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 째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한 문장이 있다.
"저 사람 참 인간미 없다"라는 문장이다.
요즘 말로는 "너 T발C야?"라는 유사품이 있다.
우리는 보통 감정에 충실하고 눈물 많은 모습을 '인간미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이성적이고 절제된 면모를 보이면 '로봇 같다'거나 비인간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수학과 기계, 법과 예절, 이 모든 문명을 만든 건 감정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다. 자연이 저절로 만들어준 것도 아니고,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 만든 것도 아니다. 본능을 거스르는 수많은 개념은 오로지 인간의 손에서, 정확히는 인간의 '머리'에서 태어났다.
그렇다면, 본능을 억누르고 이성을 발휘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인간미'가 아닐까?
인간과 동물을 비교해보면 서로가 공유하는 '동물적 특징'이 꽤 많다.
개도 먹이를 뺏기면 화를 낸다. 고양이도 가족이 죽으면 우울해서 활동량이 줄어든다. 코끼리는 심지어 무덤을 만들어 죽음을 기린다. 희노애락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건 척추동물이라면 누구나 가진, 너무나도 원초적인 본능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건 뭘까.
당연하게도 이성과 절제다. 감정을 억누르고, 상황을 분석하고,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능력 말이다.
아이들을 보면 이 차이가 명확하다. 배고프면 울고, 기분 좋으면 웃는다. 감정의 회로가 굉장히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우리는 이런 아이들을 보고 "순수하다"고 하지, "어른스럽다"고 하지는 않는다. 아직 이성이 여물지 않았고, 감정을 절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른이 된다는 건 감정을 통제할 줄 안다는 뜻이다. 동물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고유한 특성. 그래서 나는 이성과 절제가 진정한 인간다움이라고 불려야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참 아이러니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실수투성이에 감정을 주체 못 하는 캐릭터에게 '인간적 매력'이라는 면죄부를 준다. 반면, 상황을 수습하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캐릭터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내가 무언가 크게 착각하고 사는 걸까?
감정적인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나도 속으로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고, 고양이들을 키우며, 조카들을 보면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서 사족을 못쓰고, 슬픈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펑펑흘리는 사람이다.
단지, 그런 내밀한 감정을 굳이 공적인 자리에서 전시하지 않을 뿐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건, 내 감정의 무게를 타인에게 떠넘기는 무례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당황스러운 부분은 감정이 넘쳐서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간미 없다는 말을 듣지 않는데, 상황에 맞춰 감정을 삭히고, 차분하게 이성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만 유독 '인간미 없다'는 비난을 듣는 것이 너무 아이러니 하다는 것이다.
'너 T발 C야?'라는 욕설 섞인 힐난은 대중적으로 쓰이지만, F성향의 사람을 욕하는 단어는 딱히 밈(meme)화 되지도 않는다. 여기에 사례를 한 스푼 더 얹자면, 과거에는 '인간미 없다'는 말이 'AI 같다'는 말과 동치되어있었는데, 요즘은 'AI보다 못하다'로 격하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LLM이 나오고 나서 접한 AI는 어떤 인간보다도 친절하고 따뜻한 말을 잘 하도록 훈련 되어 있었고, 역설적이게도 감정을 억누르며 '어른스럽게' 살려 했던 T들은, 기계보다 못한 '사회성 결여 인간'이 되어버린 셈이다.
물론 나 또한 AI같다느니, AI보다 못하다느니 하는 말들을 모두 직접 들은적이 있다.
내 자신이 흐트러지는 것이 싫어 술도 안 마시고, 내 철칙 중 하나인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된다'를 지키며 살다보니, 몇 몇 지인들은 그 모습이 부자연스럽고 이질적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했기 때문이다. 속을 알 수 없는 구렁이같다는 얘기마저 들어봤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 그리고 인간미 없다는 말을 듣는 같은 T들을 위해서 변명을 좀 하자면, 우리도 다 똑같은 사람이다. 희로애락을 느끼고, 상처도 받는다.
다만 해결 방식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불필요한 감정 소모로 서로를 할퀴고 싶지 않다.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감정이라는 댐의 수문을 굳게 잠그고 있을 뿐이다.
억울해서 덧붙이자면, T라는 꼬리표가 붙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감정 없는 괴물처럼 매도당하는 건 정말 불쾌하다.
실제로 지금은 연이 끊긴 내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너는 술도 안 마시고, 화도 안 내고, 감정 표현이 없어서 기분 나빠. 사람이 아니라 AI처럼 느껴져."
거기에 덧붙여 "넌 화도 안 내고 참았다가 나중에 조목조목 따지잖아. 그거 되게 기분 나빠. 꼭 뒤에서 칼 갈다가 찌르는 것 같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멍해졌다. 30대 중반의 성인이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게 '칼을 가는 행위'로 매도될 일인가? 그때그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야만 '진솔한 소통'인 건가? 친구가 반복하는 실수가 습관인지 우연인지 판단하기 위해, 감정을 식히고 이성을 벼려 건넨 조언이 그에게는 '흉기'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내가 친구에게 똑같은 수준이 되어 치고박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진심 기분 개같았다.
솔직히, 미디어와 SNS가 만들어낸 이 풍토가 원망스럽다. 눈앞에서 울지 않고, 화내지 않고, 감정을 투명하게 전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감 능력 없는 로봇' 취급을 받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나는 그저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서, 당신에게 상처 주기 싫어서, 내 안에서 수많은 감정을 정제하고 또 정제하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러니 부디 알아주었으면 한다.
T들의 침묵은 무관심이나 소시오패스적 성향의 발현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을 배려하는 가장 치열한 방식이라는 것을.