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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린 Feb 15. 2024

고독에선 다크초콜릿처럼 쌉싸래하고 중독적인 단맛이 난다


1. 가을이 기운다.


‘하아-’

아침 출근길에 나서자 나를 둘러싸는 공기에서 묘하게 시린 느낌이 난다. 혹시나 싶어 입을 벌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자, 따뜻한 날숨을 받아들인 가을의 대기는 하늘에도 한 점 없던 구름을 지상에서 피워낸다. 올가을 첫 번째 입김. 덕분에 주말 동안 내린 가을비가 어느새 가을의 무게중심을 여름에서 겨울 쪽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제는 동네 편의점에 들를 때도 외투가 필요하고, 들숨에서도 건조하고 냉랭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변화는 길거리에서 드러난다. 가로수들의 잎 색이 발그레하게 물들고, 빨간 잠자리 떼가 하늘을 수놓은 광경이 보인다.

이때부터는 가을이라는 계절에 대한 감정이 복잡해진다. 날씨는 을씨년스러워지는데,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우니 괴리감이 생긴다. 길에서 손을 잡고 다니는 코트 차림의 커플들과 달리,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고개 숙인 채 땅을 보며 걸어가는 내 모습도 그러한 대비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치 중 하나가 된다. 내 속이 좁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에 떠다니는 고추잠자리들이 서로의 몸을 연결한 채 짝짓기 비행을 하는 걸 보며 질투심이 차오른다. 커플들 팔짱 끼고 다니는 거랑 묘하게 닮았단 말이지.


나는 가을을 연인과 함께 보내본 적이 없다. 혹자는 고작 연애 따위 지금 못한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조급해할 필요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시대상이 변해가는 요즘 세상에서 혼자인 것이 뭐가 부끄럽냐며 다독여 주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의와 타의에는 여름과 겨울만큼이나 명백한 차이가 있고, 나는 자의로 가을을 홀로 보내는 종류의 사람은 아닌지라 허전함에 휩싸일 뿐이다. 커플들의 팔짱에서는 서로를 덥혀줄 따뜻한 온기가 타고 흐르겠지만, 나는 가을의 냉기가 소매를 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겨우 막고 있을 뿐이다.




2. 대추야자 씨앗.


가을 이맘때가 되면 외로움이 밀물처럼 차오른다. 가을 타는 사람이 어디 나 혼자뿐이겠냐만은, 나는 유독 이때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추스르느라 고생했던 기억들이 짙다. 그건 아마도 힘들었던 과거 덕분에 사람들과 가까워지지 못하는 기질이 생겼고, 주변에 머물러주는 사람이 많이 없는 편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난 어릴 적에 꽤 오랫동안 따돌림을 당해왔다. 그렇게 입은 상처들로 인해 사람들을 쉽게 믿지 못하는 성격으로 변한 것은 물론, 타인에게 접근하는 법에 대해서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나이만 먹게 된 거지. 그 탓에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를 종종 들을 정도로 미숙하고 눈치 없는 성인으로 자라난 나에게는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법보다 먼저 배워야만 하는 것이 따로 있었다. 바로 ‘나대지 않는 것’이었다. 이미 학창 시절부터 뒤처진 내 대인관계 스킬은 당연히 또래보다 부족했고, 앞으로의 사회생활에서 대인관계가 원만해지려면, 뭔가를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실수를 하나라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내가 의욕적으로 나서서 행동했던 일들이 상황을 개선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더 악화하는 일들이 잦았다. 내 딴에 없는 눈치 최대한 쥐어짜서 상대방이 원할 거라 생각한 일을 앞장서서 처리하면,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냐고 핀잔을 듣기도 했고,  친구를 위로한답시고 뱉었던 발언이 오히려 친구의 콤플렉스를 건드려서 사이가 틀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좋게 봐줘야 중학생쯤에서 멈춰있던 내 사회성 수준으로는 성인들의 섬세하고 고급진 대인관계 에티켓을 알 리가 없었고, 의도만 좋았던 실수를 남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들이 지속되면서 나는 상대방의 의중을 함부로 파악하려 들지 않고, 내 감정을 함부로 표현하지 않게 되었다. 될 수 있으면 꼭꼭 숨기고 감추어서 상대방과 감정적 교류를 차단했더니 상대방과는 오로지 사무적인 부분에서만 소통하면 되었고, 덕분에 자잘한 실수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만 해도 회사에서 일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평균 수준의 사회인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수년간의 회사 생활에서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채 나 자신을 죽이면서 조용히 살아갔다. 덕분에 따돌림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어떠한 동료랑도 필요 이상으로 친해지지 않았고, 사적인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이런 일도 있었다. 퇴사를 결심했을 때였는데, 일반 사원이라면 1달 전에만 통보하면 되겠지만, 난 회사의 창립멤버였다 보니 도의상 3달 전에 임원진에게만 통보를 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퇴사를 한 달 남긴 시점에서 이 얘기를 부사수에게 전했더니, 부사수가 화들짝 놀랐다. 내가 퇴사할 사람처럼 보이질 않았다는 거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없어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면서, 굳이 업무 파트너인 자기에게도 이렇게나 벽을 쳤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워했다. 나의 사무적인 태도에 대해 섭섭해하는 듯한 그의 말을 들으며, 내심 속으로는 ‘실패하지 않았어’라는 흐뭇함을 느꼈다.

