숨기고 '나 아직 쓸모 있어요'라고 외치는 절규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서브스턴스와 미지의 서울의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가 나온다.

서브스턴스의 주인공은 노화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젊은 시절의 자신을 탐내다가 무너졌다. 그리고 영화는 그녀의 욕망에 대해 다소 코믹하게까지 보이는 억지 피분수 쇼를 보여주며 끝까지 조롱한다.

반대로 미지의 서울은 자신이 쓸모없어질까 봐 꾸역꾸역 버티는 인물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 상실을 회복하기 위한 여유를 가지라는 조언을 덧대며, 그들에게 굳이 억지로 강한 척할 필요 없음을 어필한다.


"사슴이 사자 피해 도망가면 쓰레기야?
소라게가 잡아먹힐까 봐 숨으면 겁쟁이야?
다 살려고 싸우는 거잖아."



흔히들 '도망친다'고 하면 비겁하다고 하지만, 도망 또한 엄연한 생존 기술 중 하나다. 이겨낼 수 없는 풍파에 맞서서 싸워 죽기보다는 후일을 도모하며 움츠러드는 것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프면 아프다는 내색을 하고, 힘들면 나아질 때까지 쉬어도 되고, 혼자 정 해결할 수 없으면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내가 사자나 호랑이는 아니니까. 그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작은 사슴 한 마리에 불과하니까. 일단 살기 위해 도망친다. 살아야 뭐라도 더 하지 않겠는가.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나는 내가 쓸모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 집착하며 살았다.

발목 때문에 운동도 하기 힘들어졌지만, 친구와 사업을 한답시고 프리랜서 일도 미뤄왔기에 업무적으로도 단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스스로를 증명할 요소들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고,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점점 곤두박질친다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경제력과 명예, 그리고 연애와 결혼 그 모든 것이 충족되지 않는 상태에서 내 삶이 무슨 가치가 있냐'는 생각에 휩싸여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의 몫은 기능의 합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아직 전부 극복한 것은 아니기에, 때때로 "나는 쓸모없다"는 생각에 발목을 잡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되뇌인다.

사람의 가치는 기능의 합이 아니라고. 내가 비록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은 아닐지라도 살아갈 가치마저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완전히 젊지는 않지만, 아직은 체력도 또래보다 괜찮고, 재주가 없는 사람도 아니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발전해 나가려 노력하지 않냐고. 내 기능의 총점은 낮더라도, 누군가에게는 합격점이 넘는 부분이 분명 있을 거라고.

잘 되지는 않지만, 이렇게라도 믿으려 애쓴다. 자기 최면이라도 괜찮다. 그래야 버틸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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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이어 붙이는 '킨츠기(金継ぎ)'라는 기법이 있다고 한다. 금가루나 은가루로 도자기의 깨진 부분을 아름답게 치장해 복원하는 기술이다. 이 기법은 마모되거나 부서진 흔적 또한 역사로 삼아 보존하고 더욱 가치 있게 받아들이는 철학이 스며있다고 한다.


나도 언젠가는 내 금 간 자리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을까. 상실의 흔적이 부끄러운 결함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증거이자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 역사라고 믿을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금이 내 일부라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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