어쨌거나 트러블을 만들 만큼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얘기니까.


얼마 전에 뉴스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봤다. 2000년 된 대추야자 씨앗이 발아했다는 것이었다. 씨앗인 채로 두면 썩지 않고 보존되는 것이 사람 관계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앗일 때는 그토록 질긴 생명력을 품고 있는 주제에, 싹을 틔우고 나면 물 조절 실수 한 번에 뿌리가 썩어 죽거나, 시들어서 죽는다. 나 또한 인간관계에서 될 수 있으면 물을 주지 않는다. 허투루 싹을 틔워서 썩히는 것보다는 보존이 잘 되니까. 그래서일까 주변의 관계들은 그저 살아있는 미라처럼 건조하게 남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람은 끊임없이 관계를 갈구하는 법이고, 나 또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30대 초반이 끝나가는 이 시점이 되자, 그런 건조한 관계에 대한 공허감은 인간관계에 대한 내 태도를 돌아보게 했다.

‘내가… 틔워낸 싹이 없네?’

그렇게 난 지금까지의 내 인간관계에서 생긴 문제들을 자각하게 되었다. 숱한 실수 때문에 깨지고 부서지는 것이 아파서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려고 했던 선택은, 결국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정체시키고 사막화시키는 감정적 정체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가을이 오면 유독 무너져 내린다. 봄에 싹을 틔우지 않았으니, 가을에 걷어야 할 결실 또한 없기 때문이다. 구름 한 점 없는 저 텅 빈 하늘만큼이나, 내 마음의 밀밭은 허전하게 비어있다.





3. 고독에서는 다크초콜릿처럼 쌉싸래하고 중독성 깊은 단맛이 난다.

고독함을 즐기는 건 장기적으로는 해롭지만 중독성이 있다. 스스로를 동정하고 아픈 곳을 쓰다듬다 보면 나아지는 기분이 들거든.


어느 날 집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퇴사하면서 백업해 온 옛 데이터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한동안 모니터를 지켜보느라 눈이 빠질 것만 같고, 졸음 또한 몰려오기에 손바닥 아랫부분을 양 관자놀이에 괴었다. 그리고 괴어 둔 손바닥을 압을 주어 돌리며 관자놀이 쪽으로 혈액순환이 되도록 하려 했다.

그렇게 졸음이 깨지려던 찰나, 아주 잠깐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집중이 풀려버렸다. 그러더니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닐 때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그 질문. 바쁘게 일을 하고 있음에도 계속 들던 질문. 나라는 ‘사람’의 삶의 목적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남들보다 몇 발짝이나 뒤처진 내 인생에서 일이라도 열심히 하면서 살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회사를 다닐 때는 연애 한 번 못 해봤고 새로운 친구 하나 못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인간관계를 넓힌다고 해서 업무능력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고, 좋지 않은 형편에 돈 낭비만 유발하는 것이 무가치하게 느껴져서 외면해 왔지만, 어찌 보면 한 인간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놓쳐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통해서 한 가지 감정이 선명하게 의식 위로 떠올랐다.

외로움.

외로움은 기생충 같은 녀석이다. 숙주의 몸을 지배하여 명을 이어가는 녀석인지라, 내가 가장 약해질 때를 귀신같이 찾아낸다. 나는 마침 외로움이 급습하기에 가장 좋은 상태에 놓여있었다. 얼마 전 발목 수술을 한 뒤, 거의 무릎까지 올라오는 통깁스를 둘렀고, 이 상태로 한 달간 버텨야만 했다. 그리고 오늘로써 벌써 보름째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칩거 중이었다. 게다가 아침에 냉장고를 열다가 반찬통을 엎어서 그걸 치우느라 진이 빠져있었다. 발만 멀쩡하면 5분이면 치울 것을, 30분 넘게 낑낑대며 치우느라 스스로의 무력함에 질려버렸다. 그뿐이랴, 어떤 친구는 내가 칩거해 있는 동안 결혼식을 치렀고, 어떤 친구는 새 연인을 맞이했으며, 어떤 친구는 이직에 성공했다. 다들 화려하게 변화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데, 나 혼자만 6평 자취방에 감금당한 채 정체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지금만큼은 내가 마치 뒷방 늙은이가 된 것 같은 비참함마저 들었다.

보름 동안 쌓여온 감정의 결이 한 장, 두 장 차곡차곡 덮이면서 내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고, 결국 나는 그 무게에 항복하고야 말았다. 울컥거리는 감정이 속으로부터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가여운 눈꺼풀은 이 급격한 감정적 격류에 영문도 모르는 채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 아래에서는 슬픔이 얇게 차오르고, 시야는 흐려진다. 앞이 거의 안 보일 정도가 되어서야 눈꺼풀은 못내 눈물을 놓아준다. 뺨 위를 내달리던 맑은 눈물은 스탠드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받아 이내 반짝이는 구슬을 만들었고, 구슬은 턱 끝에 매달려 한참을 흔들거리더니 결국 뛰어내리고야 만다.

목은 꿀럭거리며 어떻게든 치달아오르는 울음을 저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숨은 뱉어지지도 삼켜지지도 못한 채 안을 맴돌지만, 가슴 뒤켠에서 응어리진 감정의 격류는 점점 커져만 간다. 기어이 격류를 참지 못한 채 내뱉은 숨소리에는 결국 흐느낌이 섞인다. 얇은 정적을 걷어낸 틈새로 비어져 나온 소음이 조용한 방 안을 채운다. 흐느낌은 들릴 듯 말 듯, 잠자리의 날개만큼이나 얇고 희미하게 고요 속을 휘젓는다.


얼마를 울었는지 모르겠다. 나 자신이 비참해서, 무력감이 무거워서, 외로움이 무서워서 울었다. 난 혼자서도 잘 산다고 생각했는데 모조리 무너졌다. 살림에도 자신 있고, 돈도 열심히 잘 모아놨고, 건강도 나름 잘 챙겼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혼자 살면 언젠가 무력해지는 때가 온다는 것을 너무 뼈저리게 느꼈다. 내게 짝이 생긴다고 해서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저 힘든 상황에 말 한마디, 손 한 뼘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11월 초의 밤공기는 서늘하다. 풀벌레 소리도 많이 잦아들었다. 창백한 달빛만이 처연하게 내 방을 비스듬히 타고 내려온다. 분명 이 고독함이 지나갈 것을 알지만, 지금은 그저 고독을 씹고 있다. 고독에서는 다크초콜릿처럼 쌉싸래하고 중독성 깊은 단맛이 난다. 그래서 때로는 고독 안에 풍덩 빠져들어 한없이 나를 동정하고 싶지만, 고독에 취해 살면 제명에 못 죽으리라는 직감이 든다. 어찌 됐든 가을이 끝나면 다시 일어서야 한다.

대추야자 씨앗이 2000년을 발아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처럼, 나 또한 어느 누구와도 싹을 틔우지 않은 채 이 가을을 넘기게 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거라면, 발아한 적 없는 이 씨앗 덕분에 나는 아직 썩지 않았다는 사실이랄까. 내년에는 부디 썩을 때 썩을지언정, 뿌리를 깊게 내린 채로 싹을 틔우고 싶다.


짧은 가을은 곧 끝난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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